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조카의 사춘기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아들은 엄마 눈치를 보며 얼른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척한다. TV를 보던 아버지도 아내 표정을 살피며 소리를 줄인다. 어김없이 엄마와 딸 사이에 한바탕 불꽃이 튈 것 같은 조짐이다.
급기야 엄마의 분노가 터지고 딸을 향한 비난의 말들이 마구 쏟아진다. 딸은 눈에 독기를 세우고 엄마를 보고 있다. 결국 더는 못 참겠다며 딸은 자기변호를 시작한다. 약속 시간에 집에 안 들어오고 공부도 않는다며 야단치던 엄마는 “어디 엄마를 째려보고 말대꾸야”로 바꾼다. 딸은 또 그런다는 표정으로 “엄마는 할 말 없으면 말대꾸한다고 그러지?”라며 물러서지 않는다. “네가 그렇게 잘났어? 저것이 엄마 머리꼭대기에 앉으려고 해.” 결국 딸은 억울해하며 울기 시작하고 모든 엄마의 영원한 저주(?),“ 나중에 꼭 너 닮은 딸 낳아서 키워봐”라는 말로 사태는 일단락된다.
남동생 집에 며칠 있어보니 올케와 사춘기에 접어든 조카 때문에 하루도 조용할 사이가 없다. 모녀간의 갈등이 갈수록 커진다. 다들 사춘기니 엄마가 이해하라지만 딸만큼 엄마도 무척 힘들어 보인다.
질풍노도와 같은 사춘기, 내게도 있었나
지난달에 강원도 동해 고향에 갔었다. 고향에 가는 길이어서가 아니라 언제나 강원도 가는 길은 설렌다. 그곳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1987년 고향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꽤 넓은 도시였던 것 같은데 차를 타고 동해시를 한 바꿔 돌아보니 무척 작게 느껴졌다. 어릴 적 보던 세상의 넓이와 성인이 된 지금에서야 가늠하게 되는 넓이가 달라서일 것이다. 조금은 낡은, 그래서 익숙한 광고판의 색깔과 문구들, 그리고 파마 중임을 홍보하려는 듯 보자기를 쓴 머리로 온 동네를 활보하시는 아줌마들, 참 정겹다.
1970년대 중반 한창 시멘트와 연탄 수출로 활력이 있던 묵호항. 바람이 부는 날에는 하얗게 빨아 널은 아기 기저귀에 까만 연탄가루가 촘촘한 점처럼 붙어 있었다. 오징어가 많았던 묵호항에서는 살아 반짝이는 오징어들이 리어카에 실려 나갔다. 그리고 집집마다 빨랫줄 한 켠에는 늘 오징어가 몇 마리 쭈글쭈글한 못난이로 햇볕에 마른 정도에 따라 색깔도 달리하여 매달려 있었다.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면 그 빨랫줄에 오징어 대신 명태가 줄줄이 줄을 지어 말려지고 있다. 가끔 가곡 <명태>라는 노래를 들으면 그의 머나먼 여정의 종착지가 빨랫줄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나의 사춘기는 이 작은 동네에서 시작되었다. 3살 때 장애를 가진 뒤 어느 날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나는 장애 없는 사람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죄를 지은 것도 없지만, 너무 벅차서 벗어버리려 해도 결코 벗어 버릴 수도 떼어 낼 수도 없는 ‘장애인’이라는 낙인은 연습할 겨를도 없이 내 몸에 찍혔다. 그리고 누구도 너는 장애인이니까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해 준 적 없었지만, 이 세상은 내가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고 분명히 다른 세상에 불시착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나 스스로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그 과정이 나에게는 사춘기였다. 미래가 없는 삶, 평생 형제들에게 짐스러운 존재로 살아야 한다는 것, 어디에서도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는 존재, 내가 이곳에 ‘있다’ 또는 ‘없다’ 해도 전혀 달라질 것이 없는 존재의 부재, ‘존재의 가치’가 없는 나의 삶을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배움도, 자본도, 노동력도 없는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내가 사는 것은 가족들에게 또 이 사회에 민폐를 끼치는 것일 뿐이라는 현실만이 내 앞에 있었다. 그래서 ‘왜 나만?’이냐고 ‘왜 나여야 했냐?’고 답도 없는 질문을 하고 또 하고, 상대도 없는데 화를 내고 또 내고. 그러다 서럽고 서러워서 그리고 억울해서 밤을 새우며 울고 또 우는 세월이었다.
