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질을 수치스러워해야 할까?

[연재] 질병과 함께 춤을

2020-10-21     다리아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횟수가 더해질수록 통증이 더 심해지고, 발병 간격이 좁아지고, 증상이 나아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더는 참지 못해 병원에 가야 하는 순간이 조만간 올 것 같다. 아니, 이미 병원에 가야 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병을 키우고 있을 수도 있다. 이렇게 치질은 내 삶에서 점점 강력해지고 있다.

처음 치질을 겪은 건 약 15년쯤 전이다. 지인에게 추천받은, 발음하기도 어려운 그 연고를 약국에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여러 번 말한 끝에 겨우 샀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처음엔 직접 연고를 바르다가 제대로 발라졌는지 확인이 안 되니, 엄마에게 부탁했다. 아무리 가족이라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엎드려서 엉덩이를 치켜든 자세로 항문을 보이는 건, 아무래도 찜찜했다. 다행히 좌욕과 연고만으로 상태가 좋아져서 병원에 가지 않았고, 한동안은 치질로 고생하지도 않았다.

변기에 앉아 있는 인형 이미지. 사진 픽사베이

다시 치질이 생긴 건 결혼한 뒤다. 2~3년 전부턴 1년에 한두 번씩 꼭 치질로 애를 먹고 있다. 약국에서 연고를 사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게 기억이 나서 남편에게 부탁하곤 한다. 올해 설날을 2주 정도 앞둔 어느 날 또 치질이 도졌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졌다고 느낀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고통 때문에 잠드는 것도 힘들었다. 앉아 있는 것도, 걷는 것도, 어떤 자세도 편치 않았다. 화장실에서 문고리를 잡고 식은땀을 흘리며 나도 모르게 입으로 “하느님…”을 불렀다. 소리는 처절했다. 목소리를 제대로 낼 정도의 힘도 없었다. 화장실에서 진을 다 빼고 나와서는 말 그대로 한숨을 돌려야 했다.

결국 가장 가까운 항문외과를 검색했다. 그리고 그 아래 달린 평가 내용을 읽었다. 주로 수술 후기였다. 나도 병원에 가면 수술을 받게 될까. 덜컥 겁이 났다. 설 연휴가 지나고 2월부터 새롭게 직장생활을 앞두고 있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2년 반이나 쉬었다가 겨우 다시 일하게 되었다. 회사에 첫 출근 날짜를 미뤄 달라고 어떻게 말해야 하나, 항문 수술을 받고 어떻게 의자에 앉아서 일하지, 4시간 출퇴근은 어떻게 하나 등 고민으로 머릿속이 혼란했다.

후기를 계속 읽어 내려갔다. 다행히 이전의 난소낭종처럼 수술한 뒤, 일주일씩 입원하지 않고, 이틀이면 퇴원하는 것 같다. 퇴원을 빨리한다고 해도 고통이 클 터인데, 일상생활을 어떻게 할까 궁금했지만, 병원 후기에 그런 내용까진 없었다. 우선 병원 두어 곳의 이름과 위치를 기억해뒀다. 특히 여자 의사가 있다는 곳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래도 여전히 병원에 가는 건 내키지 않았다. 배가 이 정도로 아팠다면 오래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항문은 달랐다. 아무래도 의사에게 보여주는 게 좋겠다는 남편의 종용에도 도저히 병원에 갈 마음이 나지 않았다. 결국 설 연휴만 지나 보자고 마음먹었다.

며칠을 똑바로 누워만 있었다. 누워서 핸드폰으로 치질에 대해 검색하는 게 일이었다. 특히 겨울철에 치질이 많이 생긴다는 걸 알게 됐다. 연휴를 앞두고 병원에는 나와 같은 환자들이 많겠다고 생각하니 약간 위안이 됐다. 치칠의 종류에는 치핵, 치루, 치열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15년 전에 앓았던 건 치열이었다. 지금 아픈 건 치핵 때문이다. 내 질환의 정확한 이름이 혈전성 외치핵이라는 것도 알았다. 알고리즘의 흐름에 따라 타고 흐르다 결국 좌욕할 때 쓰는 도구의 광고에서 멈췄다. 검색의 끝은 결국 광고구나.

다행히 설 연휴 동안 괜찮아졌다.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신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딱딱한 콩알 같은 그것이 가라앉았다. 일단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다시는 화장실에서 핸드폰을 보거나 오래 앉아 있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이젠 정말 괜찮을 줄 알았는데….

다시 고생이 시작된 건 9월 초부터다. 못 견딜 정도의 통증은 가라앉았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낫지 않고 있어 골치다. 남편이 연고를 사 와야 하는데, 매일 늦게 퇴근하느라 도통 시간이 나지 않았다. 나는 회사 근처에 있는 약국에 갔다. 분명히 전에는 여자 약사였는데, 오늘은 남자 약사가 있다. “전에는 여자분이 있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여자 약사는 월요일에 일하고, 오늘은 자신이 맡는 날이라고 한다. 그냥 돌아서 나올까 망설이다 치질 연고를 달라고 작게 말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그나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남자 약사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왜 여자 약사를 찾았는지 이해했다는 듯) 괜찮아요~”라며 연고를 건넸다. 얼른 계산하고 나가고 싶은데, ‘피가 나면 약을 먹어야 한다, 변비가 있으면 안 좋으니 관리해야 한다’ 등 말이 길다. 나는 “피는 안 나요”라고 황급히 말하고,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왔다.
  
