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인·장준하 등 의문사 18건, 과거사위 진상규명 접수

피해자 유가족, ‘의문사진상규명30+’ 연대체 결성 “의문사, 단순 미제사건 아니라 국가가 은폐·조작한 죽음” 이덕인 열사 유가족, 진상규명 신청만 네 번째 이 열사 아버지 “이번엔 반드시 진실 밝혀져야”

2021-03-10     하민지 기자
의문사 피해자의 유족은 과거사위가 의문사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하민지

이덕인 열사, 장준하 선생,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등 의문사 피해자 18명의 유가족이 ‘의문사진상규명30+’라는 연대체를 결성하고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아래 과거사위)에 진상규명 신청서를 제출했다.

의문사진상규명30+는 10일 오후 2시, 서울시 중구 과거사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8명의 죽음의 진실을 규명하라고 촉구했다.

의문사진상규명30+에 따르면 박정희 정부부터 김영삼 정부까지 의문사로 사망한 피해자는 총 85명이다. 의문사는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아래 의문사위)부터 2010년 1기 과거사위까지 수년간 조사됐지만 대다수의 의문사가 ‘진실규명 불능’으로 처리됐다.

의문사진상규명30+는 “의문사는 단순한 미제 사건이 아니다. 자살이나 사고사, 실종으로 은폐·조작된 공권력에 의한 타살이다. 유가족은 30년이 넘도록 진실규명만을 외쳤다. 이제는 진실이 낱낱이 밝혀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한 활동가가 '누가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나'라고 적혀있는 피켓을 들고 기자회견에 참여했다. 피켓에는 이덕인 열사의 영정사진이 있다. 사진 하민지
이덕인 열사의 아버지 이기주 씨가 '1995년 그날의 아암도!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 의문사 진실규명을 촉구합니다'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하민지

- 타살흔적, 시신탈취, 사인조작… 이덕인 의문사 진실 밝혀질까

이날 18명에는 장애빈민운동가 이덕인 열사도 포함됐다. 작년 11월 출범한 ‘이덕인 열사 의문사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아래 이덕인공대위)’와 이덕인 열사 아버지 이기주 씨는 10일 오후 3시경, 과거사위에 진상규명 신청서를 제출했다. 진상규명 신청만 네 번째다.

이덕인 열사는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11월에 의문사했다. 이 열사는 인천시 연수구 아암도에서 노점을 운영하다 인천시와 연수구청의 노점 강제철거에 맞서 싸웠다. 천여 명의 경찰과 용역을 피해 망루에 올라간 지 나흘 만에 바다 위 변사체로 발견됐다.

이 열사는 발견될 당시 상의는 벗겨져 있었고 두 손은 밧줄에 감겨 있었다. 타살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경찰 1,500여 명이 이 열사가 안치된 길병원 영안실 벽을 뚫고 난입해 이 열사의 시신을 탈취해 갔다. 강제부검 후 발표된 사인은 익사였다.

이 열사 죽음에 대한 정부 판단은 오락가락했다. 2002년, 대통령 직속기구였던 의문사위는 이 열사가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2008년 민주화운동명예회복보상심의위원회는 이 열사가 “노점을 단속한 지자체의 고유 사무”로 인해 사망했을 뿐이라며 명예회복과 배·보상심의 신청을 기각했다.

다음 해인 2009년, 1기 과거사위가 이 열사 죽음을 추가로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했지만 2010년에 1기 과거사위가 해산되고 말았다. 1기 과거사위 해산 이후 10년 만인 작년 12월, 2기 과거사위가 출범하면서 이 열사의 명예가 회복될 길이 다시 열리게 됐다.

이규식 활동가가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이규식 이덕인공대위 활동가는 기자회견에서 “이 열사는 중증장애인이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마련하고자 노점을 운영하다 처참하게 시신으로 발견됐다. 경찰은 시신을 강제탈취해 내장을 모두 들어내는 부검으로 유가족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사인은 익사로 발표됐다. 수영을 잘하던 이 열사가 익사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 활동가는 “이 열사의 부모는 아들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1인시위에 삭발투쟁까지 하느라 25년간 거리에 있었다. 과거사위는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낱낱이 밝혀 이 열사의 혼을 위로하고 유가족 가슴의 대못을 빼야한다”고 말했다.

이 열사의 아버지 이기주 씨 또한 이번엔 꼭 진상이 규명되길 원한다고 말했다. 이 씨는 “당시 인천시 측에서 내게 ‘2억 줄 테니 합의 보자’고 했다. 아들을 죽인 범죄자가 잡히지도 않았는데 합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후 아내와 함께 긴 시간을 싸워왔다. 이번 과거사위가 진실을 꼭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준하 선생의 장남 장호권 장준하기념사업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믿는다. 이번에는 반드시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규명하고 국가가 폭력을 사죄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고 말했다. 사진 하민지

- 유가족, “의문사는 공권력이 은폐·조작한 죽음”

박정희 정권 때 유신개헌운동을 준비하다 사망한 장준하 선생과 노태우 정부 당시 노조활동을 하다 사망한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의 유가족도 과거사위에 진상규명 신청서를 제출했다.

장준하 선생은 1975년 등산하다 추락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2년에 묘지를 이장하며 유골을 검시한 결과, 머리뼈에 구멍이 뚫려 있는데 다른 신체부위에서는 추락으로 인한 골절이 발견되지 않아 타살설이 제기됐다. 의문사위는 2002년에 조사를 시작했지만 ‘진상규명 불능’이라 결정했다.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은 노태우 정권의 노동운동 탄압에 맞서 노조활동을 하다 1991년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구치소에서 의문의 상처를 입고 중환자실에 입원했는데 병원 1층 시멘트 바닥에서 별안간 시신으로 발견됐다. 경찰은 영안실 벽을 뚫고 시신을 탈취한 후 강제부검을 실시했다. 이후 “박창수가 노동운동에 회의를 느껴 병원 옥상에서 투신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박 노조위원장의 시신에 상처가 하나도 없어 타살설이 제기됐다.

한편, 의문사 피해자 유가족은 1988년 서울 종로구 기독교회관에서 ‘135일 농성’을 벌여 의문사가 군대와 학교에서 양산되고 있다는 걸 처음 알렸다. 1998년에는 국회 앞에서 ‘422일 천막농성’을 진행해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유가족이 이번에 결성한 ‘의문사진상규명30+’의 ‘30’은 기독교회관에서 135일간 농성하며 의문사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촉구한 지 30년이 넘었다는 의미다. ‘+’는 이후에도 진상규명을 계속 촉구해야 하는 현실을 반영한 기호다.

이기주 씨는 기자회견이 끝난 후 과거사위에 진상규명 조사신청서를 제출했다. 사진 하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