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이 유일한 답은 아니니깐
[칼럼]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얼마 전, 한 활동가가 아프면 병원에 가라는 말이 무책임하게 느껴진다고 쓴 글을 읽었다. 그의 글은 병원에서 질병을 인정받지 못하거나, 되려 차별당하는 경험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와 조금 다른 맥락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겠지만, 결론은 같다. 아프면 병원에 가라는 말은 공허하고, 때로 폭력적이며, 대체로 무의미하다.
아픈 몸으로 학교에 다니다 보면 지각, 결석, 조퇴와 친해진다. 이런 출결은 성적에 영향을 주고, 전체 수업의 3분의 1 이상 결석하면 F를 받는다. 출결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능력보다는 성실함을 평가하는 기준인데, 건강하지 않으면 이 기준을 충족하기 어렵다. 건강은 대체로 성실함의 필요조건이다.
하지만 이번 글에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성실함과 건강의 관계가 아니다. 그보다는 성실함이나 진실성 자체가 의료적으로만 이해되고 있고, 여기서 질병은 급성 질환으로만 이해되고 있는 현실을 짚어보고자 한다.
성실함의 척도이자, 성적에 영향을 주기도 하는 출결에서 점수를 잃지 않으려면 만성적으로 아프거나 애매하게 아프면 안 된다. 내가 지각·결석·조퇴를 해야 해서 교수님이나 조교님에게 메일을 보낼 때, 거의 항상 요구받는 것이 있다. 바로 진단서다.
학창시절 진단서는 내 몸 상태보다는 ‘수업이 있는 시간에 병원에 다녀왔다’라는 사실에 대한 증빙서류로서의 의미가 강했다. 어제 병원에 다녀온 후 몸이 덜 회복되었다고 할지라도, 오늘의 진단서가 없으면 나는 학교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진단서는 ‘질병이 있음’, 그리고 ‘특정 시간대에 내원하였음’을 입증해주지만, 내가 얼마나 아픈지 충분히 보여주지는 못한다. 그러니 수업에 빠지는 것이 인정되는 이유는 학생이 ‘아파서’보다는, ‘병원에 다녀와서’다.
이는 한편으로 ‘아픔’과 ‘병원에 감’이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하고, 병원에 갔다면 마땅히 아프며, 아프지 않다면 병원에 갈 이유가 없다는 인식. 이러한 틀로는 갑자기 증상이 생기고, 대증적으로 접근하면 (충분하지는 않지만) 급한 불을 끌 수 있는 급성 질환만을 겨우 이해할 수 있다.
출결에서 내가 사람들을 당황시키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나는 아플 때 병원에 가지 않는다. 나의 아픔은 가벼운 외과적 조치나 진통제로 금방 해결되는 종류가 아니고, 그래서 병원에 가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내가 아플 때 필요한 건 약과 병원이 아니고 비어 있는 화장실, 화장실과 가까운 누울 자리, 두꺼운 이불과 스마트폰이다.
그렇다 보니, 학교에 가려고 눈을 떴을 때 너무 상태가 안 좋으면 구구절절한 메일을 쓰게 된다. 메일에 병의 원인과 증상부터 지금 내 상태까지 하나하나 밝히는 이유는 사람들이 만성질환을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내가 진단서를 제출할 수 없는 이유를 납득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아파서 수업에는 못 가는데 병원에도 가지 않는 이유 말이다.
내가 아파서 약속에 못 나갈 것 같다고 말하면,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꺼내는 말 중 하나는 이것이다. “병원 안 다녀오셔도 괜찮겠어요?” 그럼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괜찮지는 않은데 병원은 안 가도 돼요.” 이 이상한 말이 만성질환자에게는 때로 가장 솔직한 말이다.
아프면 병원에 가라는 말은 종종 왜 본인 아픈 걸 스스로 잘 챙기지 못하냐는 비난으로도 쓰인다. 아프면 마땅히 병원에 가서 낫고 돌아와야 한다는 ‘환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낫는 질병을 가진 사람일 테다. 하지만 급성 질환 환자도 병원에 가기 힘들 만큼 아플 수 있고, 어차피 사람들은 아플 때 병원부터 떠올린다는 점에서 쓸모가 없기도 하다. 아픈 사람은 병원에서 진단받지 못하거나 오진된 질병, 약으로 치료되지 않은 증상, 검사 결과에 이상이 없어서 받았던 의심이 떠오르고, 지금 자신의 몸을 스스로 가늠해 본다. 그렇게 아픈 사람은 자신이 병원에 가야 하는지 아닌지 이미 고민하고, 결정했다.
병원과 약이 아니라면, 아플 때 필요한 건 뭘까?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기에 그때그때 나의 판단이나 대답이 달라지지만, 기본적으로는 일상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작은 방법들을 함께 고민해보는 것이다.
최근에 나에게는 두 친구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한 사람은 자신의 질병이 일상을 이어나가기 힘들 만큼 심해졌다고, 다른 친구는 자신에게 어떤 질병이 있는 것 같다고 나에게 말했다. 나도 여전히 노력하고 있는 지점이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내가 지금 당장 그들의 병원비를 대주거나 그들에게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으며, 상대가 그걸 원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내가 상대와 함께 그의 몸을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이제 우리는 하는 일이 몇 개인지, 잠은 어떻게 자고 밥은 어떻게 먹는지, 친구나 가족은 얼마나 만나는지 이야기하며 아픈 몸을 둘러싼 일상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자신을 힘들게 하고, 어떤 일이 힘들긴 하지만 자신의 일상을 지탱해주는지 알아갈 수 있다.
아프면 병원에 가라는 말은 그 사람이 실제로 왜, 어떻게 아픈지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 그 말은 병원이 모든 고통을 해결해줄 수 있다는 착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완치가 안 될뿐더러 그저 평생 질병을 관리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다. 물론 실제로 자신의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고 병원에 가길 거부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 필요한 건 얼른 병원에 가라는 쉬운 말보다는, 그가 병원에 가길 거부하는 이유, 병원에 가기 위해 필요한 조건에 관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다.
“약은 거들 뿐 회복에 이르는 길에는 무수한 개인적 활동 요인, 사회적 환경 요인, 제도적 변화 요인들이 존재한다.” (『‘장판’에서 푸코 읽기』 , 박정수, 오월의봄, 2020, 115쪽)
노들장애학궁리소 박정수 연구활동가는 정신의학이 정신질환을 다루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고 비판하며 위와 같이 말했다. 이는 다른 아픔으로도 확장할 수 있다. 병원에 가라는 말보다 중요한 건 지금 아픈 그 사람의 상태를 내가 정확히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의 더 나은 일상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함께 대화하며 차근차근 알아가는 것이 아닐까.
|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관해기(증상이 일정 정도 가라앉아 통증이 거의 없는 시기)의 만성질환자. 장애인권동아리에서 활동하고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수업을 들으며 질병과 통증을 새로운 시좌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몸의 경험과 장애학, 문화인류학에 관심이 많고, 앞으로도 그것들을 공부하려 한다. 책 『난치의 상상력』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