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기록 - 전사들의 노래
운동은 내 삶을 구할 수 있을까 _ 노금호③

《 운동은 내 삶을 구할 수 있을까 》

① 괄호 밖의 존재

② 인생의 패러다임이 변하다

③ 더 낮고 더 급진적인

정립회관 농성장에서 사회복지 실습할 때의 모습. 노란색 우비를 쓰고 있는 노금호 소장. 사진 제공 노금호 
정립회관 농성장에서 사회복지 실습할 때의 모습. 노란색 우비를 쓰고 있는 노금호 소장. 사진 제공 노금호 

- 더 낮고 더 급진적인

서울에 간 첫날 경석 형이 오라고 한 곳이 어떤 기자회견이었는데 가보니까 노회찬 의원이 계셨어요. 평소 존경하던 분을 직접 보게 되다니 와, 이런 게 바로 서울이구나! 내가 서울에 왔구나! 생각했죠. 첫날부터 경석 형 따라다니면서 경찰들이랑 막 싸웠던 기억이 나요. 집회 끝나고 경석 형이 저를 데려간 곳은 장애인복지관인 정립회관이었어요. 그곳 관장이 정년퇴임을 앞두고 규정을 바꿔서 연임을 꾀했는데 노동조합과 장애인 이용자들이 반대하면서 농성을 하고 있었어요. 경석 형이 거기 있던 사람들한테 저를 대충 인사시켜주시더니 “넌 여기 있으면 돼” 하고는 가버리셨어요. 경석이 형이 말했던 숙소가 바로 농성장이었던 거죠. 그렇게 처음 본 사람들 속에 덩그러니 남겨졌어요. 허허허.

거기서 먹고 자면서 온갖 집회와 행사는 다 다녔던 거 같아요. 그때 서울의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를 만들려는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어요. 다양한 장애 의제에 대해 상설적으로 투쟁하는 조직을 준비한다고 했어요. 거기 수련회에도 따라갔어요. 보통의 실습과는 많이 달랐지만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는 진짜 사회복지 현장이었어요. 여기저기 다니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실습일지에도 적었어요. 그때 장애인교육권연대에서 장애인 교육 차별 해소와 통합교육을 요구하면서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를 점거하고 단식농성을 시작했는데 김형수 형이 실무를 맡고 있었어요. 정립회관보다는 그곳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을 것 같아서 경석 형한테 “저 인권위에 있으면 안 될까요?” 했더니 “그렇게 해~” 하시더라고요. 그때부턴 인권위에서 먹고 자면서 생활했어요.

큰 집회가 잡히면 대구대 후배들에게 연락해서 상황 설명하고 버스 대절해서 올라와야 된다고 설득해서 오게 했어요. 거기서 에바다 투쟁 때 만났던 대학생 진영이를 다시 만났어요. 그때 진영이는 장애 대학생을 조직해서 현장 투쟁 활동을 하는 ‘장애민중현장활동’(아래 장활)이란 것을 조직하고 있었어요. 제가 고민하던 것과 닿아있어서 대구대도 같이 하자고 했어요. 후배들한테 연락해서 조직했죠. 인권위 농성이 끝날 때쯤 첫 장활이 열렸는데 그 현장은 바로 정립회관 민주화 투쟁이었어요. 한 달여 만에 다시 정립회관으로 돌아왔는데 그땐 전국에서 모인 대학생들과 함께였어요.

2005년 장애민중현장활동에서 지하철 선전전을 하는 모습.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노금호 소장. 사진 제공 노금호 
2005년 장애민중현장활동에서 지하철 선전전을 하는 모습.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노금호 소장. 사진 제공 노금호 

그때 정립회관에 폭력사태가 벌어졌어요. 복지관 측에서 조직한 장애인들이 용역깡패처럼 농성장을 침탈해서 지팡이, 소화기로 노조원, 장애인들을 막 때리는 걸 제 눈으로 직접 봤어요. 저도 같이하다가 두들겨 맞았어요. 너무나 분노스러웠어요. 그런데 이상한 건 복지관 편에 서서 노조를 탄압하는 장애인조직 DPI(장애인연맹)였어요. DPI는 국제적인 조직이고 합리적으로 장애인운동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알고 있었어요. 제가 대학 3학년 때 대구DPI가 만들어졌는데 선배들이 같이하자고 해서 발기에 참여도 했었어요.

