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대교 기었던 활동보조인제도화 투쟁, 7년전 그자리에서
오페라하우스 사라지고 노들 텃밭 생겨

▲2006년 4월 27일. 한강대교 위 아스팔트 도로 위에 붉은 색으로 '인간답게 살고싶다'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우리의 목소리 알아들을 때까지

손짓 발짓 몸짓으로

억눌려 참았던 설움의 분노를

차가운 아스팔트에 붓는다

 

다시 검게 그을린 얼굴이 될지라도

다시 한강대교를 뱀처럼 길지라도

다시 피투성이 맨몸이 될지라도

다시 한 줌의 재가 될지라도

 

오늘도 우리는 피눈물의 거리에서

손짓 발짓 몸짓으로

억눌려 참았던 설움의 분노를

차가운 아스팔트에 붓는다

(최진영 글, 김호철 가락, 노래 '그날들을 기억해' 중에서)

 

아스팔트 바닥 위, 수십 개의 몸이 꿈틀거린다

 

하나의 몸이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꿈틀댄다. 그렇게 수십 개의 신체가 그곳에 펼쳐져 있다. 아스팔트는 따사로운 봄볕에 약간의 열기를 뿜는다.

 

하체는 ‘정상’의 그것보다 짧다. 상체와 하체, 팔다리는 ‘뒤틀려있다.’ 이쪽 어깨보다 저쪽 어깨가 심히 올라와 있다.

 

여기는 7년 전 2006년 4월 27일, 서울 한강대교 북단. 중증장애인 서른여 명이 바닥을 기어가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민둥머리다. 여기는 서울, 한낮의 풍경. 4차선 중 3차선을 점거했다. 얇은 도로 위로 시내버스가 봉곳이 달린다. 버스 안, 한 중년 여성이 창문 너머 바깥 풍경을 응시한다. 무척이나 낯선 풍경일터이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그 몸은 유별나게들 다양했다. 달랐으나 같았다. 장애인이라는 범주 안에서, 정상성의 범주 바깥에서 그들은 동일 범주에 속했다.

 

그들은 그날, 오페라하우스를 보러 가는 길이다. 노들섬에 7000억 원을 들여 지으려던 오페라하우스는 ‘청계천’에 이어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의 치적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오페라하우스는 건립되지 못했다.

 

아직 짓지도 않은 오페라하우스를 어떻게 본단 말인가.

 

장애인 자립생활엔 15억, 오페라하우스엔 7천억 원

 

당시 서울시와 정부는 중증장애인 자립생활을 지원하는 ‘자립생활센터 시범사업’을 시행하고 있었다. 1년 예산은 15억 원으로 2005년부터 진행되던 사업은 2006년에 ‘반토막’ 났다. 2005년 5월부터 진행하던 사업을 2006년에도 같은 액수의 예산으로 1월부터 진행해야 했다. 예산은 동결되고 사업기간은 두 배로 늘었다. 장애인계의 반발에 정부와 서울시는 돈이 없다고 답했다. 그리고 7000억 원짜리 오페라하우스는 짓겠단다.

 

2005년 12월 겨울, 경남 함안에선 집에서 홀로 지내던 중증장애인이 동사했다. 그는 홀로 거동하기 어려운 근무력증 중증장애인이었다. 한겨울의 한파에 보일러는 터졌고 거기서 새어나온 물이 방으로 흘러들어와 방바닥과 이불을 적셨지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대로 얼어 죽었다.

 

9년 전 어머니가 사망한 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자활후견인이 집으로 배달해주는 도시락으로 근근이 살아가던 그였다. 주말에는 빵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의 죽음에 당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는 “최소한의 일관성 있는 활동보조인제도가 있었다면 그는 죽지 않았을 것이며, 이는 그의 죽음이 국가 방치에 의한 간접적 타살이며 폭력임을 의미한다”라고 규탄하며 활동보조인제도화를 요구했다. 그의 죽음이 싸움의 밑불이 됐다.

 

▲2006년 4월 27일, 한강대교 아스팔트 위에서 구호를 외치는 중증장애인들.

▲한강대교 위에서 자신의 온몸을 드러내고 기어가는 사람들.

 

당시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의 필요성은 그것을 경험했던 이들이 더욱 잘 알고 있었다. 활동보조서비스 시범사업으로 당시 전국 백여 명의 중증장애인이 활동보조를 이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용시간은 하루 두세 시간, 혹은 30분으로 턱없이 부족했다. 그마저도 2006년도 예산이 줄어들면서 전 년보다 대상자도, 이용시간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중증장애인들은 삶의 많은 부분이 바뀌고 있었고 제도는 추상이 아니라 구체로 삶에 새겨졌다. 제도의 경험을 통해 제도의 본질을 알았다. 싸움은 더욱 절박해졌다.  
“활동보조인이 얼마나 필요한지 삭발로 알릴 수 있다면 머리카락이 아니라 몸이라도 못 자르겠는가.” (최강민, 당시 32세, 뇌병변장애1급, 2006. 4. 19 프로메테우스 기사 “한국사회가 장애인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중증장애인 39명은 서울시청 앞에서 집단 삭발을 한다. 서울시에 활동보조인제도화를 요구하며 시청 앞에서 노숙농성을 시작한 지 29일째 되던 날이었다. 하지만 집단 삭발식에도 서울시는 응답하지 않았다.

