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제주 성산읍 삼달리에 있는 삼달다방. 장애인권운동가 박옥순과 그의 파트너 이상엽이 함께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이자 문화공간이다. 사진 현다혜
제주 성산읍 삼달리에 있는 삼달다방. 장애인권운동가 박옥순과 그의 파트너 이상엽이 함께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이자 문화공간이다. 사진 현다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사무총장 박옥순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장애인운동 현장을 지키면서, 특유의 커다란 에너지로 새로운 활동을 조직하고, 수많은 의제를 한국사회에 제기했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더 많은 시간을 장애인운동의 각 자리에서 저마다의 사정으로 무너지는 사람들 곁을 지켰다. 사람들은 박옥순에게 자신의 삶과 활동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고, 옥순은 그 이야기를 한없이 듣고 품었다. 나는 옥순을 ‘직장 상사’로 처음 만났다. 2004년 월 30만 원의 활동비를 받고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아래 연구소)에서 인턴십을 할 때, 옥순은 내게 조금은 무섭고 걸걸한 ‘정책실 부장님’이었다. 옥순은 중간중간 사무실 구석으로 숨어 들어가 낮잠을 잤다. 에너지가 끝도 없어 보이는 사람이 어느 순간 쓰러지듯 사라져서 이상했다. 나중에서야 나는 그의 몸 어딘가가 내 몸처럼, 그러니까 무엇이든 다 할 것처럼 나서다가도 갑자기 바닥에 누워 20분쯤 쉬지 않으면 무너지고 마는 어떤 면모를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솔직히 고백한다. 나는 비마이너의 이번 기획에 참여한 것을 후회했다. 이 기획은 내가 담아내기에는 너무나 큰 이야기였고, 그 거대한 작업을 하기에 능력과 경험이 부족했다. 결정적으로, 내가 ‘비장애인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궁금해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았다(게다가 홍은전 작가와 함께하라니, 이것은 김연아 선수 옆에서 공중 2회전을 하라는 것과 같지 않은가?). 나는 장애인 활동가들에게 많은 경우 빚을 지고 있다고 느낀다. 반면 비장애인 활동가들은, 그들이 선택한 그들의 삶을, 언제든 떠날 수 있지만 그저 남기로 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박옥순을 시작으로 내가 만난 이 사람들은 정말로 그들이 선택한 삶을 살았고, 그 과정에서 행복했다고도 고백한다.

그래서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잘 사랑하기 위해 이들의 몸과 삶 어딘가의 ‘결여’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를테면, 박옥순은 왜 낮잠을 20분간 자두지 않으면 쓰러지는 것일까? 아, 저 몸에는 일종의 ‘장애’가 있구나. 그는 (완전한) 비장애인 활동가가 아니구나. 그러나 나의 이 알량한 전략은 거의 무용한 것이었다. 박옥순과 박옥순의 이야기를 좋아하기 위해 나와 그의 몸이 어떤 공통성을 지녔다는 사실은 필요하지 않았다.

지난 7월, 2022년부터 옥순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제주 성산읍 삼달리 삼달다방에서 그를 만났다. 삼달다방은 옥순의 파트너 상엽이 2015년부터 일궈온 게스트하우스이자 문화공간이다. 3박 4일간 삼달에서 먹고 자면서 나는 옥순과 상엽, 삼달을 찾은 게스트들, 제주 애월에서 찾아온 나의 지인, 삼달리의 이웃 여럿과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옥순의 삶을 듣고 보고 썼다. 이 인터뷰는 나의 관점에서는, 전 직장 상사를 마침내 좋아하게 된 (불가능한) 이야기다.

지난 7월 13일 삼달다방에서 박옥순 활동가가 화사하게 웃고 있다. 사진 현다혜
지난 7월 13일 삼달다방에서 박옥순 활동가가 화사하게 웃고 있다. 사진 현다혜

- 함께 놀고 싶은 아이, 함께 일하고 싶은 기자

삼달다방에서 하는 일은 매일 아침 풀을 뽑는 거예요. 그리고는 삼달을 찾은 게스트들과 함께 밥을 먹기 위해서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커피 마시며 수다를 떨고, 떠나는 분들과는 ‘안녕 빠이빠이’ 하고, 또 픽업이 필요한 사람들은 성읍정류장에 가서 모셔오죠. 그러고 나면 바로 점심을 준비할 때가 와요. 점심시간 이후부터 2시에서 3시쯤까지는 쉬어요. 쉴 때 책을 읽는다거나 잠을 잠깐 자거나 좋아하는 만화책을 보죠. 저녁 먹을거리가 없을 때는 장에 다녀오면서 바다를 한 바퀴 돌아요. 오래 알고 지내온 분들이 함께할 때는 저녁 식사 후 술자리가 밤 11시, 12시까지 이어지죠. 그리고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는 생활을 하고 있어요.