그런데 그 이름을 가진 서울 조직이 정립회관의 민주적 운영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탄압하는 모습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았어요. 거기서 또 한 달을 보냈어요. 원래 사회복지 실습은 한 달만 하면 되는데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무도 나에게 실습이 끝났다는 이야기를 안 해주는 거예요. 하하하하. 실습 기간 동안 교육권 투쟁과 정립회관 투쟁에 함께하면서 장애인운동 활동가들을 많이 만났어요. 장애인운동에 대한 공부도 많이 했고 장판(‘장애인운동판’의 준말)의 흐름도 많이 알게 되었어요.

실습의 마무리는 교육권연대가 펼쳤던 전국순회 투쟁이었어요. 제주도에서 시작하는 거였는데 활동지원사도 없고 도와줄 사람도 아무도 없었는데 대체 무슨 깡인지 그냥 공항에 가서 직원 도움받아서 제주도에 갔어요. 제주도 교육청에 농성장이 있었는데 거기서 자고 싸우고, 부산, 대구, 경북 찍은 후에 다시 대구대학교로 돌아왔어요. 교육권연대 대표님이 서울 교육권연대에서 일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하셨는데 저는 대구에서 이런 운동을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학생운동을 정리하면 지역에 진출해서 활동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어렴풋하게 했던 것 같아요. 2개월 동안 전국 팔도를 돌고 왔더니 자신감에 충만해서 뭐든 할 수 있다, 하기만 하면 된다, 는 마음이었어요.

2006년 5월 23일, 활동보조제도화를 요구하며 대구에서 투쟁하는 모습. 사진 김유미
2006년 5월 23일, 활동보조제도화를 요구하며 대구에서 투쟁하는 모습. 사진 김유미

- 대구에서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깃발을 들다

지역운동을 하겠다고 고민했지만 막상 대구에는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어요. 대구에도 전장연의 깃발을 꽂고 싶었어요. 특히 정립회관 투쟁에서 대구DPI가 취하는 태도를 보면서 마음을 먹었죠. 투쟁하는 장애인들을 ‘비장애인 노동조합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로 치부하면서 ‘장애인 당사자가 운영하는 기관(정립회관은 한국소아마비협회가 운영한다)은 그 운영에 있어 비민주적인 모습을 보여도 괜찮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쳤어요. 장애문제는 사회 전체의 모순과 연결되어 있고 그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장애인의 현실도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고민들로 이어지면서 올바른 장애인운동이 대구에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한번 용기를 내서 내가 해보자고 마음먹었어요.

그즈음 몇몇 사람들과 연결되어서 함께 지역에서 장애인운동을 준비해 나가자고 이야기했어요. 제가 운동을 하기 위해선 주거와 저의 생활을 지원해줄 비장애 동료가 반드시 필요했어요. 2005년에 학교를 1년 더 다니면서 그런 조건을 준비하기로 했는데… 결과적으로 제 마음처럼 잘 진행되지 못했어요. 소통도 잘되지 않고 모임 일정도 잘 안 잡혔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의 전망이 달라졌고 교사나 사회복지사로 진출해서 하나둘씩 흩어졌어요. 마지막에 당사자 중엔 김봉조라는 형과 저만 남았어요. 봉조 형은 뇌병변장애를 가지고 있었어요. 사회복지학과 선배이자 동아리 회원이었는데 봉조 형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1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대책이 없어서 결국 부모님께 손을 벌려서 작은 아파트를 얻었어요. 거기에 비장애 동료와 저, 그리고 봉조 형이 함께 살기 시작했어요. 비장애 동료가 두 장애인의 생활지원을 하기로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분이 다른 활동으로 바빠지고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기도 하면서 중증장애인 둘만 덩그러니 집에 남는 상황이 자주 만들어졌어요. 그러면서 갈등이 커졌어요. 지역활동이 진척되기는커녕 우리 두 사람 삼시세끼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일조차 해결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어요. 밥도 대충대충 때우면서 생활해서 건강도 많이 상했어요. 답답하고 속상했죠.

