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작은 것들은 꿈을 꾼다
[연재] 질병과 함께 춤을
떠난 후에 남는 표정과 한숨, 웃음과 미소
녹취를 풀다 보면 어느 순간 누군가의 말이 별처럼 떠오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주의 깊게 듣는다는 것은 한 사람의 내면으로 들어가기 위한 통로이다. 녹취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한 글자 한 글자를 메워가는 것에 사람들이 지었던 표정과 한숨, 웃음과 미소가 담긴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지는 것들, 그러나 어떤 표정은 내내 가슴 속에 남아 가슴을 아리게도 아주 오래 가는 위로를 전해주기도 한다.
<질병과 함께 춤을>에 함께 하면서 나는 생애 가장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행사 기획에 참여해 보기도 하고 반상근으로 일을 하기도 하고 여러 모임에 참여하며 나는 조금씩 잘게 부서지고 있었다. 나의 내면을 가득 채우던 환청과 망상의 오랜 시간이 다른 시간의 틈입으로 가라앉았다 떠오르다를 반복했다. 때로는 아팠고, 때로는 벅찼다. 그러나 그 시작이 되는 시간은 늘 어떤 온기를 품고 있어 자그마한 짐승의 첫 배를 안은 것처럼 따스했다. 모임의 첫날, 『아픈 몸을 살다』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펼쳤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나는 질병의 세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것
질병의 세계. 질환이 의학적으로 규정되는 이상(異常)이라면 질병의 세계는 질환을 안고 사는 삶의 세계이다. 이전까지 내게는 삶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늘 변두리를 떠돌며 증상과 더불어 겨우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나를 발음할 수 있는 이름도 없었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도 없었기에, 나는 입술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었다. 모든 환청과 망상을 묻어둔 채 침묵하고 있는 사람에게 세상은 무섭도록 차가웠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본다. 세상에서 자주 미끄러졌던 것은 내가 나로 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가난했으나 가난하지 않은 척, 조현을 앓고 있으나 아닌 척,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나 이외의 다른 척도에 맞추어 나 아닌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은 아닌지. 그래서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현실을 살고 있는 듯 공허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의 이야기가 없는 삶은 끝내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금세라도 바스러질 것같이 위태롭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이지 못하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내 삶에 분명히 있지만 없는 것으로 여겼던 영역 중 하나가 질병이었다. 그것은 쉽게 이야기될 수 없는 것이었다. 사회적 자원이 취약한 사람에게 ‘정신병자’라는 낙인은 무서운 것이었고 자칫 소외와 고립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나를 이해받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정하게 다가와 주는 사람이 있어도 왠지 모를 부담감으로 밀어내고는 했다. 언제 웃어야 할지 언제 울어야 할지도 모르는 꽉 막힌 삶.
수신 확인 : 질병 세계로부터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그러다 질병 세계로의 초대장을 받은 것이다. 그 세계에서는 나의 질병을 권리라고 말했다. 질병은 이야기될 가치가 있으며 그것은 질병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책임이라고까지 했다. 어리둥절했다. 아무런 가치가 없이 쓰레기처럼 버려지던 삶에 한 줄기 빛이 스몄다. 나의 이야기가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져 그것이 그/그녀에게 힘이 되고 용기가 되어 준다는 것은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다른 질병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두 주마다 모이는 모임에서는 항상 먹을 것이 있었고 음식을 나누면서 나누는 대화는 사뭇 진지했다. 온몸의 힘을 그러모아 연극 워크숍을 했고 그러면서 조금씩 풀려나기 시작한 말들은 활자가 되었다. 매번 모임이 끝날 때마다 내게는 작은 도꼬마리 하나가 붙어 왔고 나는 진심을 다해 그 작은 풀씨가 싹을 틔울 비옥한 토지가 되고 싶었다.
붙잡아 주고 싶었나 보다. 질병으로 인해 불안하게 흔들리는 삶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삼켜야 했을 울음들을, 아마도 붙잡고 쓰러지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나 보다. 이제 나는, 모임의 누군가 말해주었던 것처럼 “나는 간절히 만나고 싶다고 바라던 사람들을 만나고 있”으니. 무슨 의미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곁이 되고 있었다. 단지 나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만으로.
우리는 살을 가진 존재이다
주의 깊게 듣는다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 안에서 생성되는 감각은 놀라운 것이었다. 죽음과 고통을 나누면서 우리는 서로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가려져 있는 세계 속으로. 한 마디 한 마디 그녀의 말을 이해하면서 우리는 공통의 소외와 통증을 느꼈다. 완강한 타인이 아니라 부드러운 살로 이루어진 사람의 핏자국과 발소리와 절규를 보고 들은 것이다. 그러면서 언어가 될 수 없었던 그것들 속으로 조금씩 힘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하나로 묶여 있는 공동체라는 것. 그 간헐적이고 연약한 사실이 주는 위로를 말이다. 마치 한 권의 책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고여 있는 일상이 있었고 각자의 삶에 충실한 동안 그것을 다 나누지는 못했다. 그 알 수 없는 심연이 있었기에 우리는 우리의 현재를 몹시도 나누고 싶었다. 책을 읽고 모임을 하고 연극 워크숍을 하고 합평을 하는 그동안에 우리 중에는 여러 변화를 겪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그 삶을 다 공유할 수는 없었고 그럼에도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 역시 굴곡 많은 시간을 거쳤고 그때마다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처럼 이곳에서 글을 썼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의 부서지기 쉬운 삶을 지탱해 주며 늘 어떤 염원을 담아 높이 걸어둔 솟대처럼 삶을 지켜주었다.