아무도 내가 존재해야 할 이유를 가르쳐주지를 않았지만 사실 물어볼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지혜로우셨으며 의심의 여지 없이 나를 사랑하는 게 분명했던 할머니에게 물어본들 만족할 만한 답을 듣지 못하리라고 나는 이미 판단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언젠가 엄마에게 “나는 어떻게 살까?”라고 한마디 한 적이 있다. 그러자 대답 대신 엄마 얼굴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도 눈물이 흘렀다. 엄마와 나는 더 이상 아무 말을 못 하고 울기만 했다. 우리는 왜 우는지, 왜 말이 필요 없었는지…. 지금에 와서도 보탤 말이 없다.
그날 이후 나는 엄마에게 이런 얘기를 꺼내지 않았고 엄마에게는 내가 살아오면서 깨어지고 아픈 것들, 상처가 되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외로웠다. 상처를 받거나 비참함을 느낄 때도 난 혼자 견디어야 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것을 혼자 생각하고 결정하고 혼자 정리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
10대 시절 밤마다 다짐한 것은 ‘스무 살까지만 살자’였다. 스무 살까지만 살자는 것도 살아야 할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죽을 방법을 못 찾아서였다. 사실 죽고 싶어도 나갈 수가 없었다. 혼자 나갈 수가 없으니 죽을 방법도 없었다. 죽음 다음 세계가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 세상만을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게 스물다섯 살 정도까지는 죽음에 대한 생각만 했다.
그러다가 여러 책을 읽게 되면서 사람의 존재 가치가 물질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존재 가치의 기준이 달라야 한다는 것, 내가 스스로 나의 존재를 몰랐었던 것은 내가 가진 기준이 철저하게 나를 무능한 존재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어떤 능력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인간이라는 것 자체가 인정되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알아내기까지는 참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그전까지 내가 가진 인간의 기준, 나를 무능한 인간으로 간주하는 기준은 바로 이 사회의 기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에서 자유로워지려고 나를 추스르는 작업은 죽을 때까지 해야 할 고단한 작업이다. 나는 어느 순간에 나를 그 기준에서 판단하고 있고, 사람들에게 내가 판단
되는 것에 좌절하고, 그래서 다른 기준을 찾으려는 작업도 때로는 벅차고 지친다.)
TV 예능 프로를 보면 카메라에 한 번 더 비춰지기 위해 ‘미친 존재감’으로 몸부림치는 걸 볼 수 있다. 정치인들이 모이는 행사에 가보면 비서들은 일찍 도착해 카메라가 잘 잡히는 자리를 미리 잡아놓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물론 권력자의 자리는 따로 정해져 있으니 분주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다들 권력을 가지려고 능력자가 되려고 자유로운 사춘기를 헌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 사춘기 무렵이었을 것이다. 신문광고에 나온 밀란 쿤데라의『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소설을 제목만 보고 샀다.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 제목이 좋았고 바로 내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지만 그때는 달랐다. 내게 존재감의 확인은 죽음만큼이나 절박했기 때문이었다.
조카와 올케, 그리고 어머니
올케는 우울증이 생기려고 한단다. 딸이 다니라는 수학학원도 안 다니고, 휴대전화로 인터넷 소설만 보고, 또 소설을 쓴다고 시간을 낭비하고, 시사문제에 관심을 가져 신문만 보고, 성당 활동에도 바쁘고, 너무 많은 호기심과 다양한 재능이 있어 여기저기 불려다니고, 방학을 다 그렇게 다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야단치면 방에 들어가 나오지도 않고,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반항만 하고 등등. 올케 말을 듣고 있으면 같이 큰일이다 싶다.
