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의선 숲길의 시작 - 신계동, 철거의 역사
[칼럼] 쫓겨나는 이들의 서울산책 - ① 경의선 숲길
경의선 숲길은 용산구 원효로부터 마포구 연남동에 이르는 긴 직선의 공원이다. 도심에 이렇게 긴 부지가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여기가 원래 철길이었기 때문이다. 1906년 개통된 경의선 철로는 경성에서 신의주로 한반도의 남북을 관통했다. 1950년 남북 분단으로 끊어진 철길 중 효창공원역에서 가좌역에 이르는 용산선 구간 6.3km를 지하로 만들면서 기존 철길 위로는 공원이 생겼다.
이곳은 원래 이름인 ‘경의선 숲길’보다 별명으로 더 자주 불린다. 가장 많은 유동인구가 오가는 연남동 구간은 ‘연트럴파크’로 불리는데 반려견과 산책하는 이들이 많아 ‘개트럴파크’라고도 한다. 공원 주변에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주점이 밀집해 도시에서 가장 ‘힙한’ 상점가로 꼽히기도 한다. 길이가 긴 공원이다 보니 구간별 특색도 있다. 연남동 구간은 길게 뻗은 은행나무와 넓은 잔디밭이 아름답고, 신촌 와우교 구간은 책거리가 있다. 대흥동과 염리동 일대에는 작은 물길과 메타세콰이어길이 있다. 새창고개는 경의선 숲길의 유일한 언덕이 있고, 시작점인 원효로(신계동)에는 옛 기차 한량이 전시되어 있다.
첨예한 이해관계의 최첨단, 공원
공원은 누구에게나 개방된 공간이라지만 지대가 비싼 도심 내 공원은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첨예하게 가른다. 공원 인근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들에게는 막대한 이익을 안기는 한편, 공원화로 인해 쫓겨나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2010년 서울시 지가지수는 90.02, 마포구 89.22, 공덕역 83.01, 홍대입구역 72.69였으나, 2016년 경의선 숲길 개통 이후 서울시 110.95, 마포구 114.23, 공덕역 132.05, 홍대입구역 170.37로 올랐다. 서울의 지가지수도 오르지만 경의선 숲길 인근의 지가는 더 빠르게 상승했다.1)
2010년 빈곤사회연대 활동을 시작하며 처음 구했던 집은 마포구 연남동 반지하 집이었다. 한 달 25만 원의 월세를 친구와 둘이 나누어 냈는데 2년 뒤 계약이 종료될 때 월세는 45만 원으로 올랐다. 결국 200m 정도 물러나 성산동의 옥탑방으로 옮겼다. 얼마 뒤 새 가족을 꾸리면서 약 300m 정도 더 밀려났다. 사무실은 효창공원에, 집은 마포에 있다 보니 날씨가 좋고 시간이 있고 더불어 머리까지 복잡한 날이면 경의선 숲길을 걸었다. 사무실에서 집까지 가면 전 구간을 다 걷는 셈이다. 약간 빠른 내 걸음으로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리는 이 숲길의 시작점에는 ‘용산 e편한세상’ 아파트가 있다.
이 아파트의 정문을 바라보면 정문 아래 있던 자그마한 텐트가 생각난다. 신계동 철거민 강정희. 1988년부터 2012년까지 20년 넘게 용산 신계동과 도원동을 오가며 살았던 그는 2004년 신계동에 수립된 ‘신계구역 주택재개발 정비사업’(아래 신계동정비사업)으로 인해 인생이 바뀌었다.
신계동은 가난한 동네였다. 저렴한 집을 찾던 그의 부모가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강정희는 처음 신계동에 오게 됐다. 스물네 살 때, 도망치듯 결혼을 했다가 3개월 된 갓난아기를 안고 돌아온 곳도 이곳 신계동이었다. 절두산 성지 성당 수녀님들께 아기를 맡기고 보험부터 노점상, 부업까지 안 하는 일 없이 악착같이 살았다. 판잣집이 즐비했지만 살기는 나쁘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이면 큰 정자나무 아래 동네 할머니와 아이들이 돗자리를 펴고 모여 앉아 있었다. 밤중에도 서로 들러 커피 한 잔 얻어먹고 밥상에 숟가락 하나 보태는 일이 예사인 동네였다. ‘살려고 발버둥을’ 치던 젊은 날에도 아장아장 걷던 딸과 산책하던 슈퍼 앞, 올망졸망 아이들이 뛰어다니던 마을 계단과 놀이터에 대한 정겨운 추억이 남은 것은 이웃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개발은 이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어느 순간 용역깡패들을 몇십 명씩 풀어서 밤낮으로 활보하고 다니게 하니까 견딜 수가 없는 거지. 빨간 락카로 막 험악한 말을 써놓고, 한 집이 비었다고 하면 바로 부숴버리고… 집 하나 비워지면서 그때부터 공포가 시작됐던 것 같아요.”