이곳에 바다가 없다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과 비슷한 면이 있죠. 부모님이 김제의 금만 평야에서 벼농사를 지었으니까요. 나는 1963년에 태어났어요. 엄마 말에 따르면, 내가 학교 다닐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 동네 아기들을 다 업어줬다고 하더군요. 엄마가 모 심으러 간 곳에 내가 아기를 업고 왔대요. 엄마가 ‘학교에 안 가고 왜 그러고 있느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니 아기 젖을 먹이고 집에 데려다주고 가야 한다고 했다네요. 학생 시절에는 그냥 모두와 순탄하게 잘 어울리는 아이였어요. 좀 ‘노는’ 친구들이랑 시비가 붙어도 그 애들이 나를 어쩌지 못했어요. 중학교 때 전학 온 친구가 있었는데, 칠공주파인지 그런데 속하는 아이였나 봐요. 신발을 구겨 신고 다니길래 “야, 신발 구겨 신으면 곤란해지지 않겠냐?” 그랬어요. 그 아이가 “뭐가?” 그러죠. “신발 또 사야 하잖아. 너네 엄마가 돈이 많아?” 그렇게 물었더니 칠공주들이 저를 둘러싸요. 내가 날쌔거든요. 집회 현장에서 경찰을 만났을 때처럼, 먼저 때리고 도망갔지(웃음). 학교에서 나는 뭐랄까요. 대체로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줬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싸우는 일이 있어도 따돌리거나 그럴 수 있는 아이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 기억에 남는 다른 일은 내 발을 인식한 것. 한쪽이 코끼리 발이라는 걸 초등학교 4학년 때 알았죠. 비가 많이 내리던 어느 날, 발에 흙탕물을 잔뜩 묻힌 채 걸어오고 있을 때였어요. 옆 동네 살던 두 살 위 오빠가 코끼리 다리 같다고 놀렸어요. 오른쪽 발이 많이 붓고, 혈액순환이 안되어서 퉁퉁하게 커지는 증상이에요. 피가 다리에 머물다 고이면 썩게 되고 그러면 몸 전체적으로 컨디션이 나빠져요. 내 발이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르다는 걸 안 거죠. 창피하고 불편해서 많이 울었어요. 엄마가 그놈 새끼 죽여버린다고 했는데(웃음) 나중에 보니까 잘 살아있더만. 그 뒤로 치마나 반바지를 거의 입지 않았어요. 고등학교 합창대회를 나갈 때 선생님이 공부도 잘 못하는 나에게 지휘를 하라고 했어요. 보통은 모범생들이 하거든요. 내가 못할 것 없죠. 그런데 안 한다고 했어요. 교복치마 입고 사람들 앞에 서면 다리가 보일 테니까.

사실 다리에 대해 사람들에게 터놓고 이야기한 지는 오래됐어요. MT 가서도 그냥 발 다 보여주면서 내 발이 이렇다고 말하고. 그런데 서울에서 제주로 올 때 짐을 챙기다 보니 반바지가 없는 걸 알았어요. 다리가 드러나는 옷을 안 입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마 내 안에 잠재된 어떤 부끄러움이 있었겠죠.

박옥순 활동가의 뒷모습. 사진 현다혜
박옥순 활동가의 뒷모습. 사진 현다혜

대학에서는 탈춤을 배우고, 장구를 치고 꽹과리를 치는 사람이었죠. 나만의 풍류를 즐기고 다듬는 시기였달까요. 학생운동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어요.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80년대 당시 대학생들이 다들 그렇듯 사회문제나 이념을 공부하는 데 참여하기도 했지만 나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재미도 없고, 내 몸으로 그 이야기들이 전혀 들어오지도 않고. 나는 몸에 들어와야 재미를 느껴요. 신문방송 전공으로 졸업 후에는 노동현장 이슈를 다루는 ‘월간노사’라는 언론사에 입사했어요. 그때부터 언론 노동자로서의 내 경험들 위로, 한지에 먹이 퍼지듯 사회적인 문제, 노동에 관한 이론이나 이념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죠.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아래 전노협) 운동이 시작되며 한국의 노동운동이 전면적으로 확대되던 그때, 월간노사는 노조와 사측 의견을 모두 다루는 잡지였지만 기자들은 다른 언론인들과 함께 노조를 결성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웠죠. 그런데 월간노사의 편집장이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와 연락하고 지내며 우리가 취재한 노조에 관한 기사와 정보를 공유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기자들이 분노했죠. 결국 전노협이 출범하던 날(1990년 1월 22일) 우리는 다 같이 그만뒀어요.