다행히 재택근무 중이라 꼭 의자에 앉아서 일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다고 쿠션에 기대서 반만 누울 수도 없었다. 온전히 눕지 않으면 항문에 힘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노트북을 거실 바닥에 놓고 엎드렸다. 화상 회의를 할 때도 양해를 구하고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나의 만성질환 가운데에는 치질뿐 아니라 식도염도 있다는 것. 치질 때문에 3일 정도 엎드려 지냈더니, 식도염이 심해졌다. 물도 넘기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위, 아래가 다 문제였다. 평소에 소화가 잘 안 돼서 저녁마다 1~2시간씩 걷거나 달리기를 해왔는데, 치질 때문에 운동을 할 수 없어 소화력이 떨어졌다. 식도염을 생각하면 걸어야 하고, 치질을 생각하면 누워있어야 하니,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지 난감했다. 운동을 전혀 안 할 순 없어서 뛰지 말고 천천히 걷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걷다 보면 1~2시간을 훌쩍 넘기고, 그러면 어김없이 치질은 더 심해지고, 그러길 반복하다가 지금은 30분으로 제한을 두고 걷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병원에 갈 마음은 들지 않는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병원에 가는 게 망설여질까.

내가 치질로 고생하고 있다고 주변에 호소하자, 지인들이 자신도 같은 경험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병원 소개와 좌욕 등 조언도 잊지 않았다. 병원에 가는 걸 그토록 싫어하는 자신인데, 20년간 참다가 결국 수술을 받았다는 이도 있고, 수술 후에 괄약근의 힘이 예전 같지 않다며 수술에 신중하라는 이도 있다. 엄마도 자신의 친구들이 수술받은 병원을 소개했다. 엄마의 말인즉, 자신의 친구 중에 치질 수술을 받은 사람이 많으니, 나에게도 얼른 병원에 가라는 뜻이었다. 한 지인 또한 치질 수술을 받은 경험을 이야기하자 주변에서 너도나도 치질 수술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고 했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치질로 고생하고 있다. 

통계상으로도 치질은 매우 흔하다. 우리나라에서 매년 백내장 다음으로 수술 건수가 많다. 2018년에는 17만 4천 명가량이 치핵 수술을 받았으며, 거의 매년 19만 명가량이 치핵 수술을 받는다.(참고 : 「2018년 주요수술통계연보」, 국민건강보험, 2019)    

사람들은 치질에 걸려도 수치심 때문에 병원에 가길 주저한다. 사진 언스플래시

도저히 병원에 갈 마음이 생기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치질로 고통받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고, 통증을 호소하면 너도나도 자기 경험을 털어놓지만, 내가 먼저 말하기 전에는 아무도 자신이 치질로 고생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내가 치질로 아프기 전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치질로 힘들어하고, 수술을 받는다는 걸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치질을 부끄러워한다. 나도 그렇다. 항문 질환 카페에서 글 몇 개만 열어도 “수치스럽다”는 단어가 왕왕 보인다. 병원에서 의사에게 항문을 내보이는 것 자체가 수치스럽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다른 기관도 아니고 배설기관을 보이는 것은 확실히 거북하다.

게다가 치질은 웃음거리로 소비되기도 한다. ‘오 해피데이’(2003)라는 영화에는 주인공이 항문 쪽 고통 때문에 어정쩡하게 걷는 모습, 수술을 받고도 차마 그 사실을 밝히자 못한 채 회식 자리에서 어쩔 수 없이 술을 먹는 장면이 재밌게 그려진다. 치질을 경험한 적이 없는 누군가는 치질을 생각하면 TV에서 본 코믹한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고 한다. 미디어 속에서 치질은 유머 코드의 하나로 등장하곤 한다.  

수치스럽거나 우습거나. 치질에 대한 이미지가 이러하니, 치질에 걸렸다고 말을 하는 것도, 병원에 가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나처럼 병원에 가길 주저해 오랫동안 참고 지내는 사람이 많다.

병원에 가기 꺼려지는 이유 중 또 하나는 수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수술 건수가 많다는 건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수술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로 병원을 찾는 경우가 많거나, 아니면 과도하게 수술이 많이 이뤄지고 있거나. 그저 환자에 불과한 나로서는 의사가 심각한 얼굴로 수술을 받자고 하면 그래야 하나보다 하고 수술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나는 어떻게든 수술을 피하고 싶다.

포털에서 ‘치질’을 검색하면 치질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인식에 대한 기사나 글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의사들은 심각해지기 전에 병원에 가야 하며, 치질을 예방하는 생활습관을 조언하곤 한다. 그러나 의사의 조언을 읽어도 병원에 가길 꺼려지는 마음은 여전하다. 병을 키우고 싶진 않지만, 의사들의 말이 수치심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진 않는다. 그런데 이 수치심을 꼭 극복해야 할까?

나는 치질을 앓고 병원에 가길 주저하면서, ‘왜 어떤 질병은 유난히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것일까’에 관해 자주 생각한다. 항문이 아니라 다른 부위에 혈전(피가 혈관 안에서 흐르다가 굳어서 된 작은 덩어리)이 생겼다면 어땠을까? 다른 부위가 이 정도로 아팠다면 병원에 가는 것을 별로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눈에 다래끼가 생겼을 때 나는 망설이지 않고 안과를 찾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치질을 수치스러워해야 할까?’라고 의심한다. 치질에 관해 내가 읽은 그 어떤 글에서도 ‘치질 때문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없었다. 의사도, 대부분의 사람도 치질이 항문 부위에 생기기 때문에 이를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주된 내용은 창피하더라도, 통증이 있으면 병원에 꼭 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정작 병원에 가지 못하는 이 수치심에 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 수치심을 해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치질을 수치스럽게 여길 이유가 없으며, 부끄럽게 여겨서도 안 된다’라고. 항문에 생긴 질환은 신체 다른 부위에 있는 그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고. ‘어떤 질병을 앓더라도 창피해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말이 필요하다.

 

글쓴이 소개

다리아 _ 다른몸들(준)의 질병서클 “질병과 함께 춤을”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