조카와 얘기를 해보려니 어른들은 똑같은 얘기만 할 것이라며 대화를 안 하려 든다. 그래서 네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고, 나는 할 말이 없다고 말하고 한 시간 동안 듣기만 했다.
조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리 큰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자기도 불안하고 초조하단다. 다른 친구들은 선행학습을 하고 있으니 성적이 떨어질 것에 대한 걱정도 크단다. 하지만 자기의 관심은 문학인데 왜 수학을 꼭 해야 하느냐, 흥미도 없고 왜 필요한지도 모르겠는데 무조건해야 하느냐고 따진다.
선행학습을 하지 않아 학교 수업을 따라갈 수 없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학생이 학교에 가기 전에 학원에서 먼저 배워야 한다면 학교는 왜 가야 하는 것인지, 학원에 갈 수 없는 아이들은 어쩌란 말인지, 사교육비가 느니 가계부담은 어쩌라는 것인지, 아이 사교육비로 모두 털어 넣고 나면 노후는 정부가 책임질 것인지, 가정형편에 따라 생기는 아이들 사이의 괴리감은 또 어쩔 것인지……. 조카의 말을 듣고 내가 생각이 더 많아졌다.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대답도 부족하고 공감되는 것도 있어서 딱 한마디, 나는 네가 내 조카여서 참 좋다, 나는 너의 성적과 상관없이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달라는 말을 해주었다.
사춘기 시절 나의 방황과 고민은 나만의 것이었다. 집안에만 있고 장애가 있으니 사춘기가 없을 것이로 생각했을까? 나의 감정이나 변화에 누구도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었다. 가끔 신경질을 냈고 엄마한데 못된 말도 많이 했는데, 어머니는 내가 신경질을 낼 뿐이지 사춘기라고 생각하지를 않았던 것 같다. 사실은 나의 사춘기는 어머니 안중에 없었다.
외아들 남동생이 어머니의 주요 관심사였다. 좋은 약제를 지어 먹이고, 추울까 더울까, 아들이 사춘기 때는 제발 바른길로 가야 한다고 불공드리느라 바쁘셨다. 나는 내 존재감을 찾고자 몸부림쳤던 사춘기 시절이지만, 어머니만이 아니라 누구도 내 존재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아무도 관심 둬주지 않는 사춘기를 지나고 있을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어떤 아이는 장애가 있기 때문에, 또는 시설에 있다는 이유로, 가족이 있어도 가족 안에서 존재감이 없어서, 너무 가난해서, 또는 부모가 없어서……. 어떤 이유에서든 사춘기의 그 소중한 경험을 혼자서 외로움에 떨면서 보내고 있는 아이가 있지는 않을까?
오래전에 소년원에서 강의해달라고 해서 갔던 적이 있다. 몇 개의 육중한 문을 통과할 때마다 그 문들의 차가운 쇳소리는 세상과의 단절을 일깨워주었다. 우리 사회는 그 아이들을 또 다른 세상에 몰아두고 있었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육중한 문과 드높은 담장에 갇힌 아이들은 또 어찌할 것인가.
올케도 안쓰럽다. 부모는 심장을 밖에 달고 사는 사람들 같다. 자식들의 사춘기를 지켜보며 힘든 시기를 보내는 부모를 생각하면, 자식의 일이라면 언제나 자신을 버릴 기세였던 내 어머니가 떠오른다.
우리 어머니는 나에게 모든 어머니의 영원한 저주를 못하셨다. “나중에 꼭 너 닮은 딸 낳아서 키워봐, 그러면 엄마 마음 알 거야”라는 그 흔한 말도 할 수 없었던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했을지 가끔 생각해보곤 한다. 자식을 낳아봐야 부모 마음을 알 수 있다면 나는 내 어머니의 마음을 영원히 모를 거다. 그렇든 그렇지 않든 이 순간, 어머니의 사랑과 염려, 관심으로 더 많은 아이를 살펴야겠다.
* 이 글은 격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