중앙선관위, 발달장애인은 ‘신체적 문제 없다’며 투표 조력 막아
대선 D-100일… 피해 발달장애인, 법원에 긴급 임시조치 신청

“저희 아들은 활동지원사의 도움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근로지원인의 도움으로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선거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신체적으로 혼자 걸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선거할 때 혼자 투표하게 내버려 두는 건 전국의 25만 명 발달장애인의 소중한 선거권을 묵살하는 것입니다.” (발달장애인 피해자 박 아무개 씨의 어머니)

29일 오전 11시,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아래 장추련) 등은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100일 앞두고, 발달장애인의 투표보조 지원에 대한 임시조치 및 차별구제청구소송을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29일 오전 11시,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이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제20대 대통령 선거일을 100일 앞두고, 발달장애인 투표보조 지원에 대한 임시조치 및 차별구제청구소송을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 이가연
29일 오전 11시,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이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제20대 대통령 선거일을 100일 앞두고, 발달장애인 투표보조 지원에 대한 임시조치 및 차별구제청구소송을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 이가연

발달장애인 박 아무개 씨(31세)는 지난 4월 7일,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 당시 투표하러 갔다가 황당한 일을 겪었다. 

만 20세부터 어머니의 조력으로 투표를 했던 박 씨는 이번에도 복지카드를 제시하고 어머니와 기표소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투표소 직원에 의해 제지당했다. 그동안 투표를 할 때마다 어머니의 조력을 받았고, 조력인은 함께 들어갈 수 있다는 지침을 제시했지만 소용없었다. 마포선거관리위원회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아래 중앙선관위)에 문의해야 한다고 했고, 중앙선관위는 박 씨 혼자서 투표해야 한다고 답했다. 결국 박 씨는 아무런 인력지원 없이 투표해야 했고, 원하는 후보에 명확하게 찍었는지 확인조차 못 한 채 투표소를 빠져나와야 했다.

박 씨가 제대로 된 조력을 받지 못한 채 투표를 해야 했던 이유는 박 씨가 ‘신체상 혼자 걸어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현행 공직선거법 제157조 제6항에 따르면, 시각 또는 신체장애로 인해 홀로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은 그 가족 또는 본인이 지명한 2인을 동반해 투표보조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박 씨와 같은 발달장애인은 이동이나 손사용에 어려움이 없다는 이유로 지원이 필요한 신체장애인에 포함되지 않는다. 

중앙선관위의 변경 전 선거사무지침. “점자를 읽을 수 없어 혼자서 기표할 수 없는 시각장애인과 신체 장애(지적·자폐성 장애 포함)로 자신이 혼자서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은 그 가족(1인도 가능) 또는 본인이 지명한 2인에게 투표를 보조받을 수 있음을 안내함(특수형 기표용구 교부 가능)”이라고 적혀있다. 해당 내용 중 ‘지적·자폐성 장애 포함’은 현재 지침에서 삭제됐다. 사진제공 장추련
중앙선관위의 변경 전 선거사무지침. “점자를 읽을 수 없어 혼자서 기표할 수 없는 시각장애인과 신체장애(지적·자폐성 장애 포함)로 자신이 혼자서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은 그 가족(1인도 가능) 또는 본인이 지명한 2인에게 투표를 보조받을 수 있음을 안내함(특수형 기표용구 교부 가능)”이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21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지적·자폐성 장애 포함’이라는 내용이 선거 지침에서 삭제됐다. 사진제공 장추련

하지만 발달장애인 역시 장애로 인해 기표소에서 지원이 필요하다. 이에 장애인단체들과 당사자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중앙선관위는 지난 2016년부터 장애유형별로 필요한 편의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선거사무지침에 시각 또는 신체장애 외에 ‘지적·자폐성 장애 포함’이라는 문구를 넣어 투표보조를 받을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지난 21대 국회의원 선거(2020년 4월)부터 중앙선관위는 장애계와 아무런 논의도 하지 않은 채, 법 규정만을 근거로 발달장애인의 투표보조를 지침에서 삭제했다. 이로 인해 선거 당일 발달장애인과 가족들, 그리고 관계자들은 큰 혼란에 빠지면서 결국 발달장애인의 투표권이 심각하게 박탈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장애계는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에 강력한 시정권고를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으며, 지난 3월 26일 인권위는 중앙선관위에 발달장애인의 참정권 보장을 위한 정당한 편의제공 방안을 마련하고 관련 교육을 할 것을 시정권고 내렸다. 

인권위는 중앙선관위에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따른 참정권에서의 차별금지 및 정당한 편의 제공 △장애인복지법에 따른 선거권 행사를 위한 편의제공 등을 근거로 권고 결정을 내렸다. 또한 공직선거법 제157조는 다른 장애유형을 배제·제한하고자 하는 취지의 규정이 아니라며, 투표 보조원 이외에도 정당의 로고나 사진 등이 부착된 투표용지 등 발달장애인의 참정권 행사를 위한 적극적인 지원대책을 마련하도록 권고했다. 

김대범 활동가가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이가연
김대범 피플퍼스트 활동가가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이가연

그러나 인권위의 구체적인 권고에도 불구하고, 중앙선관위는 시정권고를 받은 뒤 약 9개월이 지났지만 제대로 된 대책이나 입장을 마련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장추련은 “이제 차기 대통령 선거가 겨우 100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런데도 아직 발달장애인의 투표권을 보장하기 위한 대책을 전혀 내놓지 않고 있는 중앙선관위의 입장을 이해하기 어렵다”라고 지적했다. 

발달장애인 당사자인 김대범 피플퍼스트 활동가는 “헌법 제1조 1항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발달장애인도 국민으로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헌법에 규정되어 있다”라며 “사회적으로 투표에 참여하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정당한 편의제공과 투표지원을 보조해야 한다. 그런데 매뉴얼에서 발달장애인에 대한 지원이 사라진 뒤 발달장애인의 참정권은 완전히 일시 정지된 것처럼 멈춰버렸다. 이제 100일 후면 우리 발달장애인도 대통령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 우리의 말을 안 들어주는 중앙선관위는 지금부터라도 우리의 말을 귀담아들어라!”고 외쳤다. 

박김영희 장추련 상임대표가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이가연
박김영희 장추련 상임대표가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이가연

따라서 피해 발달장애인인 박 씨는 대통령 선거를 100일 앞둔 현재, 긴급하게 차별 구제를 받고자 장애인차별금지법 제48조 제1항에 따라 법원에 임시조치를 청구하기로 했다. 해당 조항에 따르면 법원은 차별행위에 관한 소송 제기 전이나 제기 중에 피해자에 대한 차별이 소명되는 경우, 본안 판결 전까지 차별행위의 중지 등 적절한 임시조치를 명할 수 있다. 

박김영희 장추련 상임대표는 “어떤 사람들은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있다고 해서 모든 장애인에게 당연히 참정권이 보장되는 줄 알고 있다. 그러나 발달장애가 있는 장애인들은 여전히 참정권을 보장받지 못한다. 인권위가 중앙선관위에 분명 차별 시정권고를 했지만, 중앙선관위는 오직 대통령 후보들의 선거 유세장만 보고 있다”라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의 참정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장애유형에 맞게 정당한 편의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법원은 어서 임시조치를 내려, 발달장애인들이 대통령 선거에서 제대로 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 달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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