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권리예산 중앙정부 책임 강화를 위한 국회 토론회 ② 탈시설
시설수용 정책, 국가주도 탈시설 정책으로 바로잡아야
내년도 탈시설 정책 예산으로 807억 원 필요해
“지금도 여전히 시설에 있는 발달장애인 친구들이 많이 있어요. 그 친구들을 만나면 자립하고 싶다고 말해요. 그런데 선생님이 허락을 안 해준대요. 그런 말을 들으면 속상합니다. 저도 시설을 나오면서 그룹홈 선생님에게 다른 애들 바람 넣지 말고 조용히 나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왜 우리들은 어디서 살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나요? 왜 사회는 우리 발달장애인들의 목소리를 존중하지 않는 겁니까? 탈시설지원법을 제정하기 위한 공청회에도 당사자의 목소리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는 존재입니다.
저는 탈시설할 때 누구의 도움이나 지원을 받지 못하고 나 홀로 모든 것을 준비해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저와 같은 고생을 하지 않고도 시설에 있는 장애인들이 탈시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꾸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 고민하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박경인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공동준비위원장)
지난해 8월 정부가 ‘탈시설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지원 로드맵(아래 탈시설로드맵)’을 발표했다. 그러나 올해 탈시설 관련 예산은 총 24억 원. 중앙탈시설지원센터 운영 예산 3억 원을 제외하면 ‘탈시설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지원 시범사업(아래 시범사업)’ 예산 21억 원이 전부다. 정부가 탈시설로드맵을 발표했지만, 매우 소극적으로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 올해 장애인거주시설 운영비는 국비와 지방비를 합해 9300억 원에 달한다. 각종 기부금까지 더하면 1조 원을 상회한다.
더욱이 탈시설-자립생활 지원 근거를 마련한 ‘장애인 탈시설 지원에 관한 법률’도 탈시설 찬반논쟁에 부딪혀 국회에 계류 중이다. 이 법안에는 탈시설 정책을 효과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지원체계와 재원조달 방법 등이 제시돼 있다. 그러나 이종성 국민의힘 의원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고, 다른 의원들도 탈시설에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다.
정부와 국회의 오리무중 행보 탓에, 일각에서는 ‘준비없는 탈시설’이라며 탈시설 정책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결국 탈시설 반대 목소리는 탈시설 이후 장애인이 살아갈 수 있는 자립생활 정책의 미비에서 오는 우려다. 바로 지금 정부가 탈시설 예산을 편성해, 정책 의지를 보여줘야 할 시점이다.
11일 오전 10시 국회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국가 주도의 탈시설 지원 강화를 위한 정책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자들은 국가주도로 이뤄진 시설수용 정책은 국가주도의 탈시설 정책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 국가주도의 탈시설 정책 이행에 국비 지원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입을 모았다.
- 탈시설로드맵, 시설화 요인 제거에 목적 둬야
김기룡 중부대학교 중등특수교육과 교수는 정부의 탈시설로드맵이 유엔장애인권리협약(아래 협약) 제19조 ‘자립적 생활 및 지역사회에의 동참’에 관한 일반논평 5호의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일반논평은 협약의 실질적 이행을 돕기 위해 조약기구가 작성한 것으로, 탈시설에 관한 내용이 담긴 일반논평 5호에는 ‘시설폐쇄’와 ‘시설화 요인 제거’에 대한 내용이 주요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발표한 탈시설로드맵에 이러한 내용은 없다. 또한 탈시설로드맵에서 시설장애인의 퇴소의사를 묻고, 퇴소의사가 있는 장애인에 한해서만 탈시설 지원이 이뤄진다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김 교수는 “협약에서는 탈시설을 장애를 가진 개인이 주거를 비롯해 자신의 삶에 관한 선택과 결정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수단을 제공받으면서 지역사회에서 완전하고 효과적으로 참여하고 통합될 수 있도록, 기존 시설을 폐쇄하고 지역사회에서의 자립생활을 보장하는 정책 및 그 과정이라 본다”면서 “탈시설은 하나의 권리다. 기존 비자발적인 입소로 자유를 박탈당했던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온전한 권리를 획득하는 것으로, 희망자에 한해서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라고 설명했다.
