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차 삭발결의자 박현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조직실장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들이 3월 30일부터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까지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에 대한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 답변을 촉구하며 매일 아침 8시, 삭발 투쟁을 합니다. 장소는 인수위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인 3호선 경복궁역 7-1 승강장(안국역 방향)입니다. 비마이너는 삭발 투쟁을 하는 장애인 활동가들의 투쟁결의문을 싣습니다.

박현 조직실장이 다른 활동가들과 함께 ‘투쟁’을 외치고 있다. 사진 이슬하
박현 조직실장이 다른 활동가들과 함께 ‘투쟁’을 외치고 있다. 사진 이슬하

안녕하세요. 저는 선천적 골형성부전증, 흔히 사람들은 뼈가 잘 부러지는 골증장애인이라 알고 있고 장애등급제 폐지 전 1급이었던 중증장애인입니다.

고향은 부산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한번 서서 걸어보지도 못 했으며 집안 형편으로 재활치료라는 것도 제대로 받지 못 했습니다. 가족은 저를 위해 뼈가 잘 부러지지 않도록 그저 집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보호만 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심지어 미용실에 가서 이발하는 것도 어려워 아버지는 제 머리를 빡빡 깎으셨습니다. 언젠가는 마음대로 머리를 길러보고 싶었던 게 한때 소원이었습니다. 학령기 때는 학교를 한번도 다녀본 적 없었습니다. 친구들에게조차 학교 다니지 않는 몸 약한 친구로 따돌림당했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재가장애인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제 정신적 지주셨던 아버님이 저 18살에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저를 부양할 가족이 마땅치 않아 장애인 그룹홈에 들어가게 된 게 제 첫 자립생활이었습니다. 그때쯤 늘 바랐던 공부를 하고 싶어 부산 장애인야학에 입학했습니다. 입학식에 참여하기 위해 교사들의 등에 업혀 처음으로 지하철에 타 봤습니다. 그때 ‘지하철이라는 게 이렇게 신기한 거구나’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20살이 갓 넘어 그룸홈에서 퇴소하고 본격적으로 자립생활과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직장은 제가 자립한 곳(부산대 앞)에서 지하철로 25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었습니다. 아침 9시까지 출근하기 위해 8시 조금 안 돼 집에서 나와 지하철역까지 열심히 굴러갔습니다. 비장애인은 걸어서 10분이면 갈 거리인데 전 혼자 수동휠체어를 밀어서 30분 정도 소요됐지요. 그런데 이것까지는 괜찮았습니다. 견딜 만했습니다.

고 박종필 감독 영화 〈버스를 타자〉(2002)에 나온 박현 조직실장. 리프트가 고장나 계단을 내려갈 수 없는 상황에서, 지나가는 시민에게 휠체어를 들어서 계단 아래로 이동하는 걸 도와달라 부탁하고 있다. 사진 〈버스를 타자〉 캡처
삭발하는 박현 조직실장. 그의 옆에 ‘박현’ 이름이 크게 적힌 상자가 있다. 사진 이슬하
삭발하는 박현 조직실장. 그의 옆에 ‘박현’ 이름이 크게 적힌 상자가 있다. 사진 이슬하

그런데 난관은 지하철역부터 시작됐습니다. 집 앞 지하철은 지하가 아닌 지상 계단 30여 개의 지상 2층에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올라갈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처음에는 뭣 모르고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럴 때마다 대부분의 비장애인은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듣는 척도 하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사람들의 외면과 눈빛의 의미를 알게 되면서 부탁하는 것도 점점 망설이게 됐습니다. 심지어 아무 말도 못 하고 30분을 그냥 있어본 적도 있었습니다. 그 시간이 제 하루 중 가장 힘들고 긴 시간으로 기억됩니다. 그러다 몇 십 분 만에 다행히도 ‘좋은 사람’을 만나 지하철 타고 출근하게 돼도 지각은 늘 다반사였습니다.

