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기록 - 전사들의 노래
운동은 내 삶을 구할 수 있을까 _ 노금호⑥

2014년 7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 대회에서 노금호 소장이 활짝 웃고 있다. 사진 강혜민

“전장연이 못한다면 개인적으로라도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이 인터뷰의 마지막을 이렇게 끝내도 괜찮은 것일까. 오래 고민했지만 결국 이 말로 끝맺기로 했다. 이 말이 가장 오래 내 마음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사실 금호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일 것이다.

전장연이 함께 싸워주면 좋겠어요.

하지만 이것을 이 글의 마지막 문장으로 쓸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인터뷰 내내 그가 계속 망설였으니까. 차마 힘주어 말하지 못했으니까. 혹여 돌아올 반응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게 싸운다고 될까? 그건 네 문제잖아. 지금은 좀 바쁘니까 나중에. 그런 말을 듣게 된다면 금호는 완전히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절박한 사람은 의연할 수 없으니까.

첫 번째 인터뷰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나는 마구 뭔가를 쓰고 싶었다. 금호의 어린 시절부터 대학 시절까지 들은 날이었다. 아주 신나는 이야기였다. 낭만적인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총련 대의원대회에서 장애인을 배제하는 환경에 문제를 제기하며 금호가 피켓을 드는 순간은 소름이 돋을 만큼 좋았는데, 그것이 내 대학 시절의 풍경을 일순간 다르게 바라보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괄호 밖의 존재’가 침묵을 깨고 아우성을 칠 때 비로소 ‘괄호 안의 존재’들도 자신이 속한 세계를 온전히 볼 수 있다. 그 시절 학생운동의 대표적인 조직이었던 한총련이 실은 비장애인들의 조직이었다는 엄청난 사실을 깨닫자, ‘민족’이나 ‘통일’을 외치면서도 눈앞의 장벽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구호는 작게 쪼그라들고 작은 피켓을 든 금호가 훨씬 거대해 보이는 것이다. 나는 이 연재에서 금호가 담당하게 될 역할이 투쟁의 낭만과 열정이 될 것임을 확신했다.

지난 2월, 대구 자택에서 노금호 소장이 홍은전 작가와 어린 시절 앨범을 보며 이야기 나누고 있다. 사진 강혜민

두 번째 인터뷰를 잡으려 할 즈음 금호의 활동지원사가 퇴사하겠다는 문자 한 통을 남기고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혼자서 생리활동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이것은 살인행위와 같다”며 분노와 비참을 표현했다. 매년 활동지원사의 권리를 증진하고 소득을 향상시키기 위해 함께 투쟁했고 그리하여 비장애 노동자들의 근무환경은 점차 개선되어 왔건만, 왜 장애당사자의 존엄은 이토록 함부로 짓밟히는지, 그가 피를 토하듯 써 내려간 글이었다. 새로운 활동지원사를 구하느라 인터뷰는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이루어졌다. 그즈음 금호는 통증으로 매일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있었고 수백만 원을 들여서 받은 병원 검사 결과를 불안하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건 운동이 아니라 행운이 아닐지,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건 공동체가 아니라 돈이 아닐지 생각하는 나날 속에서, 자신이 이 인터뷰를 계속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며 금호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세 번째 인터뷰를 하던 날 그에게 검사 결과가 통보되었다. 척수성 근위축증. 치료약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30억이랬다. 건강보험 적용 대상이 되면 첫해에 5천만 원 연간 1천만 원씩. 그런데 심사를 통과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아서 나는 눈만 꿈뻑거렸다. 주변의 장애 동료들에게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고통이었다. 그날 금호는 미리 준비해온 자료들을 넘기며 지난 15년간 투쟁한 역사와 변화된 사회의 모습, 새롭게 만든 제도와 그로 인해 구제된 어떤 삶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선 30억이란 숫자가 떠나지 않는 것 같았다. 모든 이야기의 끝에 그가 후렴처럼 말했다.