집 하나 비워지면서, 그때부터 공포가
신계동정비사업은 2004년에 구역이 지정되고 2006년에 사업시행인가가, 2008년 관리처분인가가 났다.2) 이 말의 뜻은 2004년 재개발 구역이 지정된 날 3개월 전부터 살고 있었던 세입자에게만 이주비 및 보상대책이 있다는 것, 2008년 이후부터 법원의 집행명령에 따라 철거 등의 강제집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계동의 경우 이런 합법적 절차가 적용되지 않았다. 2004년 구역지정 직후부터 ‘재개발 조합’은 구역 내 땅을 마구잡이로 구입했고, 구입한 땅에 살고 있는 세입자들을 퇴거시켰다. 용역깡패와 철거반들을 동네에 투입해 가로등을 깨고,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빈집이 생기면 재빨리 무너뜨렸다. 이미 2006년쯤에는 주민 대부분 스스로 지역을 떠나버렸다.
강정희는 떠날 수 없었다. 20년 전 넘게 신계동에 살았지만 길 건너 도원동으로 이사를 갔다가 다시 신계동으로 돌아온 시점이 구역지정 시점을 몇 개월 초과해 ‘비해당자’였기 때문이다. 갈 곳도, 돈도 없었다. 무엇보다 살고 있는 사람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서 내쫓아야지 윽박질러 쫓아내는 것은 옳지 않았다. 퇴거 압박이 다가올수록 무서웠다. 아랫집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폭언 폭행은 비일비재하고. 그 공포… 나도 솔직히 무서웠지. 공포스럽지 밤에. 집은 여기저기 하나둘 비워져 가는데 갈 곳은 없고. 딸내미는 그때 딱 중학교 삼학년인가, 고등학생인가 그런데 용역깡패가 뒤쫓아오면서 ‘그래, 니 딸 이쁘더라, 이사 안가면 니 딸 콱 어떻게 해버린다’ 하면서. 그런 공포스러운 말을 할 때도 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이 들었지). 고양이를 죽여서 대문 앞에 매달아 놓고, 쥐를 죽여서 바닥에 깔아놓고 그랬던 날들… 우리집 담벼락에다가 왕그지네집 막 이렇게 써놓고. 내가 ‘선대책 후철거’ 이런 플랭카드 써서 걸어놓으면 다 떼어버리고.”
장 본 것도 하나도 해 먹어보지도 못하고
부모님조차 결국 이사를 갔지만 강정희는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2008년 8월 1일 그의 집이 철거되었다.
“7월 29일인가 법원에서 안내장을 받았어. 8월 15일에서 20일 사이에 내 집에 대한 판결이 난다고 했어. 가옥주들이 소송을 걸었거든요, 조합원들이 (나가라고) 소송을 걸었잖아. 그런데 재판 판결이 그때 날 거라고 날아오더만요. 언제 집을 철거 당할지 모르고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집도 못 치우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살다가, 그걸 받아 가지고 딸내미하고 야, 우리 시장 보러 가자. 한 이십 일은 그래도 살 수 있겠다. 장도 봐 놨어. 먹고 싶은 것 사라 하고 나도 장보고… 그거 장 본 것도 하나도 해먹어보지도 못하고, 대청소도 다 해놓고 고스란히 당했지, 철거를.”
