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오전 34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지난달 만난 추경호 “예산 요구 다 들어주다가는 나라 망한다”
“정치가 책임져라” 광화문에서 국회까지 이동
“곧 윤석열 취임 100일… 권리예산, 직접 답하라”

광화문역에서 지하철에 탄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그의 옆으로 철창 수레 안에 자신을 가둔 권달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 이슬하
광화문역에서 지하철에 탄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그의 옆으로 철창 수레 안에 자신을 가둔 권달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 이슬하

“얼마 전 추경호 장관을 만나 장애인권리예산을 보장해달라 했더니, ‘나라 망한다’면서 ‘국민 세금을 올려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부자 감세는 소신 있게 신속히 추진하면서, 장애인의 권리는 우리가 34번째 지하철을 타러 나올 때까지 검토만 하고 있습니까? 추 장관은 ‘각 부처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건데, 왜 기재부에만 이야기하느냐’고 하는데요. 기재부는 원청이고 각 부처는 하청업자입니다. 각 부처를 실링 예산(정부 부처별 예산 요구 한도액)에 가둬놓은 기재부가 하청업자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습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가 기획재정부에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을 촉구하며 34번째 출근길 지하철 연착 투쟁을 벌였다.

전장연은 추경호 기재부 장관의 답변을 기다리겠다며, 지난달 4일 이후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투쟁을 중단했다. 이후 전장연은 기습시위로 추 장관을 어렵게 만나 면담했으나, 추 장관은 8월 한 달 동안 실무 협의를 하자는 전장연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에 전장연은 예고한 대로 1일 오전 8시 광화문역에서 출근길 지하철에 올랐다.

쇠사슬과 사다리, 철창 수레 그리고 휠체어. 출근길 지하철 풍경으로는 생경한 것들이 지하철을 메웠다. 스마트폰에 시선을 고정하던 승객들은 이따금 들리는 고성에 고개를 들었다. “지역사회 함께 살자”고 적힌 몸자보를 입은 활동가들은 승객들에게 “장애인 차별을 끊어내는 데 함께해주셨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 출근길 지하철 시위 장기화에도 기재부는 ‘요지부동’

지난달 24일 전장연은 기습시위로 추경호 장관을 만나 면담했다. 면담을 위해 전장연 활동가들을 회의실 안으로 불러들이는 추경호 기재부 장관의 모습. 사진 하민지
지난달 24일 전장연은 기습시위로 추경호 장관을 만나 면담했다. 면담을 위해 전장연 활동가들을 회의실 안으로 불러들이는 추경호 기재부 장관의 모습. 사진 하민지

전장연은 지난해 12월 3일부터 기재부에 장애인권리예산 반영을 요구하며 투쟁했다. 장애인권리예산은 장애인의 이동권·교육권·노동권·탈시설 권리를 위한 예산으로, △특별교통수단 운영비에 대한 국비 지원 △장애인평생교육시설 운영비에 대한 국비 지원 △활동지원서비스 하루 최대 24시간 보장 예산 △탈시설 예산 807억 원 등을 말한다.

전장연은 예산 권한을 틀어쥐고 있는 기재부를 상대로 전날까지 혜화역 선전전을 159일, 삭발투쟁을 81일 동안 이어왔다.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는 지난해 12월 3일 이후로 총 33차례 진행했다.

그러나 기재부는 예산 반영에 대해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지난 1월 6일 기재부 복지예산과장은 전장연과의 면담에서 ‘각 부처와 상의하라’고 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6월 29일 기재부 복지예산과장은 보건복지부 장애인정책과장 등이 참석한 장애인단체와의 간담회에서 ‘노력하겠다’는 답변만을 내놨다고 한다.

이에 전장연은 추경호 장관이 직접 책임져야 한다며 지속해서 면담을 요구했다. 지난 4월 23일 추경호 당시 장관 후보자가 사는 아파트 단지 진입로에서 기자회견을 연 것을 시작으로, 지난달 14일에는 추 장관의 집 문 앞까지 찾아가 공문을 두고 오기도 했다.