- 그럼 뭐해요, 지금 내가 이런데. 남의 인생은 어떻게든 개선해왔는데 내 인생은 왜 구제가 안 될까요.

그는 숨을 쉬는 게 좀 버겁다면서 이야기하는 도중 여러 차례 휴식을 가졌다. 어쩌면 인터뷰가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요, 하면서 그를 설득했던 내 생각이 얼마나 낭만적인 것이었나, 낯이 뜨거웠다. 어쩌면 나는 그가 어떻게 끊임없이 힘을 내서 이 난국을 헤쳐나가는지를 듣고 내가 힘을 얻으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투쟁의 낭만을 기대했으나 그는 삶의 지긋지긋함에 대해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도 체력도 깊이 가라앉고 있었고, 여전히 이 인터뷰에 자신이 적합한지 모르겠다며 걱정하고 회의했다. 나는 금호가 나를 위해 미리 주문해둔 비건 빵을 오물거리면서 금호의 마음이 괴롭다면 기사로 싣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게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처럼 느껴졌다. 4월의 일이었다.

2006년 5월 23일, 대구에서 활동보조제도화 요구 투쟁을 하는 모습. 노금호 소장이 현수막 뒤쪽에서 행진하며 선동하고 있다. 사진 김유미

며칠 후 그의 페이스북엔 이런 글이 올라왔다.

존경하는 이들처럼 살지 못해도 꼼수 부리며 사회에 해악을 끼치며 살지 않았다. 힘없고 약한 이들이 차별받지 않고 그 권리가 보장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나름 열심히 살았다. 그 노력의 결과인지 존재조차 부정당한 사람들이 조금씩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 받으며 살고 있다. 부족하지만 조금씩 권리가 보장되는 현장을 보게 된다. 하지만 너무 더디다… 세상살이가 너무 벅차다… 행운만 바라면서 살지는 않았는데 모든 것이 소진된 병들고 나약한 몸으로는 절망의 늪에서 기어 나오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 행운만 바라게 되는 현실이 절망스럽다.

6월에 나는 인터뷰 원고를 정리해 그에게 검토해달라고 요청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온라인 공간에 자신의 생애를 전시한다는 건 생각보다 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금호는 지금 자신의 생애 중 가장 어둡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통로를 통과하는 중이었다. 그런 그에게 근심 하나를 더 얹어주는 게 미안했다. 마음에 조금의 거리낌이라도 있다면 기사로 싣지 않아도 좋다는 말을 전하면서도 한편으론 금호가 힘을 내주기를 바랐다. 두어 달이 지나 8월에 답이 왔다.

그 사이 그는 건강보험공단에 치료비 지원을 요청했고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행운은 끝내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치료를 받으려면 이젠 투쟁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치료를 포기하거나. 이 문제를 공론화시킨다면 얻는 게 많을지 잃는 게 많을지 생각하다 보면 마음이 너무 괴롭다고 금호가 말했다. 부모님이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도 걱정이고 혹여 일을 벌이다 좌초될 경우 가까운 사람들에게 받게 될 상처도 두렵다고 했다. 그래서 인터뷰를 공개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얼마 없는 생존의 에너지를 쥐어짜며 살고 있기 때문에 최대한 힘쓰는 일을 덜고 싶다면서 금호가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진심이었다. 그를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 다른 사람의 삶은 어떻게든 개선해왔는데 왜 내 삶은 구제가 안 될까요?

그가 힘없이 말했다.

- 금호에게도 금호가 필요하네요.

나는 내가 금호가 아니어서 면목이 없는 기분으로 대답했다. 지금 금호의 곁에 스물다섯의 금호가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그는 분명 이렇게 말할 것이다.

- 까짓거, 농성하자! 이불 모아!

아니면 스무 살의 금호는 어떤가. 기숙사 복도를 지나다가 누군가의 어려움을 알아차리고선 무슨 일이냐고 물었던 금호. 이야기를 듣고 난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했지.

- 깨질 때 깨지더라도 아우성이라도 쳐보자!

