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립희망원, '감금과 배제'의 시설 역사는 또 다시 반복된다

[2016년 결산 ⑦] 희망원-형제복지원-소록도를 통해 본 가려진 시설의 역사

2016-12-29     강혜민 기자
대구시립희망원 전경 (출처 : 희망원 홈페이지)

또 다시 시설이다. 장애인거주시설이 존재하는 한 문제는 반복된다.
 

올해는 대구 시립희망원이었다. 희망원은 1958년 대구시가 부랑인시설로 설립하고 80년부터 재단법인 대구구천주교회유지재단이 위탁 운영하고 있다. 노숙인재활시설, 노숙인요양시설, 정신요양시설, 장애인거주시설 등 총 네 개 시설에 1214명이 거주하고 있다. 전국에서 세 번째로 큰 사회복지시설이다.
 

이곳은 ‘좋은 시설’이라고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곳이었다. 2000년부터 2014년까지 연속 6회에 걸쳐 우수사회복지시설로 선정되고, 2006년엔 최우수사회복지시설이라며 대통령상까지 받았다. 복지부 장관 표창도 3차례나 수상했다. 복지부가 사회복지시설 대상으로 3년마다 진행하는 평가에선 2005년, 2008년, 2011년, 2014년 연속 4회 A등급을 받았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2014년부터 2월 8개월 동안 시설 내 생활인 129명이 죽었다. 전체 생활인 1214명의 10.6%에 달하는 수치다. 이들 죽음은 단순 사고사로 처리됐다. 거주자들은 ‘희망원 내 규칙위반에 대한 규정’에 따라 거주인 폭행, 성추행, 이성 교제 등을 하면, 시설 내 심리안정실이란 공간에 감금됐다. 생활인들은 퇴직한 부원장의 가사도우미로, 희망원 정문 경비로, 구내식당과 병원 도우미 등 강제노동에 수시로 동원됐다. 임금은 시간당 천 원도 되지 않았다. 이외에도 일상적인 거주인 폭행, 급식비 횡령 등의 문제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박정희~박근혜의 역사는 형제복지원으로 이어진다 

2년 8개월 동안 129명 사망. 이 거대한 숫자를 보는 순간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곳이 있다. 바로 부산의 형제복지원이다. 
 

1987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형제복지원 사건은 1975년 박정희 정권 시절 만든 내무부 훈령 410호로부터 시작했다. 이에 근거해 국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형제복지원이라는 ‘부랑인 수용소’에 강제 수용·감금했다. 형제복지원은 최대 3천여 명을 수용했던 거대 시설로, 공식기록으로만 12년 동안 513명이 사망했다. 사망자 수만 비교해도 이번에 드러난 희망원 참상은 30년 전의 형제복지원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형제복지원은 지난 2012년 피해생존자 한종선 씨의 1인 시위와 책 ‘살아남은 아이’ 출판을 통해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형제복지원이 단순 사회복지시설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내무부 훈령에 근거해 국가가 자행한 폭력임을 밝혀내기 위한 진상규명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를 위해 지난 19대 국회에서 형제복지원특별법이 발의됐지만, 새누리당 반대로 제정되지 못한 채 19대 국회 임기 종료로 자동 폐기됐다. 특별법은 지난 7월, 20대 국회에서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의해 재발의됐으나 답보상태다.
특별법 논의가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으니 언론에서도 이 사건을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피해생존자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살아가고 있다.
 

지난 11월 12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해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도 광화문광장에서 시국선언을 했다. 이들은 박정희 정권에서 시작된 고통을 그의 딸 박근혜 대통령이 ‘결자해지’하고 피해자들 앞에 석고대죄할 것을 요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피해생존자들은 지워지지 않은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오늘의 현실에 대해 절규했다. 
 

한센인 백 년의 고통이 격리된 곳, 소록도

삶이 계속되는 한 고통은 이어졌다. 한반도 남해, 전라남도 소록도는 그 고통조차 국가에 의해 강제 격리된 곳이다.

