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옥란 열사 20주기,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반빈곤 투쟁 선포
최저임금 네 배 오르는 동안 수급비는 고작 두 배 올라

“최저생계비가 워낙 낮게 책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장애로 인하여 추가로 지출되는 비용이 전혀 반영되지 않고… 의료비도 비급여가 많아 저 같은 중증장애인도 모두 개인이 부담해야 합니다. 도대체 약값도 안 되는 생계비로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그래서 복지부 장관과 국무총리에게 민원을 제기했지만 아무런 답변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답답합니다. 주위 사람들의 도움과 빚에 의지해야 하는 내가 너무 한심스럽습니다. 최저생계를 보장한다는 기초법이 너무나 원망스럽습니다. 한때는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수급권을 반납하고 노점을 다시 시작하려고도 했는데, 한 번 반납한 노점자리를 다시 얻기란 불가능했습니다.

(중략) 비록 지금은 저 혼자 텐트농성을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보다 많은 사람이 저와 함께하리라는 믿음으로 시작합니다. 저와 같은 사람들이 분명 많을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_ 2001년 12월 명동성당 농성을 결의하며, 최옥란 씀

20년 전에 쓰인 ‘농성 결의문’은 시간이 흘러도 빛이 바래지 않았다. 빛이 바래기는커녕 ‘자신과 같은 많은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는 그의 바람대로 많은 사람이 열사가 섰던 그 자리를 채웠다. 최옥란 열사 20주기를 맞아 2022년의 ‘최옥란들’이, 도시빈민과 노점상, 철거민들이 명동성당 들머리에 섰다.

21일 오전 11시 빈곤사회연대, 최옥란열사추모사업회 등은 명동성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최저생계비 현실화와 민중 생존권 쟁취를 위한 투쟁을 선포했다. 이들의 손에는 최옥란 열사의 문제제기에 뿌리를 둔 오늘날의 요구안들이 단단히 쥐어져 있었다.

21일 오전 11시 빈곤사회연대, 최옥란열사추모사업회 등은 과거 최옥란 열사가 농성했던 자리인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최저생계비 현실화와 민중 생존권 쟁취를 위한 투쟁을 선포했다. 사진 강혜민
21일 오전 11시 빈곤사회연대, 최옥란열사추모사업회 등은 과거 최옥란 열사가 농성했던 자리인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최저생계비 현실화와 민중 생존권 쟁취를 위한 투쟁을 선포했다. 사진 강혜민

- 최저임금 네 배 오르는 동안 수급비는 두 배 올랐다

2001년 12월 3일, 최옥란 열사는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일주일간의 농성에 돌입한다. 장애여성이자 노점상이었던 그는 2000년 김대중 정부가 시행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수급자였다. 그러나 당시 1인 가구 생계급여는 28만 6천 원. 장애수당 4만 5천 원을 합해도 한 달 수입은 33만 1천 원에 불과했다. 허리띠를 졸라매도 매달 수십만 원의 적자가 나는 상황이었다. 이를 타개 하기 위해 노점을 하고 싶었지만 수입이 발생하면 수급권이 박탈당했다. 결국 그는 생계급여 현실화를 요구하며 추운 겨울, 텐트 한 장만을 들고 명동성당 앞에서 농성을 시작한다.

수급비로는 살 수 없고 노점을 하면 수급권이 박탈되는 현실. 그러나 정부는 어떠한 응답도 없었다. 결국 농성의 끝은 삶에 대한 희망이 아닌 죽음으로 이어졌다. 이듬해 2월, 그는 음독자살을 시도한다. 예고된 일이었다. 그는 죽기 1년 전에 이미 유서를 써놓은 상태였다. 유서를 품고 사계절을 보내며 그해 12월 명동성당 농성에 돌입했고, 이듬해 2월 마침 실행에 옮겼을 뿐이다. 한 달여의 고통스러운 투병 끝에 3월 26일 그는 숨을 거둔다.

열사의 죽음 후, 시민사회단체에서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중심으로 민중 생존권 쟁취를 위한 싸움이 이어진다. 그러나 20년이 흐른 지금도 기초생활수급자의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요지 홈리스야학 학생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요지 홈리스야학 학생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저는 요즘 가계부를 적습니다. 이번 달에 7만 6천 원이 남았습니다. 아끼고 아껴서 만든 돈입니다. 주로 우유 한 잔과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웁니다. 좋아하는 피자나 치킨도 배달시켜 먹어본 적 없고, 속옷과 양말도 하나 못 샀습니다. 외식 한번 한 적 없고 취미인 당구도 치지 않았으며, 평소 좋아하는 다이소와 동묘시장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진짜 배고픈 날엔 중국집에서 짜장면 한 그릇 시켜 먹고 싶은데, 고민하다가 결국 컵라면을 먹었습니다. 배만 채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가계부를 쓰면서 제가 먹는 것에 헤프게 쓴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모야모야병으로 1년에 한 번 뇌혈관 확장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1회 수술비용은 50만 원. 수급자여도 비급여항목이면 돈을 내야 합니다. 올해 12월이 수술이라 한 달에 5만 원씩 모아야 합니다. 아픈 사람일수록 더 잘 챙겨 먹어야 하는데 현재 생계비로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최저생계비는 중위소득의 30% 기준으로 책정된다고 하던데, 왜 하필 30%일까요. 수급자는 30%만 줘도 살아갈 수 있다고, 누구 머릿속에서 나온 건지 복지부 장관에게 묻고 싶습니다.” (요지 홈리스야학 학생회장)

정성철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지가 비현실적으로 낮게 책정된다고 지적한다. 정 사무국장은 “당시 100조였던 정부 총예산은 올해 600조로 여섯배 올랐고, 2001년 2100원이었던 최저임금은 올해 9160원으로 네 배 이상 올랐다. 그러나 생계급여(2022년 기준 58만 3444원)는 2001년보다 고작 두 배 정도 올랐다”면서 “기초생활수급자는 그때도 인구 대비 3%였고, 현재도 3%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분노했다.