그러나 사장님은 제게 크게 야단을 치진 않았지요. 사장님이 성품이 좋아 그러신 게 아니라 제가 월급을 받는 직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문서편집을 하는 편집노동자였습니다. 건당 몇 퍼센트를 수고료로 받은 게 제 임금이었습니다. 노동조건은 점심만 무상으로 먹을 수 있다는 것 외에는 퇴직금, 월급 이런 것은 생각조차 못 했습니다. 노동자로서 가져야 할 권리는 꿈도 못 꿨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벌어서 월세를 내고 하루 끼니를 해결하며 자립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때 제 학력은 무졸이었고(초중고·대학에 다닌 적이 없었고 – 편집자 주), 그렇게라도 일하게 해 준 사장님에게 고마워해야 했고, 그렇게 절 도와주는 ‘착한 시민’에게 감사함을 가져야 제 자립생활은 이어질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박현 조직실장의 머리가 잘려 나가고 있다. 사진 이슬하
박현 조직실장의 머리가 잘려 나가고 있다. 사진 이슬하

그러나 그런 삶은 내가 장애가 있어서 감당해야 할 것이 아니라, 고마워해야 할 것이 아니라, 분노해야 하고 바꿔야 하는 것이란 걸 알았습니다. 몇 년 후 서울에 올라와 노들장애인야학에 다니면서 장애인 동료상담, 자립생활을 접하고 야학 동지들을 따라 다녔던 집회 현장에서 알게 됐습니다.

그렇게 속고만 살았던 내가 너무나 바보 같았습니다. 열심히 살면 장애인도 비장애인처럼 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최선을 다한다면 똑같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고, 그 거짓말을 삶의 신조처럼 믿고 있었던 내 어리석음이 비참했습니다.

그걸 깨닫게 된 순간 그렇게 아끼고 소중하게 여긴 긴 머리를 짧게 깎고 본격적으로 장애인운동을 하게 됐습니다. 그게 제 첫 삭발이었습니다. 그 후 장애인 교육권 투쟁, 활동보조제도화 투쟁의 과정 속에서 제 삶을 깎는 마음으로 두 번의 삭발을 더 하게 됐지요.

박현 조직실장이 머리를 민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이전 두 번의 삭발 투쟁 때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그는 이날 처음으로 울었다. 사진 이슬하
박현 조직실장이 머리를 민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이전 두 번의 삭발 투쟁 때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그는 이날 처음으로 울었다. 사진 이슬하

오늘(4일) 이렇게 인수위 근처 경복궁역에서 삭발을 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제 자신을 다시 다잡기 위함입니다. 이준석과 국민의힘이 말도 안 되게 우리를 불법으로 매도한 모습에 분노하면서,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한 자립생활의 삶을 지키기 위해 더 이상 지켜보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먼저 삭발한 동지들과 함께하기로 한 것입니다.

머리를 깎는다는 행위가 아무렇지 않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 머리조차 내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 했던 중증장애인들이 지금까지 길렀던 머리를 깎는 것은 내 신체 일부를 자르는 것과 같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눈물이 나고 그래서 화도 납니다.

박현 조직실장이 삭발을 마치고 눈물을 닦고 있다. 사진 이슬하
박현 조직실장이 삭발을 마치고 눈물을 닦고 있다. 사진 이슬하

장애인으로 태어나 다른 사람에 의해 제 삶이 더 이상 토막 나는 걸 원치 않습니다. 제 삶을 제가 온전히 선택하며 살고 싶습니다. 마음껏 이동하고 마음껏 공부하고 마음껏 일하며 그렇게 제 아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오늘 이렇게 머리를 짧게 잘라 아들이 보고 놀라진 않을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 짧은 머리를 보이며 아들에게 당당히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아빠는 지금부터 아빠의 자립생활을 위해, 모든 장애인 삼촌과 이모들의 자립생활을 위해 다시 싸울 거다”라고 말입니다.

경복궁역. 삭발 투쟁에 참여한 활동가들이 굴건을 쓰고 있다. 
경복궁역. 삭발 투쟁에 참여한 활동가들이 굴건을 쓰고 있다. 지난 7일, 9호선 양천향교역에서 에스컬레이터에 탔다가 추락해 사망한 휠체어 이용 장애인을 추모하는 의미로 썼다. 사진 이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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