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 이용 장애인이 ‘카드 비밀번호’ 알려줄 수밖에 없는 이유

실효성 낮은 휠체어 접근성 기준, 그마저도 지킨 경우 찾기 힘든 ATM “현금 찾으려면 다른 사람에게 비밀번호 알려줄 수밖에…”

2017-03-21     최한별 기자
지난 3월 11일, 한 트위터 이용자가 다음과 같은 내용의 트윗을 올렸다.
 
"밖에서 누가 매장문을 쾅쾅대고 두드리길래 놀라서 나갔는데 휠체어를 이용하는 손님이 ATM에서 돈을 뽑을 수가 없다고 도와달라고 부른 거였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자기 카드를 맡기고 비밀번호를 말해주고...나는 ATM의 높이를 오늘 처음 실감했다."
(Twitter의 @17thnonsense)
 
이 트윗은 이틀 만에 약 1만8천 회 가량 리트윗되며 많은 사람이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트윗 작성자 '17thnonsense'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경험한 일이었다"라며 "매장 바깥 인도에 있는 기계였다. 누군가에게는 걸림돌이 되는 것이 나에게는 의식조차 없었다는 것이 큰 충격이었다"라고 당시 소감을 전했다.
 
언제든 편리하게 현금을 찾을 수 있는 CD(현금자동지급기, Cash Dispenser)와 현금입출금 및 계좌 이체 등 다양한 은행 업무를 볼 수 있는 ATM(현금자동입출금기, Automatic Teller`s Machine)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금융서비스들이다. 그러나 장애인은 여전히 현금입출금과 은행 업무 등을 위해 시간 제약이 많은 은행 창구를 찾아야만 한다.
2010년부터 대대적으로 '장애인용 CD/ATM' 도입이 추진되었다. 2010년 6월 29일, 한국은행 산하 조직인 '금융정보화추진협의회(아래 협의회)'는 '장애인을 위한 CD/ATM 표준'을 마련했다. 이 표준안은 시각장애인과 휠체어 이용 장애인이 접근 가능한 CD/ATM 기준을 담고 있다. 또한, 장애인 접근 가능 기기를 CD/ATM이 10대 이하인 자동화 부스에는 1대, 11~20대는 2대, 21대 이상은 3대를 설치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당시 협의회는 2010년 3월 말 당시 은행권에 설치된 전체 CD/ATM 4만9088대 중 1104대가 장애인용이며, 2013년까지 5천여 대를 추가로 설치해 장애인용 기기 비중을 10% 이상으로 늘릴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와 더불어 2008년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서, 은행들은 앞다투어 '장애인용 ATM 설치'를 홍보했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17조(금융상품 및 서비스 제공에 있어서의 차별금지)에 따르면, 금융상품 및 서비스의 제공자는 각종 금융상품과 서비스의 제공에 있어서 정당한 사유 없이 장애인을 제한·배제·분리·거부하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현재 전국에 설치된 장애인용 ATM은 통계조차 잡히지 않고 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매년 전국 CD/ATM 통계를 내고 있지만, 장애인용 CD/ATM 설치 대수는 파악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현재 한국은행은 CD/ATM 운영 주체별, 설치장소별, 이용실적 등을 집계하고 있으나 장애인용 CD/ATM 설치 현황은 없다.
 
'장애인을 위한 CD/ATM 표준'이 제정되고, 은행들이 '장애인 고객의 편의를 위해' 기기를 들였다며 요란하게 홍보하고는 있지만, 장애인이 체감하는 CD/ATM은 여전히 혼자서 이용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이 아무개 씨(뇌병변 1급)는 "높이가 낮은 ATM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며 "높이가 낮아도 화면이 수평이라 내용이 잘 보이지 않는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 씨는 "현금을 찾을 때는 활동보조인에게 카드 비밀번호를 알려주어 대신 찾아달라고 한다"라며 "아무래도 민감한 개인정보다 보니 불안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전했다. 그는 "화면이 좀 기울어져 있으면 나처럼 팔이 쭉 펴지지 않는 사람도 혼자서 ATM 사용을 할 수 있을 텐데, 높이만 낮다고 장애인용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해외의 경우 ATM 조작부 화면이 약 70도가량 기울어져 있고, 비밀번호 등을 누르는 숫자판은 버튼 형태로 화면 아래에 붙어있다. 한 트위터 사용자(@MAR********)는 "(휠체어 이용자의 ATM 접근이 어렵다는 내용의) 트윗 보고 여긴 어떨까 싶어서 찾아봤는데 높이 확실히 낮네"라며 한 장의 사진을 올렸다. 사진은 캐나다의 한 대학 건물 안에 있는 ATM으로, 한국에 있는 ATM에 비해 높이가 상당히 낮아 보일 뿐만 아니라, 화면이 전면에서도 보인다.
한 트위터 사용자가 올린 캐나다 ATM 사진. 높이가 낮을 뿐만 아니라, 화면이 전면부를 향해 있고 숫자판은 터치스크린 형태가 아닌 버튼형으로, 팔을 멀리 뻗지 않아도 숫자 입력이 가능하다. 트위터 화면 갈무리.
 