오욱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헌법에 따라 국내법과 동일한 법적 효력을 가진 협약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면서도, 협약에서 왜 ‘탈시설 이행’과 ‘후견인 선임 금지’를 권고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탈시설로드맵에서 ‘시설’을 물리적인 공간으로만 바라보는데, 이를 확장된 개념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오 연구위원은 “협약에 탈시설이라는 용어는 나오지 않지만 탈시설의 권리를 풀어서 설명했고, 일반논평을 통해 탈시설에 대해 자세히 다룬다. 개인적으로는 협약과 일반논평을 곧이곧대로 이행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협약과 일반논평에서 왜 탈시설 권리 보장과 후견인 선임 금지를 이야기하는지 고려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협약에서는 성년후견제도를 ‘장애인의 법적 능력을 부정하는 대리 의사결정제도’라고 보고, 의사결정이 아닌 의사조력을 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이어 “유엔에서는 시설을 물리적인 형태로 정의하지 않는다. ‘100인 이상, 200인 이상인 곳만 시설’이라고 정의하진 않는다. 단체생활로 개인의 사생활이 보장 안 되고 개인의 선택권, 통제권이 보장되지 않고 획일화된 단체활동이 있으면 그것을 시설이라고 부른다”라며 “따라서 ‘인권이 보장되는 시설’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다. 탈시설로드맵은 이러한 시설화 요소 제거를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 탈시설로드맵, 탈시설장애인 별도 지원체계 전무
탈시설로드맵에는 탈시설장애인에 대한 집중서비스와 대안서비스 등이 구체적으로 제시돼 있지 않다. 정부에서 제시하는 자립생활 서비스는 장애인활동지원제도, 기초생활보장제도 등이다. 이는 기존의 사회보장제도로, 탈시설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별도 정책은 아니다.
무엇보다 탈시설로드맵에는 지역사회 24시간 지원 체계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지 않다. 시설거주 장애인은 곧 24시간 돌봄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 지역사회에서 이용할 수 있는 제도는 활동지원서비스가 전부다. 그러나 발달장애인의 경우, 장애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판정 체계로 인해 대부분 월 120~150시간밖에 지원받지 못한다.
김기룡 교수는 “따라서 탈시설장애인에 대한 새로운 활동지원 판정체계와 추가급여 등 별도의 집중서비스 제공이 필수적이다”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이 밖에도 주거모델의 다양화와 탈시설 준비에서 전환 및 정착에 이르기까지 권한을 가진 공적 전달체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 내년도 탈시설 정책 예산으로 807억 원 필요해
탈시설로드맵 발표 이후의 정부 행보도 소극적이다. 탈시설로드맵 발표 후 1월부터 진행되고 있는 시범사업에는 올해부터 2024년까지 3년간 장애인 600명의 탈시설 계획이 담겼다. 광역·기초 지자체 10곳에서 1년에 20명씩 탈시설을 지원할 예정이다. 시범사업 총 예산은 43억 800만 원, 국비와 지방비 비율은 5:5다. 여기서 국비는 21억 원에 불과하다.
정부는 시범사업 3년간 1년에 200명씩 탈시설을 진행한다. 이어 2024년부터 740명, 2025년 740명, 2026년 610명, 2027년 500명, 2028년 450명으로 탈시설 인원을 정하고 있다. 정부는 탈시설 정책을 2041년까지 진행한다고 했지만, 계획에서도 2000여명은 죽을 때까지 시설에서 나올 수 없음을 명시하고 있다.
