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부터 LH 신임 사장 공모 시작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들 모두 ‘부동산 시장주의자’
시민사회단체 “주거복지 후퇴할 것… 전부 부적격 후보”
주거취약계층 당사자 “내가 사장 되면 공공임대주택 확대”

주거취약계층 당사자들이 LH(한국토지주택공사) 사장 공모에 지원했다. 지원자는 박재혼 용산역 텐트촌 강제철거 피해자, 백광헌 동자동 공공주택사업 추진 모임 부위원장, 고시원에 사는 나경동 아랫마을 홈리스야학 학생, 반지하에 사는 박도형 민달팽이유니온 운영위원 등 총 4명이다.

현재 LH 사장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들은 대부분 쪽방촌 공공주택 사업을 반대하거나 민간개발에 힘을 싣고, 건설대기업의 이익을 대변해 온 사람들이다. 홈리스행동 등 시민사회단체는 20일 오전 11시, 서울시 용산구 LH수도권특별본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부동산 시장주의자 일변인 인물들은 모두 부적격 후보자들이다. 이들이 LH 사장이 되는 것에 반대하며, 주거취약계층 당사자가 사장 공모에 지원한다”고 밝혔다.

LH수도권특별본부가 있는 KDB생명타워 앞 기자회견 현장. 현수막에 ‘LH 사장 공모, 세입자도 지원한다’라고 적혀 있고,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투쟁’을 외치고 있다. 사진 하민지

- 신임 사장으로 거론되는 인물들 대부분 친시장·친기업 성향

LH는 김현준 사장이 지난달 사퇴함에 따라 지난 15일, 신임 사장 공모를 시작했다. 후임 사장으로 교수, 공공기관 사장 등이 물망에 오르고 있지만 대부분 부동산 시장주의자들이다.

김경환 서강대 경제학부 전 교수는 지난 대선 당시 △종합부동산세 재검토 △재산세 완화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 완화 등 윤석열 캠프의 부동산 정책 공약을 만든 인물이다. 이 같은 공약은 시민사회로부터 ‘부자 감세’라며 크게 비판받은 바 있다. 김경환 전 교수는 박근혜 정권 때는 국토교통부 1차관을 역임했다.

심교언 건국대학교 부동산학과 교수는 학계를 대표하는 시장주의자로, 쪽방촌 공공개발 사업을 ‘소유주 사유재산 침해’라며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인물이다. 심교언 교수는 지난 대선 때 국민의힘 선거대책본부 경제정책추진본부 위원을 맡아 민간 주도의 부동산 공급 정책 설계에 참여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부동산 태스크포스 팀장을 맡기도 했다.

이한준 경기도시공사 전 사장 또한 윤석열 캠프에 참여한 인물로, 1~2기 신도시를 재개발·재건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적 있다. 이외에도 임병용 GS건설 부회장, 송석준 국민의힘 의원 등 정·재계 인사가 거론된다. 김경환 전 교수와 임병용 부회장은 LH 사장 공모에 지원할 뜻이 없다고 밝힌 적이 있어서, 후보는 심교언 교수와 이한준 전 사장으로 좁혀지는 추세다.

림보 홈리스야학 학생이 ‘LH 사장 후보, 쪽방, 고시원, 반지하 세입자도 지원한다’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하민지

이 같은 부동산 시장주의자들이 사장이 되면 어떻게 될까. 윤석열 정부는 내년도 공공임대주택 예산을 대폭 삭감해 국회에 제출했다. 또한 민간주도 개발을 통해 주택을 공급하겠다는 게 윤 정부 부동산 정책 기조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시장·친기업 성향의 인사들이 LH 사장이 될 경우 주거취약계층의 주거권 보장은 더욱 후퇴할 가능성이 높다.

이원호 빈곤사회연대 집행위원장은 “LH는 공공임대주택 공급 확대와 주거복지 향상을 실행할 대표적인 공공기관이다. 그런데 소위 전문가라 불리는 시장주의자들이 LH 신임 사장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들은 민간주도의 개발정책에 복무하며 이윤중심의 분양아파트를 대량으로 공급하고 공공택지를 민간에 매각할 수 있다. 모두 부적격 후보”라고 크게 비판했다.

- 주거취약계층 당사자이자 신임 사장 후보 모두 “공공임대주택 확대하겠다”

부동산 시장주의자들이 후보로 난립하는 가운데, 참다못한 주거취약계층 당사자들이 나섰다. 본인들이 직접 LH 사장 공모에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학력·경력 등 별도의 기준이 제시되지 않았으므로, 국가공무원법 등이 규정하는 결격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 이동현 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는 “지원자들이 새벽까지 지원서를 수정하느라 애를 썼다. 네 분 모두 자기소개서, 직무수행계획서 등의 제출서류를 양식에 맞게 꼼꼼히 갖췄다”고 말했다.

