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68년생 ‘신계 철거민’ 강정희, 소금꽃 희망꽃

[칼럼] 쫓겨나는 이들의 서울산책 - ① 경의선 숲길 _ 부록

2021-03-22     김윤영
2011년 9월 5일, 용산구청 앞 신계철대위 천막. 천막 앞에서 오른쪽 주먹을 들고 투쟁을 외치는 강정희 씨가 밝은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철인85호 크레인’이라고 적힌 밝은 파란색 티셔츠와 검은색 조끼를 입고 있다. 사진 빈곤사회연대

(앞의 글 ▷ 경의선 숲길의 시작 - 신계동, 철거의 역사

68년생 강정희. 자그마한 키에 하이톤 목소리, 다부진 손을 가진 그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참 좋아했다. 2008년 집이 무너지고 2009년 용산참사가 발생했다. 용산참사 당시 망루에 함께 올랐다가 구속된 동료를 대신해 2010년과 2011년 홀로 용산구청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2011년 여름에 강정희와 함께 나는 부산으로 향했다. 한진중공업 김진숙 지도위원이 오른 85호 크레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예전에 부산에 살았던 적이 있는데 갑자기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재밌는 일이었다. 부산에 산 적이 있는데 그 일을 잊었다는 게. 이번 인터뷰를 진행한 이후에야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그는 과거를 회상할 만큼 한가한 적이 없었다. 먹고살기 위해, 아이와 스스로를 건사하기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아득바득 살았다. 한눈팔 시간이 없었다.

십 대의 강정희에게 부모님은 집에서 동생들을 돌보다가 스무 살에 시집을 가라고 말했다. 배우고 싶은 열망이 컸던 강정희는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부산으로 떠났다. 태광산업에서 3교대로 실을 뽑으며 야간학교에서 공부했다.

“불량 조금만 나면 막 (혼나고) 맨날 그런 기억이 나. 이게 어디로 수출 나갈 그거니까 잘해야 된다고 했던 그런 기억이 나. 나중에 알았지, 우리가 그때 노동력을 어마어마하게 착취를 당했구나. 월급도 주야로 밤낮으로 해도 십구만 원도 안됐으니까. 그 돈가지고 또 학교 다니고. 학교에 공부하느라 납부금 내야지, 또 우리대로 생활도 해야지, 기숙사비도 내야지. 그 월급 가지고 시골에 조금 보내고 동생들이랑 부모님한테 보내고 나면 남는 게 없었지. 그렇게 삼 년을 살았던 것 같아. 또 그렇게 살라고 하면 살 수 있을까?”

용산구청에 있던 강정희의 천막 앞에는 ‘철거민도 사람이다’, ‘주거권을 보장하라’ 같은 글씨와 함께 ‘소금꽃 희망꽃’이라는 글씨가 적혀있었다. 어떤 의미일까.

“우리가 옷을 입고 막 열심히 일을 하다 보면 땀방울이 맺혀서 (등에 하얗게) 소금꽃이 피잖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소금꽃나무인 거지. 우리의 소금꽃들이 (철거로) 다 밀려나서 쫓겨나고 있다는 거. 그런 마음 때문에 썼던 거 같아요. 참 희망버스를 타면서도 많은 것을 배웠고, 김진숙 동지의 ‘소금꽃나무’ 책을 통해서도 그랬고. 아 우리가 다 소금꽃이구나. 우리 열심히 사는 한 사람 한 사람 개인들이 다 소금꽃이었구나, 그런 걸 느꼈죠.”

철거민이 되어 투쟁하러 부산에 다녀오니 잊고 살던 기억이 주르륵 쏟아졌다. 87년 학교 언니들과 함께 6월 항쟁의 서막을 열었다. 서면에서 학교까지 향하던 길에 가득한 매캐한 최루탄 냄새와 비 오는 날 거리에서 나누어 먹던 주먹밥, 순진하게도 학교 체육복을 입고 집회에 참석했다가 선생님에게 ‘디지게 혼났던’ 기억이 고구마처럼 딸려 올라왔다. 그런 강정희에게 소금꽃나무는 특별했다. 김진숙을 만나 잊었던 기억이 떠오르고, 그의 책 ‘소금 꽃나무’를 통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소금꽃나무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2011년 9월 5일, 용산구청 앞 신계철대위 천막 앞에서 만난 강정희 씨와 필자. 사진 빈곤사회연대