서울에서 활동보조제도화를 요구하며 중증장애인들이 휠체어에서 내려와 한강대교를 6시간 동안 기었던 날, 노금호 소장도 함께했다. 휠체어 탄 장애인들이 “활동보조인제도화하라”고 적인 대형 피켓을 한 글자씩 목에 걸고 있다. 글자 “도”를 목에 건 사람이 노금호 소장. 사진 제공 노금호 
서울에서 활동보조제도화를 요구하며 중증장애인들이 휠체어에서 내려와 한강대교를 6시간 동안 기었던 날, 노금호 소장도 함께했다. 휠체어 탄 장애인들이 “활동보조인제도화하라”고 적인 대형 피켓을 한 글자씩 목에 걸고 있다. 글자 “도”를 목에 건 사람이 노금호 소장. 사진 제공 노금호 

그렇게 2006년이 되었어요. 이렇게 다른 사람만 믿고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지역에 일정들 있으면 꾸역꾸역 얼굴 내밀고 다녔어요. 서울에서 큰 투쟁이 벌어지면 서울에도 다녀왔어요. 서울에선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을 앞두고 한 달간 활발하게 투쟁하는데 대구지역에는 그런 게 없었어요. 그해 서울에선 활동지원서비스를 제도화하라는 투쟁이 본격화되었어요. 활동지원서비스는 저에게도 당면한 문제였고 대구지역에서도 매우 필요한 것이었어요.

그때 대구의 장애인단체들 분위기가 좀 이상했어요. 대학생 때 만났을 때는 높은 수준으로 느껴졌는데 그때 만나서 보니까 반인권적인 언행이나 패권적인 태도를 많이 보였어요. 그래서 더 작은 장애단체들을 찾아다녔어요. 서울과도 계속 관계를 유지하면서 활동지원서비스 투쟁 소식도 계속 들었어요. 서울의 투쟁이 성과를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걸 지역에 알리려고 단체들에게 설명회를 개최하자고 제안했어요. 처음엔 하겠다고 해서 진행하고 있는데 불과 며칠 후에 갑자기 두 단체의 대표가 파토를 냈어요. 황당하더라고요. 대학시절에 했던 경험을 여기서 또 하는구나, 생각했어요. 만약 대학 때 그런 훈련이 안 되었다면 화가 나서 막 싸웠을 텐데 그럴 수 있다고 마음을 다스리고 급히 플랜B를 진행시켰어요.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 이름으로 설명회를 열었어요. 갑자기 안 하겠다는 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진 않지만, 어쨌든 내가 설명회 열게, 그러니까 합시다, 하면서 밀고 나간 거죠. 전장연(준)의 박경석 대표를 불러서 한바탕 부흥회를 했어요. 지난번에 파토를 낸 두 대표님들도 오셔서 감동을 받으시고는 “와! 이런 거 너무 필요해!” 하셨어요. (웃음) 서울에서 성공했으니까 대구에서도 해보자고 제안했고 농성을 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또 계속 미뤄지는 거예요. 대구지역에선 박경석 대표를 경계하고 전장연 운동을 마뜩치 않아 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우여곡절 끝에 몇 차례 회의를 해서 판을 벌이기로 결정했어요. 그런데 디데이 직전에 단체들이 못하겠다고 또 파토를 내는 거예요. 속이 터지죠. 그래도 꾹 참고 제가 다 준비할 테니까 일단 합시다, 겨우 설득해서 5월 18일에 시청 앞에서 판을 깔았어요.