김기룡 교수는 “정부는 여전히 거주시설이 일정부분 필요하지 않느냐는 생각으로 정책방향을 설계한 것 같은데, 이렇게 계획을 세우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인원이 시설에 남게 된다”라며 “거주시설 이용자가 0명이 되는 것으로 정책 방향을 설계하고, 개별거주지에서 탈시설할 수 있는 지원서비스를 마련해야 한다. 이미 서울, 대구, 부산 등에서 탈시설이 이뤄지고 있는 만큼 시범사업이 아닌 본사업이 바로 시작되는 게 맞다. 현재 1년 기준 전국에서 500여 명이 탈시설했다는 통계가 있다. 정부는 1년에 1000명 정도의 탈시설을 목표로 잡아야 한다”라고 제시했다.
김 교수는 내년도 탈시설 예산에는 탈시설장애인 1000명에 대한 국비 807억 원이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예산에는 △탈시설 자립정착금 1인당 2000만 원 △활동지원 추가시간 하루 8시간(월 240시간) △주거서비스유지 제공기관 인건비 및 운영비 등이 포함되어 있다.
- 국가주도 시설수용 정책 폐기하고 탈시설 정책으로 전환해야
토론자들은 탈시설 정책을 이행하는 데 국비 투입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정부 의지에 달렸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탈시설은 명백하게 국가주도의 정책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시설 정책을 국가가 주도했기 때문이다”라며 “국비 지원 사업을 규정하는 보조금법 시행령이 있다. 이 시행령에서 장애인 관련한 국비 지원은 모두 거주시설 운영에 관련한 사업 뿐이다”라고 말했다.
장 의원은 “이 시행령에 장애인 이동권, 예를 들면 특별교통수단의 광역이동지원센터 운영비, 장애인 평생교육시설 운영비는 국비 지원 제외 사업으로 되어 있다”라며 “기재부는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자유롭게 이동하고, 교육받을 권리를 위해선 국비 지원을 하지 않고, 마침내 시설로 들어가게 될 때에만 그 시설 운영비를 지원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이 자유시민이 되어야 한다. 어떤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면 구성원 모두의 자유가 위협받는다’라는 말을 했다. 정말 옳으신 말씀이고, 그것이 바로 탈시설 권리이다”라며 새 정부를 향해 당부의 말을 전했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도 재정적인 측면에서 시설폐쇄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이 연구위원은 현재 거주시설에 투입되는 예산은 국비(6224억 원)와 지방비를 포함해 9300억 원이고, 각종 기부금까지 합치면 1조 원이 넘는다고 설명했다. 이를 시설장애인 수로 단순 가늠하면 1인당 4400만 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이 연구위원은 “현재 시설에 계신 분들은 주거급여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 급여까지 포함하면 1년에 1인당 5600만 원의 예산을 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따라서 이러한 예산을 지역사회에서 자립할 수 있는 예산으로 편성하면 된다. 탈시설 예산이 부족하다기보다는 정부 의지가 부족한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김기룡 교수도 그동안 정부는 비용 문제로 탈시설 정책을 펼치기 힘들다고 했지만, 비용편익을 따져야 할 때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탈시설 지원 예산 확대는 시설장애인의 인권회복에도 기여한다. 이는 시설장애인의 거주지, 서비스 선택권, 인권가치를 실현하는 측면에서 타당성을 갖는다. 미국에서 한 조사에 따르면 비용편익 수준이 지역사회에 거주했을 때가 시설거주 때보다 2.7배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비용에 대한 고민보다는 비용편익 수준을 생각하면, 탈시설 예산을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제시했다.
한영규 보건복지부 장애인정책과 장애인자립추진팀장은 “시범사업 하면서 주거와 서비스 지원제공 모형에 대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 목표다. 탈시설에 대한 지원은 계속 보완할 부분이다. 예산도 계속 관심을 가져달라. 현재 국회에 법(탈시설지원법)이 계류돼 있는데 제정을 위해 최혜영 의원실이나 다른 의원들과 같이 노력하겠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