그 후 어떤 분 소개로 ‘장애인신문사’에 들어가게 됐어요. 당시엔 신문사라는 사실만 귀에 들어왔어요. 장애인이라는 말에는 관심을 갖지 않던 시기죠. 월간노사 시절 칼럼 청탁으로 인연을 맺은 이태곤이라는 기자가 있어요. 1988년 창간된 장애인 분야 월간지 ‘함께걸음’에서 일했던 이태곤은 장애인 당사자였죠. 원고 청탁하느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지적이면서도 호감을 주는 첫인상이었어요. 그에게 장애가 있는지 그때는 인식도 못했고, 그가 ‘이하진’이라는 필명으로 연재하는 어두침침한 콩트를 읽고서 원고를 청탁했던 거죠. 장애인신문사에서 일하기 시작하고 얼마 후 그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전화를 받자 대뜸 “거기 웬일이에요?”라면서 티꺼운 말투로 묻더군요. ‘당신이 장애에 관해 뭘 알고 거기서 일하냐’는 뜻 같았는데, 내가 장애인신문사에 특별한 전문성이 필요한지 아닌지 알게 뭐에요(웃음). 그냥 ‘아유 그래, 신문사 가서 일해봐야지’ 하고 들어가서는 아주 작은 단신을 쓰고 기자 이름 넣을 때였죠. 이태곤이 그 이름을 보고는 자신이 아는 박옥순인지 확인하려고 전화한 거예요. 그때 이태곤이 말했어요. “나 취재 가는 데 따라올래요?”

- ‘어쩔 수 없다’에 맞서는 사람들의 세계

서울 구로에 있는 한 장애인시설을 이태곤과 함께 갔어요. 지붕을 검은 가리개로 덮은 비닐하우스, 그 옆으로 집단 주거용 건물이 붙어있는 곳이었죠. 어두운 복도를 따라 원장을 만나러 가는데, 원생들이 복도 양쪽에 서성이거나 그저 앉아 있었어요. 이태곤은 그 시설이 가진 의혹에 관해 제보를 받고 찾아간 거였는데, 원장을 만나자 “여기서 좋은 일 하신다고 해서 왔습니다”하고 말하더군요. 그 까칠한 인간이 능구렁이처럼 시설 사람들을 띄워주면서요. 원장은 기분이 좋아서 이곳저곳을 자랑해요. 장애인들이 이렇게 일도 하며 지낸다면서 비닐하우스 같은 곳에 있는 장애인작업장을 소개했어요. 사람들이 나사 같은 것을 이렇게 저렇게 끼우고 있었어요. 내가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하면서 들어갔는데 사람들은 그저 무표정한 얼굴이에요. 원장이 옆에서 “인사들 해, 인사들” 그러니까 사람들이 나사를 끼우다가 엉거주춤 일어나서는, 내 눈도 못 마주치고 그냥 고개를 끄덕하고 다시 앉아서 그 작업을 계속하는 거죠. 내가 “뭐하고 계세요?” 물어도 답이 없고요.

장애인들이 작업장에서 일하면서 재활운동도 하고, 같이 재밌게 생활한다고 시설에서 설명하니 나는 ‘그렇구나’ 했어요. 태어나서 그런 곳을 처음 갔으니까요. 그런데 이태곤이 말해요. “박 기자님, 여기서 냄새가 나니까 제가 좀 취재할게요” 걔는 매번 그놈의 냄새 타령이야(웃음). 그는 사람들 칭찬도 하다가 제보내용에 관해서 날카롭게, 답을 할 수밖에 없도록 질문했어요. 아마 횡령이나 폭행 의혹이었던 것 같아요. 겉으로는 화기애애하게 식사도 같이했죠.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태곤이 내게 물었어요. “저 사람들 하루종일 똑같은 나사만 끼우는데, 저 일이 정말 재밌을 거 같아요?”