 

천막도 치지 못한 채 스티로폼 한 장으로 농성을 이어갔다. 농성 39일째인 2006년 4월 27일 낮 2시,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한강대교 위에 섰다. 활동보조인이 없으면 우리가 이렇게 기어서 살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리라. 우린 실제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으니깐.

 

앞으로 나가기 위해 바로 누운 몸을 뒤집는 것도 힘겨웠다. 비틀거리고 삐걱거리며 기어갔다. 무릎이, 팔꿈치가, 어깨가, 엉덩이가, 신발이, 온몸이 거친 아스팔트 바닥에 쓸렸다. 바닥이 거칠어 앞으로 나가는 것은 더욱 더뎠다.

 

현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박김영희 사무국장이 당시 대열의 선두에 섰다. 장갑을 꼈음에도 아스팔트 바닥을 기느라 손바닥 살갗이 벌겋게 까였다. 핏망울 맺힌 손으로 마이크를 움켜잡았다.

 

“여러분, 함안에서 활동보조 없이 얼어 죽은 장애인을 생각하며 세 번만 기어갑시다!”

“여러분, 활동보조인이 없어서 시설로 갈 수밖에 없었던 장애인을 기억하며 세 번만 기어갑시다!”

“활동보조인이 없어서, 부모님께 평생 죄인으로 살아야 하는 장애인을 생각하며 기어갑시다!”

 

이 싸움으로 끝장을 보리라, 이를 악물었다. 2000년대 초, 장애인 이동권 싸움을 할 때 세상 그 누구도 ‘이동권’이란 단어를 알지 못했다. 그때처럼 2006년 당시 아무도 ‘활동보조인’이란 단어를 알지 못했다. 세상은 몰라도 싸워야 했다. 최소한 내 마음대로 밥 먹고, 똥 싸고 오줌 쌀 시간이라도 삶에서 가지고 싶었다.

 

도보로 10분 거리, 6시간 동안 기어

 

한강대교 북단에서 노들섬까지는 약 500미터, 도보로 10분가량 되는 거리를 6시간 동안 기었다. 가장 느린 사람의 속도를 따랐다.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느리게 기어갔다. 그들이 처한 몸-자리가 그들이 처한 사회적 자리였다.

 

노들섬에 다다를 때까지 세 명의 중증장애인이 탈수와 탈진으로 구급차에 실려 갔고 마침내 완주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기어가는 이들의 마음보다 더욱 울음으로 가득 찼을, 기어갈 수조차 없어 휠체어에 앉아 따라가던 중증장애인들과 비장애인 활동가가 그 곁에 함께했다.

 

다음날 서울시로부터 협상이 들어왔고 5월 1일, 43일간의 농성을 접는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상임공동대표는 “한강대교 투쟁 후 활동보조예산이 15억에서 2000억으로 늘었는데, 돈 없다는 권력의 배를 가르면 사회적 권리가 기어 나온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방법으로, 온몸으로 행진하는 사람들 모습.

▲중증장애인들이 기어가는 동안 날이 저물어 하늘색이 붉게 바뀌어 있다.

 

7년 전 그곳, 다시 찾아

 

그날로부터 정확히 7년하고도 닷새가 지났던 5월 2일, 그 자리를 다시 찾았다. 박김영희 사무국장,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최진영 소장,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이규식 소장, 모두 7년 전 그곳을 기었던 이들이다.

 

“사실 그때 경찰이 세게 쳐주길 바랐죠. 5분 안에 연행될 거로 생각해서 가볍게 준비했어요. 경찰서나 집에 갈 거로 생각했는데 6시간 동안 기었네.”

 

박김영희 사무국장이 그때를 추억하며 깔깔 웃었다. 6시간 동안 기었던 그 길을 전동휠체어를 타고 달려본다. 그 길이 이렇게 짧았던가.

 

가족에게도 보이기 싫은 모습이었다. 집에 손님이 오면 엉금엉금 기는 모습 보이기 싫어 구석에서 웅크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길 위에 보였던 시간이었다. 한강대교를 기겠다고 ‘동지들과 결의’했지만 결코 그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정말 이렇게까지 날 보여줘야 하나’ 감정적으로 힘들었다. 아스팔트 바닥에 긁혀 너절해진 옷가지만큼이나 마음이 그랬다. 그런데 그 몸이 나의 현실이었다. 이 현실을 누군가는 세상에 알려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는 해야 할 몫이었다. 내 몫이 없던 그 시절 그 세계에서 삶 가장자리에 주어진 나의 몫이었다.