그는 지금도 이따금 그때 일어났던 일들이 꿈은 아니었을까 되짚어본다고 했다. 정말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었나, 왜 그런 일을 당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걸까. 철거민이 되고 난 뒤 떠오르는 몇 가지 기억이 있었다. 하나는 도원동 철거민들의 망루다. 98년쯤 신계동 맞은편 도원동으로 이사를 갔다. 조금 더 말끔한 동네였다. 아침에 창문을 열어보면 망루에 철거민이 보였다. 그 자리에는 2001년 도원 삼성 래미안 아파트가 생겼다. 또 하나는 강정희의 고향 전라남도 영암이다. 맑은 날이면 유달산이 보이던 강정희의 동네에 대불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서며 갯벌은 흙으로 메워지고 마을은 사라졌다. 그렇게 온 가족이 서울 신계동에 오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쫓겨남의 연속이었다. 돌이켜보니 누군가는 늘 싸우고 있었다. 그러니 ‘절대 남의 일이 아닌 거’고, ‘언젠가는 누구라도 그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거’를 생각해야 한다는 강정희는 싸우면 조금 변할 줄 알았는데 ‘크게 변하지 않는 사회 때문에 화가’ 난다. 지금은 시골에 내려가 곤충도 키우고 밭을 일구지만 철거의 폭력과 몸에 아로새겨진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잠을 편하게 누워서 못 자요. 나도 모르게 자다가 앉아서 이렇게 잠이 깨서 보면 앉아서 졸고 있어. 노숙투쟁을 했기 때문에 그때 용산구청에서도 편하게 못 자고 늘 긴장 속에서 살다가 밤에는 잠다운 잠을 못 자잖아요. 노숙이니까. 거기서 했던 게 몸에 배어 가지고 지금도 (그래요) 깊은 잠을 못 자고 늘 불면증에 시달리고, 그것도 하나의 트라우마가 아닐까 싶죠. 그리고 버리지 못하는 병. 내 가재도구를 다 (철거로) 털렸기 때문에 이거를 함부로 못 버려.”
“그런데 도대체 납득이 안 가. 아직도. 내 가재도구를 실어다 어디다 놨을까? 한 번쯤 의문을 품어 봐. 합의할 때 그것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는다는 조건을 넣더라구. 지금도 가끔 ‘얘네들이 내 가재도구를 어디다 실어다가 어디다 어떻게 버렸을까? 보관하기는 했었을까?’ 그런 의문점이 들 때가 많지.”
발 딛는 곳마다 쫓겨나는 자리
서울의 아파트가 있는 자리면 어김없이 누군가는 이곳에서 쫓겨났다고 보아도 좋다. 개발은 애초에 덜 가진 사람들을 탈락시키는 일이다. 세입자에게만 이주비 등을 준다지만 2년의 거주만 보장하는 임대차 보호법이 있는 나라에서 5년 혹은 10년이 넘게 걸리는 공사 착수 전까지 주소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세입자는 많지 않다. 게다가 재개발 조합은 보상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개발 단계와 상관없이 세입자를 마구잡이로 내쫓기가 예사다. 가옥주 중에서도 가난한 가옥주는 세입자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새 아파트에 들어가려면 분양권뿐만 아니라 추가 분담금을 내야 하는데, 이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아파트값이 오르는 대로 큰돈을 벌지만 이를 낼 여력이 없는 이들은 분양권을 포기하고 낮은 보상금을 받아들이거나, 헐값에 분양권을 판다. 개발 게임의 승리는 가장 강한 사람, 가장 돈이 많은 이들에게 돌아가도록 정해져 있다.
신계동에는 ‘바람골’이 있었다. 마을 슈퍼집 앞 계단을 올라 언덕을 돌면 저 멀리 삼각지까지 보이는 높다란 터를 만나는데, 언덕 아래부터 바람이 회오리를 치며 올라와 항상 찬 바람이 맴도는 곳이었다. 한겨울에 그곳을 지날 때면 여지없이 옷깃을 여몄다. 어서 따뜻한 집으로 가자는 생각을 불러오던 그 언덕은 이제 사라졌다. 높고 낮은 지형과 골목은 맨맨하게 펴져 아파트 몇 동으로만 구분된다. 계단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위치에는 가짜 돌로 만든 폭포와 터널이 있다.