인터뷰를 하고 있는 박옥순 활동가. 사진 현다혜
인터뷰를 하고 있는 박옥순 활동가. 사진 현다혜

당시 대표적인 장애인언론으로 함께걸음, 장애인신문사, 장애인복지신문이 있었어요. 여기 속한 기자들이 함께 취재를 다녔어요. 함께걸음 이태곤, 장애인복지신문 김종환과 특히 많이 다녔어요. 취재는 속보 경쟁 같은 거 없이 월간지, 주간지 역할을 분담해서 먼저 주간지였던 장애인신문사가 터뜨리면 월간지인 함께걸음이 심층 기사를 내는 식이었죠. 장애인언론 기자모임도 만들어졌어요. 함께걸음 편집장 전흥윤, 기자 이태곤, 장애인복지신문 편집장 정우영과 기자 김종환, 장애인신문사 박옥순 등이 모였죠. 그때 사람들이 이상하게 나를 많이 챙겨줬어요. 여성 기자, 남성 기자, 장애인, 비장애인 할 것 없이요.

나는 출입처를 정할 때 장애인문제연구회 울림터(아래 울림터)와 연구소를 선택했어요. 울림터는 그 무렵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아래 장청) 출범을 준비하고 있었죠. 울림터는 1986년 장애인 청년들이 만든 운동 조직이었고 이들의 주도로 1991년 장청이 출범했어요. 울림터와 장청을 이끈 장애인 청년들은 장애인운동을 사회 전반을 변혁하는 운동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었죠. 당시 이들 투쟁으로 1989년 양대 법안(장애인복지법과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제·개정됐는데 이후에도 장애인 의무고용률을 둘러싼 문제가 남았어요. 장애계는 3%를 요구했는데 재계는 1%를 주장했거든요. 이태곤, 정우영, 김종환은 장애인 당사자로 울림터, 장청으로 이어지는 장애인 청년운동에 함께했던 사람들이에요. 울림터(장청)는 동대문을 조금 지나, 낡은 건물에 아주 작은 사무실을 두고 있었어요. 거기서 만난 장애인들에게 양대 법안이 왜 중요한지, 시행령을 둘러싼 문제가 무엇인지를 들었고 그 투쟁과 정책에 관한 정보를 얻었어요. 연구소는 양대 법안 제·개정을 위한 공동대책위 운영위원장과 대변인이 있는 기관이었고요. 이 무렵부터 나는 무엇인가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그 일이 재미있을 거라는 씨앗이 형성되었던 것 같아요.

장애인신문사에서 취재를 하다 보면 작년 기사를 그대로 써도 문제없을 내용이 많았어요. 예를 들어 올림픽공원에서 영부인이 참석해서 ‘장애인의 날’에 무슨 극복상을 주고 어쩌고저쩌고하는 거죠. 그건 매년 똑같은 거예요. 오후에 행사 끝나면 도시락을 하나씩 나눠주죠. 도시락을 먹는 동안 유명한 연예인들이 와서 노래 공연 같은 걸 해요. 사람이 엄청나게 몰려요. 특히 중고등학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 맨 끝에, 무대에서 가장 멀고 보이지도 않는 뒤쪽에, 휠체어 이용하시는 분들이 우르르 모여있어요. 무대는 저 멀리 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아. 그저 뭔가 있겠지, 연예인이 춤추고 있겠지, 하는 자리인 거예요. 장애인의 날 행사라고 하지만 장애인들은 행사장을 볼 수도 없는 거죠. 그런 날들이 반복되고, 신문사 기자들은 같은 사진을 촬영하고, 그 장면을 설명하는 똑같은 기사를 써서 올리는 거죠.

그런데 울림터와 장청을 취재하면서 그 사람들에게 듣는 이야기는 달랐어요. 그들은 작은 사무실에 모여있지만 ‘내가 장애인으로 태어났고, 돈이 없고, 그러니 이런 상황에 처하는 것이 어쩔 수 없다’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들인 거예요. ‘여기는 어떤 문제가 있고, 나는 그에 맞서서 싸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거침없는 욕설을 입에 달고, 이마에 끈을 묶고 나서는 사람들인 거죠. 그 작은 사무실은 맨 뒷자리에서 매년 똑같은 행사가 벌어지는 그런 곳이 아니었어요. 자신들의 권리가 뭔지 말하는 사람들, 그 권리가 침해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마구 열불을 내는 곳인 거죠. 사실 대학 때까지 나는 삶에서 별문제를 못 느꼈어요. 돈이 없으니 우리 어머니는 조금 힘들었겠지만 나한테는 그것도 큰 문제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이 세계에 오면서 내가 흥분했죠. 무지무지 흥분했어요. 1991년 말 장애인신문사 생활을 2년 만에 접고서 연구소 활동가가 됐죠.