정 사무국장은 “당시 열사가 외친 최저생계비는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고 부양의무자 기준도 완전 폐지되지 못한 채 문재인 정부 임기가 종료될 예정이다”라면서 “정부는 예산에 맞춰 수급비를 낮게 책정해놓고 ‘이것이 적정하다’는 폭력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양영희 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부회장은 “명동성당 농성할 때 최옥란 열사를 처음 만났다. 그는 끊임없이 장애인도 인간답게 살기 위해 빈곤한 현실을 철폐해야 한다며,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정부는 어떠한 응답도 하지 않았고, 장애여성이자 한 아이의 엄마였던 그는 이 세상을 떠났다”고 이야기했다.

양 부회장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최저생계비 현실화와 부양의무자 기준 완전 폐지를 이야기한다. 열사 정신을 이어받아 끝까지 빈곤 철폐를 위해 투쟁하자”고 외쳤다.

양영희 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부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양영희 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부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 노점상, 홈리스, 철거민 등 가난을 이유로 쫓겨나는 사람들도 함께

이날 기자회견에는 홈리스, 철거민, 노점상 등 가난을 이유로 도시에서 쫓겨나는 이들도 함께했다.

황성철 홈리스행동 활동가는 최근 홈리스 등 집 없는 이들이 계속해서 내쫓기는 상황에 대해 전했다. 홈리스는 코로나 확진 및 밀접 접촉 시 이송과 치료 대책이 없어 방치되었으며, 홈리스가 유일하게 갈 수 있었던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 병원’은 코로나 이후 ‘감염병 전담 병원’으로 전환되어 병원 진료조차 받을 수 없었다. 지난 2월에는 서울교통공사가 서울역 화장실을 폐쇄한 채 ‘외부에서 소변보는 노숙인을 발견하면 즉시 신고해달라’는 전단을 붙여 논란이 일기도 했다. 동자동 쪽방 재개발 현장에선 공공개발에 반대하는 건물주에 의해 그나마 몸 뉠 한 평 공간조차 빼앗길까 봐 여전히 주민들이 마음 졸이고 있다.

이에 대해 황성철 활동가는 “현재 홈리스의 생존권은 차별과 통제로 얼룩져 있다”라면서 “당연한 권리를 차별과 통제로 짓밟지 말기를 정부와 지자체에 요구한다”고 말했다.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 김소연 전국철거민연합 조직국장이 투쟁을 외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 김소연 전국철거민연합 조직국장이 투쟁을 외치고 있다. 사진 강혜민

김소연 전국철거민연합 조직국장은 “대장동 개발 이익금 1조 8천억 원에 대해선 이야기하지만 그 이익금 속에 쫓겨나는 철거민의 눈물에 관해선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일침을 가하면서 “현재 오세훈 서울시장은 과거 2009년 용산참사가 일어나 철거민이 죽었던 그 자리에 국제업무지구 사업을 진행하겠다고 한다. 이에 대해 시민사회단체는 ‘공공부지니 임대주택을 지어야 한다’고 하지만, 용산구청장이라는 자는 ‘어디 용산 땅에 임대주택을 짓느냐’는 헛소리만 하고 있다”고 분노했다.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은 민주화가 도래하던 시대에도 도시에 가난한 사람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고 지적하며 오늘날 열사 추모의 의미를 전했다.

최인기 수석부위원장은 “최옥란 열사가 농성했던 그 시기는 바로 김대중 정권 시절이었다.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받아서 많은 이들이 열광하며 민주화가 본격 도래했던 시절”이라면서 “기초법 만들어서 복지 패러다임을 바꾼 것은 물론 발전적이었으나, 그것이 가난한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로 인해 최옥란 열사가 이곳에서 농성하고 운명을 달리했다”고 말했다. 이어 “최옥란 열사의 죽음으로 우리는 현재까지 반빈곤운동을 하고 있다”면서 “인간만이 과거를 기억하고 추모한다. 추모는 우리사회가 좀더 일보전진하기 위한 계기를 만드는 자구책이자 노력”이라고 밝혔다.

한편, 최옥란 열사 20주기를 맞아 최옥란열사추모사업회는 △정태수‧최옥란 열사 20주기 토론회(22일) △최옥란 열사 20주기 3‧26 전국장애인대회(24일) △최옥란 열사 추모제 및 묘소 참배(26일) 등을 이어갈 예정이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서 있다. 가장 앞에 있는 피켓에는 “빈곤 문제의 사회적 해결! 부양의무자 기준 완전 폐지하라”고 쓰여 있으며 뒤에는 “선대책 후철거, 강제퇴거 중단하고 순환식 개발 시행하라” “이윤이 아니라 권리, 부동산 아니라 주거권. 임대주택 확대 주거권을 보장하라”고 쓰여있다. 사진 강혜민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서 있다. 가장 앞에 있는 피켓에는 “빈곤 문제의 사회적 해결! 부양의무자 기준 완전 폐지하라”고 쓰여 있으며 뒤에는 “선대책 후철거, 강제퇴거 중단하고 순환식 개발 시행하라” “이윤이 아니라 권리, 부동산 아니라 주거권. 임대주택 확대 주거권을 보장하라”고 쓰여있다. 사진 강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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