2018년 12월, 마포 아현동에서 철거민 박준경이 목숨을 끊었다. 마포구청 앞에서 한 달이 넘게 이어지던 농성장에 어느 날 강정희가 찾아왔다. 따뜻한 떡을 가득 건넸다. 박준경의 소식을 들은 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어 무작정 떡을 맞춰 올라왔다고 했다. 박준경을 이야기하며 강정희는 다시 많이 울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가더라고. 나도 자살하고 싶었으니까. 죽고 싶었어 진짜…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어땠을까. 그래도 살지, 그래도 좀 살지. 철거민으로서 그 마지막 순간을 택했던 그때의 그 마음, 내가 겪었던 그 마음… 혼잣말을 많이 하게 돼요. 아직도 안 변했구나, 변한 게 아무것도 없구나.”

투쟁은 고단했지만 삶은 더 팍팍했다. 특히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고 한다. 함께 투쟁하던 동지들은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보기 어려워 멀리했고, 싸우는 이들이 어떤 일을 겪는지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은 미웠다. 어떤 사람은 ‘미련하게 그런 짓을 왜 했냐’고 물어 속에 기름을 부었고, 어떤 사람은 ‘그래서 얼마나 받았냐’라고 해 불을 붙였다. 이 아픔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 속에서 살 수 없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삶과 존엄, ‘싸우면 법이 바뀔 줄 알았’다는 희망이 그를 투쟁하게 했지만 세상은 빨리 변하지 않았다.

귀농을 한 강정희는 다시 사람들 사이에 섰다. 귀농 9년 차로 마을 주민들과도 제법 어울리게 되었고, 이제는 농민회 활동도 한다. 87년 노동자에서 용산참사의 철거민을 지나 농민회까지, 이채로운 운동 경력이다. 변해가는 세상 속에 ‘곤충 식품’이 대안이 될 것이라는 야망을 품고 곤충도 기른다. 지난해에는 대학에 진학해 이제 2학년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더 많은 배움을 위해 홀로 부산행을 감행하고, 돌도 안된 갓난아이를 키우며 마늘까기부터 노점까지 안 해본 일이 없고, ‘면허를 따면 돈을 더 벌겠구나’ 싶어 운전에 도전하고, 이제는 곤충으로 장래를 그리는 진취적인 그이지만 철거 투쟁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개발과 이에 따른 이윤을 독점하는 이들의 카르텔은 너무나 견고하고, 이들이 휘두르는 폭력은 법과 권력에 의해 너무 쉽게 비호받았다. 강정희의 마음에 남은 상처는 바로 이 집단적인 외면에 대한 것이다. 화해할 수 없는 과거를 안은 이들을 동시대에 두고 우리는 어떻게, 어디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걸까.

깨어졌다 다시 여문 속을 안고 ‘아무리 그래도 사람은 사람 사이에 살아야’한다는 강정희의 말은 그저 생각이 아니라 선언처럼 들린다. 세상에 대한 신뢰는 깨졌고 상처도 받았지만, 그래도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겠다는 소금꽃 강정희의 선언이 희망꽃이겠다. 강정희가 받지 못한 사과를 언젠가 받기 위해서라도 우선은 기억해야 한다. 나에게 강정희는 쫓겨난 이들의 자리로 서울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2011년 9월 5일, 용산구청 앞 신계철대위 천막. 천막에는 “신계동 철거민 2세대 주거생존권 보장하라” “소금꽃 희망꽃” “철거민도 사람이다. 인간답게 살 권리. 천막에 전기라도 공급하라” 등의 문구가 쓰여 있으며, 천막 앞에는 촛불이 놓여 있다. 사진 빈곤사회연대

 

김윤영의 쫓겨나는 이들의 서울산책

빈곤사회연대에서 활동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여러 도시에서 자랐다. 가난한 이들을 쉽게 쫓아내고, 머문 자리마저 빠르게 지우는 도시에 애증이 있다. 서울 곳곳에 스며든/지워진 역사를 되돌아보고, 가난한 이들이 빼앗긴 공간과 권리에 대해 돌아보는 ‘다크투어 칼럼’을 한 달에 한 번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