2006년 대구 활동보조제도화 투쟁을 하며 행진하는 모습. 사진 김유미
2006년 대구 활동보조제도화 투쟁을 하며 행진하는 모습. 사진 김유미

- 장애인들의 민주화운동

지역 장애인단체에선 몇 명이 올지 전혀 가늠이 안 됐어요. 서울에 연락해서 이 투쟁에 적극 지원해달라고 요청하고 대구대 후배들한테도 연락했어요. 그렇게 판을 폈죠. 120명 정도 모였는데 서울에서 40명, 학교 후배들 50여 명, 그리고 나머지가 지역의 장애인단체 사람들이었어요. 집회를 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노숙농성을 시작했어요. 지역 장애인단체 사람들이 깜짝 놀랐어요. 이렇게 많은 장애인들이 집회라는 것을 그렇게 형식 갖춰서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처음으로 대중투쟁이 벌어진 거예요.

농성을 체계적으로 준비해서 시작한 게 아니었어요. 조직체계도 없었어요. 투쟁을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라 조직체계를 갖추어야 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이해를 못했어요. 침낭도 없어서 거적때기 같은 이불들을 모아서 덮었어요. 그런데 본격적으로 투쟁에 돌입하니까 단체 사람들도 뭔가 체계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걸 느낀 거예요. 당일 판 깔고 회의할 때 제가 집행위원장을 하겠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그래, 네가 해라, 이렇게 되었죠. 농성단의 이름은 중증장애인생존권연대라고 썼어요. 전장연을 싫어하는 단체들이 많았거든요. 서울의 남병준 활동가가 며칠 동안 함께 하면서 도움을 주셨어요. 학교의 후배들, 민제, 연희, 근배, 시형 등도 와서 싸웠는데,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더니 저 혼자는 힘들겠다고 느껴서 농성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게 되었어요.

초반에는 대구시에서 단체 지원금 얼마 줄 테니까 가라는 식으로 우리를 많이 무시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기세 넘치게 버텼거든요. 장애인들 수십 명이 집에 가지도 않고 먹고 자고 집회했어요. 밥을 해오는 단체도 있었고 농성장에서 직접 해먹기도 하고 노래방 기기 갖다 놓고 노래도 불렀어요. 대구시도 당황해했어요. 우리가 쉽게 안 물러가겠다 싶었는지 대화를 하려는 움직임이 보였어요. 그렇게 대구시와 대화가 성사될 것 같은 찰나였는데 느닷없이 한 단체가 요구안에 자기 단체에 지원금을 주는 내용을 넣어야 된다는 거예요. 대구시 분위기가 우리한테 우호적으로 바뀌니까 갑자기 자기 단체의 이권을 주장하는 거였어요. 너무 황당했죠. 대표자들의 회의를 열어서 민주적 절차를 통해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의견을 모았어요. 그랬더니 자기는 투쟁에서 빠지겠다고 하더라고요.

2006년 5월 53일, 활동보조제도화를 요구하며 대구 반월당에서 투쟁하는 모습. 노금호 소장이 발언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 김유미
2006년 5월 23일, 활동보조제도화를 요구하며 대구 반월당에서 투쟁하는 모습. 노금호 소장이 발언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 김유미

더 황당한 건 전장연(준) 중앙에서 남병준 활동가가 투쟁에 결합해서 계속 저희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었는데, 남병준이 자기한테 불리한 의견을 내니까 온갖 망언을 퍼붓는 거예요. 서울 사람은 서울 가라, 대구 투쟁은 대구 사람들끼리 하겠다, 그런 식의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면서 남병준의 얼굴에 음료수를 뿌리기도 했어요. 그런데 더 충격적인 건 몇몇 단체가 그 단체를 지지하면서 함께 나가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서울 사람은 서울 가라, 전장연은 서울 가라, 노금호는 각성하고 퇴진하라”는 내용이었어요. 어이가 없었죠. 농성 초반 1~2주 정도는 계속 그런 긴장의 연속이었어요.