그러나 현재 국내 은행에 ATM기를 공급하는 주요업체인 '노틸러스효성'과 'LGCNS'에서 만드는 ATM은 모두 거래 화면이 수평으로 되어 있다. '장애인 접근성 기준'을 충족한다고 홍보하고 있는 기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LGCNS 측 관계자는 "조작부 화면을 수평으로 제작하는 이유는 보안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거래화면이 수평이 아닌 경우, 뒤에서 화면이 보일 수 있어 개인정보 유출 우려가 있어 조작부 화면을 수평으로 제작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2012년 협의회 ATM 휠체어 장애인 접근성 기준 마련 당시 자문으로 참여했던 배융호 장애물없는생활환경시민연대 사무총장은 "기준 마련 당시에도 조작부 화면 각도가 지적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은 'IT 강국' 이미지가 강하다 보니 기계도 신기술 도입이 거듭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시각장애인이나 휠체어 이용 장애인에게는 구형 모델이 더 사용하기 편하다"고 전했다. '보안' 측면에서는 비밀번호 유출 방지가 가장 중요할 텐데, 화면이 세워져 있더라도 버튼형 숫자판을 사용해 비밀번호를 누르는 구형모델을 사용하면 비밀번호 유출을 막을 수도 있고, 스크린 터치형 숫자판보다 이용하기도 쉽다는 것이다.
 
배 총장은 "한국에서도 해외에서 사용하는 '구식' ATM 기계를 쓰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은행에서 구형 모델을 밀어내고 터치식 신형 기계를 앞다투어 비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산이 중단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화면을 세울 수 없다면 휠체어가 조금 더 깊이 들어가 이용자가 화면을 내려다볼 수 있으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면 아래 하부공간이 충분히 마련되어야 한다. 그러나 협의회 기준에 따르면, 하부공간은 약 20cm밖에 되지 않는다. 배 총장은 "(접근성 기준 마련 회의 당시) 한국 ATM은 다른 나라에서 사용하는 기종과 달리 다양한 기능을 갖춰야 해서 하부공간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며 제조업체의 반발이 심했다"고 밝혔다.
해외에서 사용하는 ATM은 대부분 현금 출금 기능만을 가지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CD기'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 ATM의 경우 통장 정리, 계좌 이체뿐 아니라 각종 공과금 납부, 사고신고, 보험금 납입 등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 보니 기계 크기를 줄이기 위해서는 ATM 내부 '환류 시스템' 개발이 필요하다.
 
배 총장은 "당시 ATM 기기를 만드는 업체들은 1mm라도 덜 줄이고 싶어 했다. 아주 미세한 조정에도 수억 단위의 개발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에 배 총장은 "이익을 내야 하는 기업에 장애인 접근성이 높은 기계 개발과 제작을 무작정 맡겨둘 것이 아니라, 국가가 재정지원을 통해 장애인의 금융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국내 주요 ATM 제조업체인 LGCNS(왼쪽)와 노틸러스효성(오른쪽)이 만드는 '휠체어 장애인 접근성 기준 준수' ATM. 두 기기 모두 거래 화면이 수평으로 되어 있다.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지난 1월, 금융위원회는 장애인의 금융이용 차별을 개선하기 위한 TF를 구성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당시 금융위는 TF를 통해 금융기관을 대상으로 장애인이 모바일 ATM을 이용하거나, 직접 창구를 방문하여 적절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지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2월에 금융기관 대상 서면조사를 시행하고, 3월에는 현장조사를 실시한다.
 
금융위는 "실태조사를 통해 부당한 차별 관행이 발견될 경우 이를 개선하고, 장애인들을 위한 금융서비스 인프라 보완 등을 포함한 종합 대책을 상반기 중으로 마련해 실행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이번 조사를 통해 장애인의 '실질적인' 금융 접근권이 보장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