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서사를 온전하게 해 준 아픈몸들의 ‘공동체’
[연재] 질병과 함께 춤을
얼마 전, ‘하루’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두 시간 내내 시간여행을 통해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살리려고 애를 쓰는 주인공들의 분투를 보여준다. 나는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긴장감과 스릴은 보지 못하고, 영화 속에서 절대 그 하루를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무한히 그 장면으로 되돌아가 ‘하루’를 반복해 사는 피해자들의 삶만을 보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결국 소중한 사람을 살리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만 현실 속 피해자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 그 ‘하루’는 바뀌지 않고, 나날이 더욱 또렷해질 뿐이다.
나도 한동안 그런 삶을 살았다. 성폭력 경험은 끔찍한 후회의 시간을 낳았다. 나는 그 시간보다 조금씩 과거로 돌아가 그 날들을 낱낱이 후회했다. 그리고 결국 도달하는 것은 그 ‘하루’들이었다. 현재를 사는 것이 불가능했다. 종일 그렇게 그 전쟁 같은 시간을 살고 나면 아무런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그 시간을 과거로 흘려보낼 수 있었던 것은 그것들을 입 밖으로 내뱉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나는 그렇게 비로소 그 경험을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질병에 관한 경험은 오랫동안 직면하지 못했다. 나는 성폭력 경험으로 1년 6개월 동안 심리상담 치료를 받았는데, 그때도 온전히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이 바로 질병에 관한 것들이었다. 실제로 그 치료를 통해 공황발작이나 자살 충동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찾아오곤 했다. 나의 이야기는 일부가 채워지지 못한 채였다. 그 둘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내 삶을 구성하고 있음에도 나는 그 부분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다. 인정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의사를 통해 내 병의 치료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던 날, 갑자기 삶의 무엇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많은 것들을 극복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여전히 삐걱거리고 있었다. 삶의 서사는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였다. 나는 그 이유를 다른몸들의 “질병과 함께 춤을” 모임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2018년 ‘페미니즘으로 쓰는 세계인권선언’이라는 작업을 통해 조한진희 님을 처음 만났다. 어느 날 지나가듯 질병으로 인한 어려움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기억하고 내게 “질병과 함께 춤을”이라는 모임에 참여해 보겠느냐고 제안하였다. 질병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싶었지만, 질병 서사를 기록할 계획이 있다는 말씀에 선뜻 참여 의사를 밝히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기록하는 모임 정도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질병과 함께 춤을” 모임에서 나는 어디서도 발견하지 못한 내 삶의 일부분을 찾았다. 그곳에서 만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내가 잊었던, 혹은 잊으려 했던 내 삶의 장면들을 기억해냈다. 그들의 이야기는 내 안에 묶어두었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나는 그 고통들을, 꽁꽁 숨겨두었던 그 아픈 시간을 우리의 시간 속에 풀어놓았다. 우리들의 목소리로 우리는 서로를,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함께 울고 웃으면서 서로의 삶을 지켜봐 주었다.
질병이라는 것은 직면하기 어려웠다기보다 직면하고 싶지 않은 무엇이었다. 부인하고 싶었고,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10여 년 동안 그렇게 나의 일부가 스스로에게 외면당한 채로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 나의 일부가 우리의 모임을 통해 조금씩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내가 알지 못했던 형태의 질병과 그 질병으로 인한 어려움을 나보다 먼저 경험한 이들이 그 과정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그리고 그 나날들을 어떻게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혹은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는지를 듣게 되었다. 정신장애에 대한 편견과 맞선 경험들 속에서 나의 우울과 공황발작을 만났고, 평생을 몰랐던 질병의 이름을 비로소 알게 된 순간의 안도 속에서 내 질병을 진단받을 당시를 생각하게 되었으며, 의사들이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인 당한 통증에 대한 혼란과 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에서 내 질병의 수많은 ‘증상’들이 부인 당한 경험들을 떠올렸으며 내 질병의 ‘원인불명’(내 질병은 류머티즘이며 면역질환으로 현재까지 의학계에서는 원인불명으로 알려져 있다)이 어디서 기인했는가를 생각했다. 나 스스로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질병을 가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이 구조 속 나의 위치를 깨닫게 된 것이다. 우리가 내는 목소리가 ‘질병은 단지 불운으로 인한 무엇’이라는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이 사회의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단초가 된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했다.
우리는 조금씩 더 깊이 서로의 삶으로 걸어 들어갔다. 동시에 내 삶의 일부분은 그들의 손을 잡고 걸어 나왔다. 우리는 서로 만났고, 나도 나를, 만났다. 그렇게 나는 영영 잊으려 했던 나를 만날 수 있었다.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를 안다. 침묵하는 순간에도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 심리상담을 받을 때, 상담 선생님이 알려준 방법이 하나 있다.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이 찾아올 때 마음속에 내가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공간을 떠올리라는 것이다. 둘이서 그 연습을 아주 오랫동안 했다. 그 공간의 문을 찾고, 들어가 보고 그곳에 머무르기도 하면서 공간에 익숙해졌다. 나중에는 나 스스로 아주 자연스럽게 그 공간의 문을 열고 들어가 누웠다. 그곳에는 돌아가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셨다.
나는 나의 안전한 공간을 하나 더 찾았다. 바로 “질병과 함께 춤을” 모임이다. 우리는 서로가 힘든 것들을 극복하길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기다리고 지켜봐 주며 함께 눈을 맞춰줄 뿐이다. 그렇게 나는 아주 오래전 질병이 시작되던 시점으로부터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나는 아주 오래 화해하지 못한 나와 화해했다. 그리고 질병은 마침내 내게 삶이 되었다.
* 글쓴이 소개 _ 혜정. 다른몸들(준)의 질병서클 “질병과 함께 춤을”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