그 단체들이 나가고 나선 오히려 결속이 높아졌어요. 제가 속해있던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아래 대구사람센터)와 장애인지역공동체, ‘함께하는 장애인부모회’가 주요하게 남았어요. 그런데 연대체가 분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대구시가 옳다구나 하면서 갑자기 강경책으로 돌아서더라고요. 시청 정문 앞에 있던 우리를 밀어내서 주차장으로 쫓아냈어요. 그런데 희한하게 경찰이 천막을 쳐주더라고요. (웃음) 노숙농성으로 시작했는데 자연스럽게 천막농성으로 바뀌게 되었어요. 대구시는 처음엔 고압적으로 나오다가 다음엔 좀 달래다가 나중엔 우리를 완전히 무시했어요. 화가 나서 우리는 더 과격하게 나갔죠.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는 5월 18일부터 6월 29일까지 43일간 대구청 앞에서 활동보조제도화를 요구하며 노숙농성을 진행했다. 6월 23일 열린 집회에서 발언하는 노금호 소장. 활동보조제도화를 요구하는 삭발 투쟁으로 머리카락이 짧다. 사진 제공 노금호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는 5월 18일부터 6월 29일까지 43일간 대구청 앞에서 활동보조제도화를 요구하며 노숙농성을 진행했다. 6월 23일 열린 집회에서 발언하는 노금호 소장. 활동보조제도화를 요구하는 삭발 투쟁으로 머리카락이 짧다. 사진 제공 노금호 

그때가 지방선거 시기였어요. 우리가 시장 후보들에게 농성장에서 간담회를 하자고 했어요. 김범일 당시 시장후보가 왔는데 우리 요구안에 성의 없이 대답한 데다 비하 발언까지 하면서 그냥 가려고 했어요. 장애인 활동가가 후보를 붙잡는 과정에서 후보 멱살을 잡았는데 후보가 그걸 뿌리치고 가버렸어요. 우리를 기만하는 그 태도에 더 분노했어요. 새누리당 선거사무소 앞에 찾아가서 노숙투쟁 하고 대구에서 가장 넓다는 범어역 16차선 도로를 막고 행진했어요. 그때 경찰하고 몸싸움하느라 휠체어에서 떨어져서 아스팔트에 얼굴 갈고 누구는 머리를 잡히고 난리였죠.

서울 실습에서 배웠던 걸 다 해본 것 같아요. 민주노총도 하지 않는 걸 장애인들이 다 했어요. 그렇게 투쟁해서 활동지원서비스 시범사업을 하기로 약속을 받아냈어요. 43일 만이었죠. 5.18에 시작해서 6.29에 농성이 끝났어요. 민주화의 과정을 거쳤다고 스스로 자평했어요. 지금 대구에서 활동하는 주요 활동가들이 그 투쟁을 통해 조직되고 단련되었어요. 그리고 그 투쟁을 통해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은 전장연의 지역조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어요.

2005년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설립됐다. 대구사람센터 발기인대회에서 발언하는 노금호 소장. 사진 제공 노금호 
2005년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설립됐다. 대구사람센터 발기인대회에서 발언하는 노금호 소장. 사진 제공 노금호 

- 불구 커뮤니티

저는 2005년에 대구사람센터를 설립했어요. 농성이 끝난 후 봉조 형, 연희와 함께 센터를 본격적으로 키우기 시작했어요. 자립생활센터는 권익옹호와 인권활동, 동료상담이나 자조활동을 하고요, 탈시설-자립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지원해요. 활동지원서비스도 중개하고요. 농성에 함께 했던 대학 후배 민제는 장애인지역공동체에서 활동을 시작했어요. 연희와 민제는 당시 대학 4학년이었는데 거의 학교생활을 정리하다시피하고 지역운동으로 진출한 것이었어요. 제가 사람센터 소장을 하고 연희가 사무국장을 하면서 실무를 맡아주었어요. 활동지원서비스 농성에 결합했던 장애인들과 동아리 레츠 사람들을 더 영입해서 2007년도엔 활동가가 5명이 됐어요. 연희만 비장애인이고 나머지는 다 장애인이었죠.