그러고는 마이크도 없이 광장에 나가 학교는 대체 뭘 하느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겠지. 그런데 나는 고작 이런 말밖에 못했다. 금호, 힘을 내요, 라고.

11월 23일, 장애계는 청암재단 산하 시설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문제에 대해 대구시와 동구청에 문제해결을 촉구하며 전국 결의대회를 열었다. 노금호 소장이 동구청 정문에 “대구시와 동구청은 탈시설을 보장하라” “대구시와 동구청은 엄중히 처분하라” 등의 문구가 쓰여 있는 피켓을 붙이고 있다. 사진 하민지

그날 밤 나는 잠을 자지 못하고 계속 뒤척였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 이야기를 완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금호에겐 지금 금호가 필요하니까. 나는 금호는 될 수 없지만 스물다섯의 금호를 다시 불러내는 일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내 손으로 그 금호를 묻어버리는 일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금호의 이야기를 들었고, 듣는다는 건 조금 무시무시한 일이다. 무언가 내가 져야 할 책임이 생긴 것이다. 나는 금호가 힘을 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기다리는 게 내 일인 것처럼. 그런데 그날 밤 나는 이젠 내가 힘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근육장애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건 처음이에요. 이 운동 안에서 금호가 느꼈을 외로움, 절망, 고립감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어서 너무나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어요. 이야기는 그 자체의 생명과 운명을 갖는데요, 살아서 계속 바깥으로 나오길 바라는 어떤 존재를 내 손으로 묻어버리는 건 아주 괴로운 일이에요. 무엇보다 이 인터뷰가 소중한 이유는 노금호라는 사람이 만들어온 운동의 역사에 대한 경애의 마음 때문이에요. 금호가 견뎌준다면, 금호에게 최대한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이 인터뷰를 마무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게요. 내가 더 잘해 볼게요. 기사화하는 걸 허락해주세요. 부담을 주어서 미안해요.

한나절이 지나 금호가 답을 보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치료제와 관련해서 뭐라도 부르짖고 싶다가도 그렇게 하다가 좌초되어 가까운 이들에게 실망할까 봐 두렵기도 해요. 암튼 하찮은 개인사에 의미를 부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도 그는 또 내 성의를 거절하지 못한 것 같다.

2013년 3월, 노금호 대구장애인차별폐연대(준) 집행위원장이 제11회 정태수상을 수상했다. 수상 소감을 말하며 눈물이 고인 모습. 사진 비마이너DB
2013년 3월, 노금호 대구장애인차별폐연대(준) 집행위원장이 제11회 정태수상을 수상했다. 수상 소감을 말하며 눈물이 고인 모습. 사진 비마이너DB

그리하여 이 글은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금호가 자신의 이야기를, 빛나는 추억과 눈부신 성과뿐 아니라 현재의 어두운 현실과 두려움, 외로움을 세상에 이야기하기까지 얼마나 고심했는지 사람들이 알아주면 좋겠다. 광장에서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가장 취약하고 절박한 부분을 드러낸다는 것이고 그건 아주 위험한 일이다. 동지들에 대한 믿음 없인 불가능한 일이고, 자신처럼 고통받는 존재가 많다는 걸 안다는 뜻이고, 그가 엄청나게 힘을 내고 있다는 뜻이다.

금호는 치료제 건강보험 적용 문제를 공론화하기로 했다. 그리고 최근엔 대구 청암재단의 인권침해 사건에 맞서 탈시설 투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의 목소리엔 전투에 나서는 사람의 에너지가 차 있었다. 치료제 문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요? 하고 묻자, 지금 청암재단 문제로 싸우느라 그걸 챙길 상황이 안 되네요, 저는 제 문제에 골몰할 팔자가 아닌가 봐요, 껄껄껄껄, 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원고에서 부모님이 걱정하실 내용이 있는지, 거론되어야 할 이름 중 빠진 이름은 없는지 확인했다.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하는 장애인 상근활동가들과 서로 힘내보자고 모인 자리. 대구 수성못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진 제공 노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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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장애인운동은 무엇이냐고 내가 물었을 때 금호가 말했다.