이 시간을 거치며 나는 나의 가면을 내려놓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삶의 시간은 째깍거리기 시작했고 이제는 내가 나로 있는 것이 편안하고 평온해졌다. 나를 들어준 이들, 그녀들로 인해 삶은 온화한 봄의 계절이 되었다. 우리가 겪은 시간이 그녀들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적어도 나의 시간은 이렇게 창조되기 시작했고,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창조해 내었다고 믿는다. 이 작은 만남에 최선을 다하면서 내가 다른 이에게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웠듯이 우리의 어느 한 부분이 영원히 세계로 열려진 문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고, 그래서 질문할 수 있는 힘과 함께 연대할 수 있는 낮고 단단한 어깨를 나누어 가졌다고, 믿는다.
내 안의 작은 평화를 꺼내어 볼 수 있는 삶이 되기까지
늘 흐릿하게 보고 흐릿하게 느꼈던 삶. 두려움과 공포로 일그러져 있던 그 삶이 내 안의 작은 평화를 꺼내어 볼 수 있는 삶이 되기까지, 나는 이 시간을 기록하고 싶다. 실체가 없었던 삶에 분명한 감각과 비유들이 돋아나는 삶의 풍경을 채록하고 싶다. 내 삶의 녹취자가 되듯 나를 더 잘 읽고 싶어지고, 그리고 현실 속에서 흔들리는 불안한 생의 위치를 가늠하며 알게 된 평형감각으로 다른 이를 붙잡아주고 싶다. 그렇게 나는 나의 방문을 열어본다.
정오의 세상과 자정의 시간에는 무한히 넓은 세계가 있고 그 세계 속의 만남에 대해 나는 좀 더 겸허해져야 한다는 것을 이제 나는 이해한다. 그 만남을 이루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리게 해야 한다는 것도. 떠돌기만 하던 내게도 따스한 시간은 있었다. 나보다 먼저 세계로 나아갔던 이들은 나의 손을 잡아주고 싶어 했다. 그들의 순수한 선의와 연민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오래전에 좌초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 얼굴을 기억하는 것은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려주는 북극성을 간직하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사랑은 나와 타인 사이에도 있지만 그 관계를 지켜주고 환경을 만들어주는 고된 노동 속에 있다는 것을 또한 깨우쳐 주었다.
별처럼 그렇게 작은 것들이
별처럼 그렇게 작은 것이 빛나고 있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꿈을 꾸게 하듯이 그 얼굴 곁에서 불안하지만 행복하게 단잠이 들었던 날들. 이제의 나는 밝은 아침의 세상으로 나아가 긴 밤에 쓸쓸한 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채집할 것이다. 밤의 어둠과 고요 속으로, 반짝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높이 띄울 것이다. 언젠가 밤늦은 한 집회에서 우리가 띄워 올렸던 풍등처럼 열기와 불을 품고 멀리멀리 날아오르라고 한낮이면 기름을 묻힌 지전을 굳힐 것이다.
가만히 울어주던 표정들. 나는 그 표정 앞에 언제나 부끄럽다. 내가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갈 표정이 있다면 이것이지 않을까. 눈물은 힘이 세다. 가장 연약하면서도 가장 큰 울림으로 사람을 뒤흔들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글썽임이다. 나의 슬픔이 아니라 다른 이의 슬픔을 위해 울어주는 눈물. 그 사소한 기적을 매일 겪으며 사는 평범한 이들의 가슴 속에서 반짝이는 심장을 꺼내 보여주고 싶다. 그 빛깔을, 그 살아 숨을 쉬는 선홍색을. 한 마디 한 마디를 기록하듯 놓치지 않고 가슴에 긴 메아리로 남기는 사람들. 앞으로의 내 삶은 그 눈동자들에 닿고 싶다. 차오르기 시작하는 눈물 속으로. 그리고 그럴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누군가에게 문을 열어 주는 환대의 기쁨을 알게 될 것이다. 돌아선 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가슴 아린 슬픔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를 다시 누군가로 살게 해 주는 시계의 태엽을 감는 일이 되어 굳어 있는 심장처럼 멈춰 있는 시간을 흐르게 할 것이다. 그렇게 이제는 내가 별들의 배경이 되어 시간의 처음을 주고 싶다.
| 글쓴이 소개 : 목우 _ 다른몸들(준)의 질병서클 “질병과 함께 춤을”에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