강정희가 떠나고 신계동에 지어진 이 아파트의 가장 작은 평형인 59제곱미터는 분양 당시 약 3억 후반이었다. 2011년 입주가 시작된 뒤 대략 6억으로 거래되다가 2017년 8억 이상으로 뛰었다. 2018년에는 10억이 넘었고, 가장 최근 2021년 거래는 14억 7천만 원에 이뤄졌다. 이 이야기를 듣고 강정희는 ‘삶에 회의가 드네’라며 웃었다. 신계동에 개발이 한창이던 2005년 지역 국회의원이었던 진영은 재개발 조합을 방문했다. 그의 홈페이지에는 여전히 그날의 기록이 남아 있다.3) 국회의원 진영 홈페이지에 남은 작은 신계동 사진에는 우연히도 강정희의 집 앞이 찍혀 있다. 2008년 철거된 집 앞 골목과, 아이가 더 어릴 때 살았던 놀이터 앞 집.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15만 원을 내고 작은 집에 살던 이웃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더 열악해졌겠지, 더 나쁜 곳으로 갔지. 그저 그렇게만 알고 있다. 지역구 국회의원의 방문을 맞이한 재개발 조합 조합장은 납품비리로 인해 2011년 구속4)된다. 용산구청 간부는 인허가권을 빌미로 분양권을 받은 혐의를 받았다.5) 강정희는 개발 과정에서의 폭력에 대해 사과를 듣고 싶었지만 이들로부터 단 한 번의 사과도 받지 못했다.
“우리가 마을을 꾸미고 살잖아. 내가 가꾼 마을이었잖아. 빗자루질 한 번을 해도 내가, 사는 사람들이 하지. 마을에 꽃이 피게끔 하는 게 안에 사는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주어진 삶을 그냥 최선을 다해서 살았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개발이라는 그 이름 하나, 관리처분 하나 하면서부터 온 동네를 다 들쑤시고 삶을 파괴시키지. 사람들이 자살을 하게 만들고, 야반도주하게 만들고, 땅바닥에 앉아서 투쟁하게 만들고. 내가 우리집에서 가재도구 하나를 사더라도요, 숟가락 하나 사려 해도 만져보고 이거 살까 저거 살까 심혈을 기울여서 사거든요, 수저 하나 사려고 해도. 내 형편에 이거 맞을까? 좀 더 싼 거를 봐볼까? 만져보고 골라서 내 가재도구가 되는 건데 그런 거를 말 한마디 없이 통째로 쓸어갔잖아. 그래 놓고 우리에게 ‘생떼거리’6)를 쓴다는 소리나 하고.”
철거민들은 서로의 이름을 동네 이름으로 부른다. 강정희는 신계동 정비사업과 함께 ‘신계 강정희’가 되었다. 지나가다 신계라는 글자만 봐도 고개가 돌아가지만 ‘내 이름 같고 그러면서도 기억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신계 강정희’의 이야기로부터 경의선 숲길 탐방을 시작한다. 6.3km에 이르는 이 공원에는 현재 기준 32개의 아파트 단지7)가 인접해있다.
▷ [부록 _ 인터뷰] 68년생 ‘신계 철거민’ 강정희, 소금꽃 희망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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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신문] 국유지에 모인 ‘도시난민’… 개발 걸림돌인가, 공유 주춧돌인가, 기민도기자 (2019.6.3.)
2) 서울특별시용산구고시 제2008-8호 ‘신계구역재개발정비사업 관리처분계획인가’ (2008.1.25.)
3) 신계동 재개발조합 방문, 진영 홈페이지, http://www.chinyoung.kr/pr/media/2741/page/69
4) [뉴시스] 검찰, 용산 재개발비리 조합장 등 3명 구속, 이예슬기자 (2011.11.27.)
5) [kbs]검찰, 용산 신계지구 재개발 조합 압수수색 (2011.11.8.)
6) 용산구청에서는 2008년 당시 구청 담벼락에 “구청에 와서 생떼거리를 쓰는 사람은 민주시민 대우를 받지 못하오니 제발 자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대형 경고판을 달아두었다. 이는 2007년부터 2009년 1월 용산참사가 일어나던 때까지 2년 이상 달려있었다.
7) 200미터 이내, 100세대 이상 아파트단지 (2021년 3월 현재 기준)
○ 참고자료
진영 홈페이지 http://www.chinyoung.kr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 https://rt.molit.go.kr/
국토지리정보원 http://luris.molit.go.kr/
서울의 공원 https://parks.seoul.go.kr/
○ 도움주신 분
‘신계 철거민’ 강정희
김윤영의 쫓겨나는 이들의 서울산책
빈곤사회연대에서 활동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여러 도시에서 자랐다. 가난한 이들을 쉽게 쫓아내고, 머문 자리마저 빠르게 지우는 도시에 애증이 있다. 서울 곳곳에 스며든/지워진 역사를 되돌아보고, 가난한 이들이 빼앗긴 공간과 권리에 대해 돌아보는 ‘다크투어 칼럼’을 한 달에 한 번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