올해는 국립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 되는 해다. 그 전신은 일제강점기인 1916년 설립된 자혜의원으로 일제는 치료를 이유로 한센병 환자를 이곳에 강제수용했다. 설립 당시엔 100명 안팎이었지만 1940년엔 최대 6136명까지 있었다. 그땐 하루에 한 명꼴로 사람이 죽어 나갔다. 1945년, 나라는 해방됐지만 이들의 삶은 해방 정국과 거리가 멀었다. 여전히 소록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지난 6월 20일, 소록도 100주년을 맞아 소록도에서 특별재판이 열렸다. 재판부와 변호인들이 한센인의 시신 해부가 이뤄진 검시실에서 소록도 주민의 설명을 듣고 있다

국가는 올해 100주년을 ‘기념’하며 각종 행사를 치렀다. 기념이라니, 대체 무엇을 기념하는 걸까. 한센인들에겐 백 년의 고통이었다. 치료와 감염 예방을 이유로 강송 당해 끌려온 이들은 섬 안에서 강제노동과 단종·낙태를 당했다. 해방 후엔 한센인을 대상으로 한 집단 학살이 일어났다. 섬 바깥에 한센인 정착촌을 만들 때면 늘 지역주민의 반대에 부딪혔다. 설령 정착촌에 살 수 있게 되어도 한센인 2세는 학교에 갈 수 없었다.
 

2007년 ‘한센인 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피해자 생활지원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이 법에 근거해 정부는 진상규명위원회를 꾸리고 위원회는 피해 사건으로 인정받은 자에 한해 생활지원금으로 한 달에 15만 원을 지급했다. 일본이 자국민 한센인 피해자들에게 1인당 한화로 8천만 원~1억4천억 원까지 일괄 손해배상한 것과 비교하면 한국 정부의 조치는 형편없었다. 그래서 단종·낙태에 대해서만이라도 국가 책임을 묻고자 2011년, 피해자들은 국가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서울고법 민사30부(부장판사 강영수)는 올해 백 주년을 맞이하여 소록도에서 특별재판을 열고, 현장검증이란 이름으로 한센인의 시신해부가 이뤄졌던 검시실, 감금실, 소록도 자료관, 수탄장, 만령당(납골당), 자혜의원을 둘러봤다.
 

하지만 재판 결과는 그 전보다 뒷걸음질 쳤다. 현장검증까지 했던 재판부는 지난 9월 23일, 남녀 동일하게 2천만 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제까지 제기된 한센인 단종·낙태 소송 총 6건에 대해 재판부는 여성 4천만 원, 남성 3천만 원 배상하라고 판결한 터였다. 그런데 이번 재판부는 기존 재판부와 다르게, ‘국가가 한센인 인권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왔다’고 판단했다. 사법부의 판단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에게 기우뚱 기울어져 있었다. 그 판결은 피해자의 역사를 지우고, 이들을 강제수용했던 시설의 존재를 긍정하고 있었다.
 

시설을 없애는 것이 ‘우리의 국가’를 세우는 일 
 
소록도는 거대한 섬 전체가 병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섬은 일반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곳과 마을주민(한센병력자)들이 살아가는 마을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일반 사람은 주민들이 사는 곳으로 들어갈 수 없다. 한센인이라는 이유로 탄압받아왔던 역사가 이젠 이 사회와의 통합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국가 입장에서도 이롭다.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 역사 자체를 지우는 것이며, 지워진 여백에 역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 고령인 한센인 피해생존자들의 죽음을 기다리기만 하면 국가는 지난 백 년의 역사를 자기네들의 언어로 다시 쓸 수 있다.
 

여기에 사법부는 가해자가 저지른 폭력들에 대해 면죄부를 주었다. 가족도 돌보지 않은 이들을 선한 마음으로 돌봐주었던 이들이 있어 이제껏 살아있는 것 아니냐, 길에서 죽을 뻔한 거 먹여주고 재워주는 시설이 있어 다행이지 않았느냐며. 그 스스로 납득할만한 논리를 만들어내고 그 논리는 유통된다. 바로 그 논리가 현재의 시설을 존재케 했다. 그렇게 단 한 번도 반성하지 않았기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뻔뻔한 역사는 오늘날 형제복지원이란 이름으로, 희망원이란 이름으로 반복 재생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국가가 제도로서 보장해야 할 것을 보장하지 않았을 때, 바로 그 공백에서 발생한 일이었다. 시설은 그 틈에서 자라났다. 그것은 이제까지 봉사와 희생으로 포장됐다. 이제 그 껍질을 벗기고 깨야 한다. 시설을 없애고 봉사의 논리를 깨는 것은, 국가에게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국가’를 새로 세우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