1992~1993년 ‘장애인에게 교육은 생명입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로 특수교육진흥법 전면개정 투쟁을 할 때 박옥순 활동가의 모습(왼쪽). 사진 제공 박옥순
1992~1993년 ‘장애인에게 교육은 생명입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로 특수교육진흥법 전면개정 투쟁을 할 때 박옥순 활동가의 모습(왼쪽). 사진 제공 박옥순

- 너무나 행복한, 너무나 멋진

장애인신문사를 나와 한 달 정도 쉬고 있을 때였어요. 함께걸음 기자였던 고은경이 연구소에서 오후 12시부터 오후 5시까지의 일정으로 근무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어요. 연구소는 함께걸음 발행처로 같은 사무실을 썼어요. 제안받은 일은 ‘장애인복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아래 장애인복지공대위)’의 간사 역할이었어요. 그때는 활동가의 역할에 대한 상이 명료하지 않을 때라서, 근무조건이 나쁘지 않기에 “그래? 알았어” 답하고 출근을 시작했어요. 물론 12시에 출근하고 5시에 퇴근한 날은 출근 첫날 하루뿐이었죠.

양대 법안 운동이 성과를 낸 후 새롭게 장애인교육권에 대한 논의가 진행될 때였어요. 부모들이 아이를 학교에 보낼 때 입학 거부를 당하는 일이 당시 비일비재했어요. 그래서 장애학생의 교육에 관해 규율하는 특수교육진흥법을 개정하자는 운동이 일어났어요. 이를 위해 장애인복지공대위가 꾸려진 것이죠. 특수학교에서 분리된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라 통합교육의 기회를 만들기 위해 통합교육 관련 조항을 만들자. 입학 시 차별행위를 금지하는 규정을 만들자. ‘특수교육’이라는 말을 빼자. 장애인에 대해서는 초등학교 입학 전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을 도입하자. 이런 주장들이 개정 목표였어요.

그 활동을 하면서 행복했어요. 장애아동의 부모들, 법률가들, 나 같은 활동가들이 밤새 해당 문제를 두고 토론을 하면, 장애인 당사자인 이성재 변호사 같은 사람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서 자신이 학교 다닐 때 겪었던 이야기를 해요. 부모들도 학교 입학을 거부당한 분노를 털어놓죠. 장애인신문사 기자로 일할 때는 그런 이야기를 받아 적고 전문가의 의견을 빌어 어떤 주장을 싣더라도, 이 이야기의 무게에 비해 내가 할 수 있는 영향력은 너무 미미했어요. 하지만 여기서는 생생한 이야기들이 부딪히고, 구체적인 법률안을 통해서 대안을 모색하고, 여럿이 모여 함께 싸우죠. 당시 전국에 있던 특수교육 전공 학생들을 포함해 여러 사람을 조직해서 명동성당에서 집회를 열었어요. 우석대 특수교육과 김명기 학생은 그때 단식농성을 했고요. 힘들게 법률 개정이 추진되었는데 정부와 한국특수교육협회(현 한국특수교육총연합회) 등 기관과 단체마다 입장 차이가 있었어요. 한 국회의원이 개최한 토론회에서 한국특수교육협회 회장은 우리가 주장하듯 장애아에 대한 조기교육부터 고등학교까지를 의무교육으로 규정하면 “예산이 너무 많이 든다”며 반대했던 기억이 나요. 그 말을 듣고 토론회를 개최한 국회의원이 되물었죠. “그걸 왜 민간에서 걱정하세요?”

그 의원도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어이없었던 거죠. 모든 주장을 반영하지는 못했지만 특수교육진흥법 전면개정안은 결국 통과됐어요. 이전까지 통합교육에 관해서 어떤 내용도 없던 특수교육진흥법에 “일반학교의 장은 특수교육대상자 또는 그의 보호자나 특수교육기관의 장이 통합교육을 요구하는 경우에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에 응하여야 한다”는 제15조가 신설됐죠.

