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에 갇히다
[쪽방신문] 쪽방 주민들의 장마
“끄떡없다”, “괜찮다”, “비 와서 시원하다”, “안 나가면 되는데 뭐 힘든 게 있어?”, “계속 누워있으니 편하다” 최근 장마에 어떻게 지내는지 동자동 주민들에게 여쭈었을 때 나온 답들이다. 이런 경우만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이런 답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고통스러운 비(苦雨)’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 장마는 쪽방 주민들에게 길고도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겨준 경우가 훨씬 많았다. 엄밀히 말하면 이번 비는 기후변화에 의한 역대급 최장기 국지성 집중호우다. 비 자체가 주민들에게 고통을 주기도 했지만, 장마와 기후변화에 무대책으로 일관했던 당국자들의 책임도 크다고 본다. 큰비로 주민들의 어려움과 피해가 결코 적지 않았기에 여기에 짧게나마 소개하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일이다.
| “비가 계속 오니까 도시락배달 봉사하는 것도 힘들고, 비가 와갖고 바깥에 못 나가는 것 때문에 마음도 그렇고.” “건강 문제 때문에 산책을 계속해줘야 하는데 밖에 못 나가니 살이 찌고 콜레스테롤도 높아졌어요.” “방에만 있으니 옛 생각이 나서 안 마시던 술을 마셨네요.” “다행히 집은 괜찮은데 허리, 다리가 더 쑤셔서 못 살겠네.” “밖엘 못 나가서 그런가, 우울증이 심해졌어요. 나도 모르게 빙초산을 입 안에 넣었다가 큰일 날 뻔했다니까. 왜 그랬나 몰라요.” “고관절 수술해서 목발 짚고 다니는데 비가 계속 오니 병원 가는 게 큰일이네요.” “빗길에 자전거 타고 가다 넘어져 오른쪽 무릎을 다쳐 병원 다녀왔어요.” “비 맞은 빨래는 다시 하면 되는데, 시계가 벽의 물 먹고 작동이 안 돼. 맛이 가버렸네.” “옥상에 심어 기르는 채소가 이번 장마에 싹 다 죽었어요.” “옷이고 뭐고 곰팡이에 냄새 때문에 아이고~ 죽겠어요. 빨리 전세임대 가야지.” “방문에 물이 새서 주인한테 얘기했더니 건물옥상에 물건 치우면 안 새니까 나더러 치우라는 거예요.” “화장실에 금이 갔어요.” “부엌에 물이 새서 건물주에게 말해놨어요.” “보일러실 쪽에 물 새서 주인에게 얘기는 했는데 언제 올지 몰라요.” “천정에 물이 차서, 벽지 떼어놓았어요. 주인에게 얘기해야지.” “벽 사방에 습기 천지라 선풍기 틀어 놓았는데 소용없어요.” “습기 같은 건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지하니까 당연히 가득하죠.” “청소 일 하는데 민원도 많이 들어오고, 잠시 비 그쳤을 때 한꺼번에 치워야 하니 힘이 많이 드네요.” “세차 일 하는데 이번 장마에 일을 많이 못 했고 8월엔 하루도 못 했어요. 기본 급여는 나오는데 이 일이 잘되어야 내년에도 할 수 있는데 이러다가 아예 일자리 자체가 없어질까 그게 걱정입니다.” |
이상하리만치 길고 거대한 장마가 끝났다. 하지만 이런 장마가 올해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거란 어두운 전망이 나온다. 쪽방 등 비주택에 거주하는 사람들에 대한 제대로 된 장마 대책을 속히 마련해야 하는 이유다. 당장은 이번 장마로 주민들이 어떤 어려움과 피해를 겪었고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조사부터 해야 한다. 그러나 폭우와 장마 대책은 반드시 임대주택 이주나 공공주도 재개발 등 주거 대책과 함께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쪽방 주민들의 고통은 장마가 끝난 이후에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장마와 관련해 주민들을 만나며 인상적이었던 것은 안부 한마디 던졌을 뿐인데 “걱정해줘서 고맙다”라고 말씀해주신 분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진작 더 많은 주민들을 만나지 못했던 나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이웃, 활동가, 공무원과 정치인들 모두 이런 안부와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해결의 시작이지 않을까?
* 이 글은 쪽방신문 7호에 실렸습니다. 쪽방신문은 2020홈리스주거팀이 쪽방 재개발 문제 대응을 위해 쪽방주민들과 소통하기 위해 만든 매체입니다. 필자의 허락을 받아 비마이너에 공동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