전장연 활동가들은 지난달 24일 추 장관이 참석한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에 기습 방문해 추 장관과의 면담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장애인권리예산 투쟁 8개월 만에 만난 기재부 장관과의 면담은 20분 만에 끝났다. 추 장관은 이 자리에서 ‘예산 요구를 다 들어주다가는 나라 망한다’고 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추 장관은 ‘자꾸 기재부만 갖고 떠들 게 아니다’며 불쾌감을 드러낸 것으로 알려졌다.

여의도역에서 9호선을 탄 전장연 활동가들이 국회의사당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지하철 통로에 휠체어를 탄 활동가들이 줄지어 있다. 사진 이슬하
여의도역에서 9호선을 탄 전장연 활동가들이 국회의사당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지하철 통로에 휠체어를 탄 활동가들이 줄지어 있다. 사진 이슬하

윤석열 정부는 지속해서 경기 불황과 함께 ‘예산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최근 법인세와 종합부동산세 등을 대폭 낮추는 ‘부자 감세 개편안’을 발표했다. 전문가들은 기재부의 이번 개편으로 인해 향후 5년간 세수 감소액이 60조 원 이상일 것이라 분석했다.

전장연은 부자 감세에만 적극적이고 장애인권리예산은 외면하는 기재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장애인의 권리 보장을 비용 문제로 치부하는 기재부의 태도는 재정적 부담을 이유로 장애인 30만 명을 학살한 독일 나치 ‘T4 프로그램’의 한국판이라고 꼬집었다.

전장연은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입장이다. 기재부가 정부예산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하는 기한인 9월 3일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전장연 활동가들은 8월의 첫날 다시 지하철을 막았다.

- “곧 윤석열 취임 100일… 권리예산, 직접 답하라”

이날 전장연 활동가들은 지금의 문제를 정치가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장연 활동가들은 광화문역 승강장에 집결해 5호선을 타고 여의도역으로 이동한 뒤, 9호선으로 갈아타 국회의사당역까지 갔다.

권달주 전장연 상임공동대표는 자신을 철창 수레에 가둔 채 지하철에 탑승했다. 철창 수레는 감옥 같은 장애인거주시설을 상징한다. 권 대표는 “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자고 21년 동안 외쳤는데, 아직도 정치는 대답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또 출근길에 지하철을 타고자 한다”면서 “우리나라는 세계 10대 경제강국이라지만, 장애인은 아직도 지역사회에서 제대로 삶을 만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기 위한 예산이 확보될 때까지 계속 지하철을 타고 시민에게 알리겠다”고 말했다.

권달주 전장연 상임공동대표가 철창 수레 안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이슬하
권달주 전장연 상임공동대표가 철창 수레 안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이슬하

오전 8시경 광화문역에서 출발한 전장연 활동가들은 정거장마다 하차해 옆 칸으로 다시 탑승하는 식으로 여의도역까지 1시간 반 동안 이동했다. 5호선 일부 승객들은 거칠게 반발했다. 한 승객은 “추잡스럽게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냐”면서 지하철 안에서 발언 중인 박길연 민들레장애인야학 교장에게 “설득력이 전혀 없는 얘기다. 듣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한 승객은 김유현 두리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을 향해 달려와 침을 뱉고 가기도 했다.

박경석 대표는 “출근길에 시민들과 부딪치면서 지하철을 타야 하는 이 문제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은 무책임하게 피하지 말기 바란다”면서 “이제는 윤 대통령이 곧 있을 취임 100일(오는 17일) 연설에서 직접 답하라”고 촉구했다. 박 대표는 35차 출근길 지하철 연착 투쟁은 윤 대통령의 응답 여부에 달려있다고 밝혔다.

국회의사당역에 도착한 활동가들이 승강장에서 “정치가 책임져라!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이라고 적힌 종이비행기를 날릴 준비를 하고 있다. 사진 이슬하
국회의사당역에 도착한 활동가들이 승강장에서 “정치가 책임져라!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이라고 적힌 종이비행기를 날릴 준비를 하고 있다. 사진 이슬하
활동가들이 던진 종이비행기가 날아가고 있다. 사진 이슬하
활동가들이 던진 종이비행기가 날아가고 있다. 사진 이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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