그리고 민제가 봉조 형과 제가 함께 살던 아파트로 들어왔어요. 당시엔 활동지원서비스가 수급자만 받을 수 있는 것이어서 저는 자격이 안 되었어요. 민제가 같이 살면서 저와 봉조 형의 활동지원, 생활지원을 했죠. 처음엔 그 집에 남자 네 명이서 살았어요. 장애인 둘, 비장애인 둘. 그러다 비장애인 한 사람 나가고 장애인 한 사람 들어와서 다시 넷이 됐고, 2008년에는 후배인 근배가 들어와서 살았어요. 저희 집이 활동가들의 기숙사처럼 됐어요. 서울에서 활동가들이 와서 우리가 사는 걸 보면 신기하다고 해요. 어떻게 그렇게 같이 살면서 운동을 할 수 있느냐고요. 다들 대구에 연고가 없어 집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제일 중요한 이유는 장애인 활동가의 활동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어요.

2006년 대구 활동보조제도화 투쟁을 하며 반월당 사거리를 점거한 사람들의 모습. 도로 위에는 대형현수막이 펼쳐져 있고, 휠체어에서 내려온 중증장애인들이 누워 있다. 사진 김유미

저희는 대학 기숙사 시절부터 이렇게 함께 사는 것에 훈련이 되어 있었어요. 실제로 대학 시절에 민제와 봉조는 룸메이트였어요. 저희가 학교 측에 요구해서 장애학생이 자신의 룸메이트를 지정할 수 있게 했거든요. 학교는 장애학생의 생활지원에 대해 실질적인 대책을 수립하지 않았어요. 장애학생의 룸메이트가 되는 비장애학생에게 봉사학점을 부여하는 것이 전부였어요. 정보도 제대로 제공하지 않아서 중증장애학생의 생활지원에 부담을 느낀 비장애학생들이 퇴소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그래서 저희가 차라리 장애학생 스스로 룸메이트를 구할 수 있도록 기숙사 장애학생 자치회에 룸메이트 배정권을 요구했던 거예요. 룸메이트가 되는 학생은 입소 요건을 다 갖추지 않아도 기숙사에 입소할 수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특수교육과나 사회복지과에 다니는 학생들이 룸메이트로 많이 들어오게 됐어요. 저와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도 많이 들어왔고요. 하지만 서로 합의를 하고 룸메이트가 되었다 해도 반년 정도 지나면 관계가 안 좋아지는 경우가 생겼어요. 장애학생들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룸메이트를 꼬셔야 했고 그러다 보니 술값이나 밥값으로 지출 비용이 많았어요. 장애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솔찬히 들어갔던 거죠.

기숙사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지 않아 1층엔 휠체어를 타거나 시각장애인 안내견과 함께 지내는 장애학생들이 우선적으로 배치되었어요. 한 동에 대략 장애학생이 30명 정도였는데 거의 다 친했어요. 그러면서 다양한 장애유형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어요. 청각장애, 시각장애 등 다양한 장애가 있는 학생들과 지내다 보니 모임을 하려면 문자 통역을 해야 한다는 게 상식이었어요. 시각장애학생들과 회의를 하려면 점자 프린트된 자료를 최대한 확보하거나, 미리 데이터를 넘겨서 그들이 읽을 수 있게 했어요. 휠체어를 타거나 혼자서 식사를 하기 어려운 지체장애학생들과 식당에 가려면 접근성을 확인해야 했어요.

이렇게 5년을 관계 맺고 살다 보니 힘들어서 투덜대기는 해도 그렇게 어울려 사는 게 문화적으로 익숙했죠. 저희가 타지역 대학생들보다 장애에 관해 지식이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일상에서 체득한 감각은 뛰어날 거예요. 관계나 몸의 경험치는 책으로 배우기 어려운 거잖아요. 사회에 나와서 활동하는 데에도 그 경험이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하여간 좁은 아파트에서 같이 살면서 장애인운동을 함께 꾸려나갈 수 있었던 건 그런 경험과 감각이 쌓인 덕분이었어요.

2006년 대구 활동보조제도화 투쟁 영상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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