 

당시 서울시를 상대로 했던 활동보조인제도화 투쟁 요구 사안 중에 '활동보조를 장애인의 권리로 인정한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한강대교를 기었던 것은 이 문구를 따내기 위한 싸움이었다.

 

서울에서의 싸움은 전국 싸움의 밑불이 됐다. 5월, 대구에서 활동보조인제도화 투쟁이 일어났고 6월에는 인천에서도 농성이 타올랐다. 두 지역에서 모두 승리했다. 8월부터는 각 지역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중앙정부 싸움에 들어갔다. 경기도에서도 하반기에 투쟁이 이어졌다. 지역에서의 잇따른 승리에 정부와의 합의는 손쉽게 이뤘으나 생각지도 못한 ‘본인부담금’이 생겼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2007년 1월 인권위원회에서 25명의 중증장애인이 집단 단식에 돌입했지만 본인부담금을 막지는 못했다. 그러나 소득과 나이에 따른 대상 제한은 폐지했다.

 

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지원하기 위한 활동보조서비스는 2007년 국가 정책으로 제도화됐다. 활동보조서비스를 통해 장애인은 독립적 존재로 인정됐고 시설이 아닌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게 됐다. 어떠한 것을 시도하고 꿈을 가질 수 있는 사람, 취향에 따라 자신의 문화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비장애인에게는 자연스러운 이 모든 것들이 장애인에겐 불과 몇 해 사이 일어난 일들이다.

 

그러나 활동보조서비스는 중증장애인의 삶을 온전히 지지해주기에는 아직 여전히 헐겁다. 본인부담금은 폐지되지 않았고 올해 들어서야 활동보조 신청 자격은 장애 1급에서 2급으로 확대됐다.

 

지난해 10월엔 활동보조인이 퇴근한 뒤 새벽 2시경 화재가 발생해 고 김주영 활동가가 숨졌다. 당시 고인은 직접 119에 신고해 구조대가 10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지만, 비장애인이면 서너 걸음에 불과한 거리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결국 그 자리에서 질식사했다. 고 김주영 활동가의 죽음으로 활동보조 24시간 보장에 대한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한강대교 북단, 이곳에서 비장애인 활동가들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에서 내려와 기어가기 시작했다.

▲7년 전, 활동보조인제도화 투쟁을 하며 기었던 그곳을 오늘 활동보조인들과 함께 걷는다.

 

삶 속에 어우러진 제도로 세심히 다듬어야

 

그러나 24시간 보장 요구와 함께 제도가 삶과 만나면서 섬세히 다듬어져야 하는 부분들이 남아있다. 이는 공·사 경계를 넘나드는 활동보조 직업의 특수성이기도 한다. 박김영희 사무국장은 그 관계 안에서 활동보조인과 중증장애인의 권력관계를 본다.

 

“중증장애인이 가족과 시설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활동보조인과의 관계에서 ‘관리 받는 대상’으로 넘어갈 수 있는 위험은 항상 노출되어 있죠.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이야기하지만 공·사 공간을 넘나드는 활동보조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사적 공간에서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이 얼마나 보장될 수 있느냐는 어려운 부분이에요.”

 

또한 활동보조인은 중증장애인 중에서도 조금이라도 경한 장애인을 선호하게 된다. 그 안에서 장애인은 중·경증으로 선별되고 ‘손이 많이 가는’ 중증장애인은 배제되기도 한다. 따라서 24시간이 아니라 48시간까지, 필요한 만큼 지원되어야 한다고 장애인계는 요구한다. 혼자 활동보조하기 어려운 이들에게는 필요한 상황에 따라 활동보조인이 두, 세 사람까지 동시에 지원돼야 한다는 거다.

 

이 외에도 활동보조 중개 사업을 하는 자립생활센터의 불안정함, 노동자로서의 활동보조인의 권리, 활동보조인의 나이와 성비 불균형 문제 등도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다. 

 

7000억 원을 들여 짓는다던 노들섬 오페라하우스 자리는 현재 텃밭으로 바뀌었다. 2011년 10월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서 박원순 시장이 당선되면서 오세훈 전 시장이 추진하던 오페라하우스 건립은 무산됐다. 그리고 그 노들텃밭엔 노들장애인야학과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공동텃밭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7년의 시간을 건너 한강대교 북단을 경유해 그 길이 끝나는 노들섬, 그 땅에서 여러 겹의 시간이 포개진다. 노들야학 학생과 활동보조인이, 노들야학 교사가 주말이면 함께 그 땅을 찾는다. 그렇게 살갗 할퀴던 시간을 지나 단단한 봄 씨앗, 흙 속에 심는다.

 

▲7000억 원을 들여 짓는다던 노들섬 오페라하우스 건립은 무산되고 현재 노들텃밭으로 바뀌었다.

▲노들장애인야학,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공동텃밭 앞에서.

▲노들텃밭에 모인 노들장애인야학,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람들. ⓒ노들장애인야학

▲2013년 4월 노들야학 교사, 학생이 모종을 노들텃밭에 옮겨 심고 있다. ⓒ노들장애인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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