박재혼 씨가 ‘누구도 쫓겨나지 않는 세상’이라는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하민지
박재혼 씨가 ‘누구도 쫓겨나지 않는 세상’이라는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하민지

첫 번째 출사표를 던진 사람은 용산역 텐트촌 강제철거 피해자 박재혼 씨다. 박 씨는 용산역 아래 텐트촌에서 20여 년을 살았다. 그런데 올해 3월, 용산역과 서울드래곤시티호텔을 잇는 공중보행교(구름다리) 공사가 시작되면서 텐트촌에 거주하는 홈리스들은 시공사로부터 강제철거를 통보받았다.

이에 홈리스들은 용산구에 주거취약계층 주거지원을 문의했지만 용산구는 제도와 규정을 무시한 채 “주거취약계층 주거지원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던 지난 5월, 텐트촌에 원인 불명의 화재가 일어났고 박재혼 씨의 텐트는 전소됐다.

홈리스들의 끈질긴 요구 끝에 구청으로부터 주거취약계층이란 걸 ‘인정’받았고, 임대주택 입주신청을 했다. 입주신청만 하면 곧 임대주택에 들어갈 수 있는 줄 알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입주신청을 한 텐트촌 홈리스 4명 모두 630번대의 예비번호를 받았다. 공공임대주택 수가 턱없이 부족해, 주거취약계층 수백 명이 번호표만 들고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박재혼 씨는 “텐트가 다 타서 고시원에 거주 중이다. 내 번호 630번대를 보더니, 다들 언제 임대주택에 입주할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고 한다. 내 차례가 돌아왔을 때 내가 살아있을지, 죽어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탄식했다.

박 씨는 “정책 대상자의 말부터 듣고, 현실과 맞지 않는 잘못된 부분을 고쳐야 할 때다. 공공임대주택을 확대해서 고시원이나 텐트 같은 열악한 거처에서 오래 기다리지 않게 해야 한다. 지금 안 되고 있는 것부터 고치는 게 사장의 역할이다. 오죽 답답하면 내가 지원하겠나”라고 말했다.

나경동 홈리스야학 학생이 ‘주거취약계층 매입임대주택 대폭 확대’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하민지

고시원에 사는 50대 중증 지적장애인 나경동 씨 또한 임대주택에 입주하지 못하고 1년 넘게 기다리고 있다. 나 씨는 “고시원에 방이 80개인데 부엌이 하나밖에 없다. 에어컨은 복도에 하나 있지만 전기요금이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틀어주지 않는다. 진드기와 바퀴벌레 때문에 피부과도 지속해서 다니고 있다”며 “나 같은 사람이 오래 기다리지 않고 그때그때 임대주택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LH 사장이 되면 임대주택을 대폭 확대하겠다”고 설명했다.

백광헌 동자동 공공주택사업 추진 모임 부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백광헌 동자동 공공주택사업 추진 모임 부위원장도 지원했다. 백 부위원장은 동자동 쪽방촌 주민으로, 국토부를 향해 공공개발을 강력히 요구해 왔다. 동자동 쪽방촌 공공개발 발표가 난 건 지난해 2월이다.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하겠다는 정책에 쪽방주민은 환영했다. 그러나 공공개발구역에 땅과 건물을 가진 소유주들은 “사유재산 침해”라고 주장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계획대로라면 지난해 말까지 공공개발 지구지정이 고시됐어야 했다. 지구지정 고시가 끝나야 본격적인 공공개발 사업이 시작된다. 그러나 국토부는 소유주들이 제출한 민간개발안을 검토한다며 시간을 끌더니, 공공개발을 발표한 지 2년이 다 돼 가도록 지구지정을 고시하지 않고 있다.

백광헌 부위원장은 “동자동 쪽방촌 공공주택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지원한다. 선이주-선순환의 공공주택 사업을 전국 쪽방촌으로 확대해, 쪽방주민의 주거권을 보장할 것이다. 또한 주거복지가 필요한 주민을 찾아뵙고, 말씀을 잘 따르는 사장이 되겠다”는 다짐을 밝혔다.

박도형 운영위원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박도형 민달팽이유니온 운영위원은 가족과 단절된 뒤 보증금 100만 원 반지하에 1년 반째 살고 있다. 박 운영위원은 1인 가구 청년이 살 수 있는 LH 임대주택에 신청하려 했지만 포기했다. 현재 자신의 생활반경과 멀리 떨어진 지역에다가 최저주거기준만 겨우 맞춘 4평 원룸이었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박 운영위원이 가진 보증금 100만 원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박도형 운영위원은 “매입임대는 씨가 말랐고, 행복주택은 당첨 확률이 로또복권에 가깝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임대주택 예산을 깎아 분양주택을 늘리겠다고 한다”며 “사장이 되면 공공임대에 투입될 자원인 종합부동산세를 감세하는 국가를 규탄하겠다. 또한 용산정비창에 공공임대주택을 대거 건설하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기자회견 후 지원서류를 경상남도 진주시 LH 본사로 발송했다. 공모 마감은 23일까지이며 신임 사장의 임기는 3년이다.

지원서를 들고 ‘투쟁’을 외치는 LH 사장 지원자들. 박재혼 씨의 지원서는 그의 동료가 대신 들고 있다. 사진 하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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