- 장애인운동은 나 혼자 장애를 극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을 주었어요.

아… 나는 작게 탄식했다. 장애인운동의 교과서가 있다면 제1장에 나올 것 같은 그 말이 그렇게 시리게 들릴 줄 나도 전혀 몰랐다. 그가 덤덤하게 말했던 십대 시절의 금호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장애를 치료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부모와 떨어져 살기를 택한 일곱 살의 금호는,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가 자신에게도 찾아와주길 바라며 기도하던 초등학생 금호는, 아무리 운동을 해도 점점 걷는 게 힘들어지던 중학생 금호는, 매일 아버지 등에 업혀 4층까지 오르내리고 종일 화장실 가는 걸 참아야 했던 고등학생 금호는, 죽으려고 수면제를 잔뜩 먹고 잠에 든 열일곱의 금호는, 교회에서도 학교에서도 언제나 자신이 괄호 밖에 존재한다고 느꼈던 소년 금호는, 혼자 싸우느라 너무 힘들었구나, 너무 외로웠구나…

코가 시큰거렸다.

그런 금호에게 이제 너 혼자 극복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줬다는 그 장애인운동이란 것이 너무나 고마워서, 나는 원래도 장애인운동을 몹시 좋아했지만, 오늘부터 더 좋아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2012년 10월 30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고 김주영 활동가 노제에서 노금호 소장이 슬픔에 고개를 숙인 채 투쟁을 외치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스무 살에 장애인운동을 만난 그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그만두고 세상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절대자 예수를 동경하던 소년은 저항자 예수를 품은 청년이 되었고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던 에너지를 약자들의 연대를 조직하는 힘으로 썼다. 그리하여 그는 동료들과 함께 대학 내 장애인들의 교육 환경을 바꾸었고 지역사회에서 중증장애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수많은 제도들을 만들었다. 한 사람이 열정과 분노의 방향을 바꿀 때 만들어내는 어마어마한 변화를, 각자 혼자 극복하는 게 아니라 함께 의존하며 살아가는 삶이 목표가 될 때 일어나는 경이로운 일들을 노금호의 생애가 보여준다.

그러나 지금 금호는 다시 혼자라도 극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15년 동안 쉼 없이 달려온 그는 투쟁이 끝난 자리의 허무함과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몸의 고통에 관해 이야기했다. 손닿을 수 없는 저 높은 곳에서 목숨을 구걸하게 만드는 비싼 치료제와 턱없이 부족한 활동지원서비스, 문자 한 통 남기고 퇴사해버린 활동지원사와,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보조공학 기기들… 사회가 변화하는 속도는 그의 질병이 진행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그의 생존과 존엄이 돈과 행운에 매달려있다. 그가 물었다.

장애인운동은 내 삶을 구할 수 있을까요?

이야기의 완성은 듣는 사람의 몫이다. 동료들이 이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 주었으면 좋겠다. ‘한 사람의 선택과 결단이 얼마나 많은 걸 바꿀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이 바로 노금호’라고 했지만, 노금호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자신의 어려움을 혼자 극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 여럿이 함께하는 일의 힘이다. 20년 전 기숙사 작은 방에 혼자 내버려져 있던 사람 곁에 다가간 금호는 한 사람이었지만, 그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고 그들이 동아리가 되고 그들이 농성이 되어 그 힘이 우리 사회 전체를 변화시켰다. 백전백패의 싸움을 하기에 절대 지지 않는 전장연이, 비가 오는 그날까지 멈추지 않기에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기우제를 지내는 전장연이, 함께 싸워주길 바란다. 금호를 지키는 것은 우리 모두를 지키는 일이니까.

2018년 8월, 대구 장애인 생존권 예산 확보를 위해 대구시청 앞에서 노숙농성을 진행했다. 농성 50일 차 되는 날 농성장을 지키는 동지들과 함께. 사진 비마이너DB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자문] 노금호(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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