1992~1993년 특수교육진흥법 전면개정 투쟁을 할때 ‘장애인 교육권 확보를 위한 서명운동’을 받던 모습. 박옥순 활동가(오른쪽) 옆에는 당시 연구소 초기 정책실 멤버로 함께했던 조문순 활동가(전 연구소 소장)가 있다. 사진 제공 박옥순
1992~1993년 특수교육진흥법 전면개정 투쟁을 할때 ‘장애인 교육권 확보를 위한 서명운동’을 받던 모습. 박옥순 활동가(오른쪽) 옆에는 당시 연구소 초기 정책실 멤버로 함께했던 조문순 활동가(전 연구소 소장)가 있다. 사진 제공 박옥순

공대위 간사 역할을 마치고 연구소의 상근활동가가 됐어요. 그 무렵 연구소에서 장애를 동정이나 시혜가 아니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방식을 배우는 ‘장애우대학’을 운영하기 시작했어요. 한신대를 비롯해 몇몇 대학교를 중심으로 장애우대학 1기생을 모집했죠. 비장애인뿐만 아니라 장애인도 여럿 참여했어요. 나는 금요일 업무가 끝나면, 담당 간사가 아님에도 장애우대학 학생들과 거의 늘 밤새 술을 마시며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토론을 했어요. 그때 파트너 이상엽(장애우대학 4기)도 만났죠.

이현준도 그 무렵 만난 장애인 당사자였어요. 그는 근육장애가 있어서 휠체어를 탔고 스스로 움직이는데 제약이 많았어요. 글을 잘 쓰고 취재역량이 있어서 함께걸음에서는 그에게 외부기고 형태로 글을 받아 실었어요. 어느 날 현준이 자신을 한번 찾아와달라고 전화를 했어요. 그의 집으로 가서 그를 만났는데 현준이 말했어요. “나 함께걸음에서 일하고 싶어요.”

너무 멋지잖아요! 우리 사무실은 그때 엘리베이터 없는 지하에 있었어요. 현준은 집을 나와 혼자 이동하는 것조차 힘든 사람이었죠. 그런데 재택으로 외부기고를 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이 공간과 조직에서 일을 하고 싶다는 거였어요. 나는 지하 사무실이라 본인이 불편하겠지만 함께걸음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죠. 해외 자료를 찾고 정리하는 일을 잘 해왔고, 그런 자료를 토대로 원고를 쓰겠다고 하는데 그간 써온 글들이 좋고 훌륭했기에 꼭 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때까지 사실 현준과 나는 몇 차례 만나지 않은 사이였어요. 나는 연구소 내에서 함께걸음 관련 업무를 하는 사람도 아니었고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나에게 했다는 사실이, 굉장한 감동이었어요.

그렇게 현준은 상근자로 함께걸음에서 일하게 됐어요. 재택근무를 많이 했지만 사무실로 출근하는 날엔 근무하는 상근자들이 현준을 업어서 지하 1층으로 이동지원을 했어요. 그리고 당시 건설회사에서 일을 시작한 상엽이 회사 내에 장학금 제도를 만들어 그걸로 현준의 활동지원인 비용을 지원하도록 연결할 수 있었죠. 그때는 제도도 언어도 없었기에 ‘도우미’라고 그냥 불렀어요. 현준은 집에서도 독립했어요. 중증장애인이었던 현준의 독립과 직장생활에 관해 모두 말하자면 우여곡절이 많지만, 그는 결국 연구소의 활동가가 되었고 장애인을 위한 중요한 정책들을 연구하고 소개하는 사람으로 활약했어요.

*                              *                              *

이현준은 내가 2004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의 인턴을 할 때까지 연구소 정책실에서 성년후견제도의 한국 도입을 연구하는 등의 업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활동가로 일을 계속했다. 그때 연구소는 더 이상 지하가 아니었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방배동의 한 건물 사무실을 썼다.

장애가 진행되면서 그의 몸은 조금 더 제약이 커졌지만 그가 컴퓨터 앞에서 몇 개의 손가락만을 이용해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자판을 하나하나 누르던 모습이 생생하다.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옥순에게 여러 번 되물었다.

“왜 이현준은 그걸 옥순에게 말했을까요?”

“왜 이태곤은 장애인신문사의 신출내기 비장애인 옥순에게 기획취재를 함께 가자고 제안했을까요?”

“왜 사람들은 옥순을 그렇게 좋아한 건가요?”

옥순은 모르겠다는 표정을 잠시 짓더니 말했다.

“내가 명랑쾌활해서 그래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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