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권리협약 선택의정서 비준 이후, 실효성 갖추려면
장애계의 13년 요구에 국회 응답… 정부도 “올해 안 비준 노력” 비준 실효성 있으려면 개인진정제도 지원, 장차법 개선 등 필요
장애계가 13년간 끈질기게 요구한 유엔장애인권리협약(아래 협약) 선택의정서 비준이 올해 안에 이뤄질 분위기다.
국회가 나섰다.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3월 31일, 74명의 국회의원과 함께 선택의정서 비준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대표발의했다. 정부도 긍정적이다. 외교부·보건복지부는 10일 오후 2시 서울시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선택의정서 실효성 보장을 위한 토론회’에서 비준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부가 선택의정서에 비준하면 협약 당사국 국민은 권리를 침해당했을 때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아래 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개인진정제도’를 활용할 수 있다. 또한 위원회가 당사국의 차별행위를 직접 조사할 수 있는 ‘직권조사’를 시행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2007년에 협약에 서명했고 다음 해에 국회에서 비준했지만, 선택의정서 비준은 미루고 13년을 보냈다.
즉, ‘국가가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겠다’는 국제조약에 서명은 해놓고 ‘차별할 경우 조사받고 책임지겠다’는 부속문서에는 서명하지 않은 것이다. 이동석 대구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정부가 위원회의 직권조사권에 대한 부담 등을 이유로 선택의정서 비준을 유예했다”고 설명했다. 선택의정서는 전 세계 96개국이 비준했다.
김미연 위원회 부의장은 “대다수 국가는 협약과 선택의정서를 동시에 비준했다. 협약이 국가가 장애인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이행해야 하는 내용이라면 선택의정서는 협약내용을 살아있는 권리로 만드는 것이다. 선택의정서에 비준하는 것은 성숙한 인권국가로서의 약속이다”라고 말했다.
선택의정서 비준이 장애인의 삶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여러 가지 제도가 필요하다. 장애인이 개인진정제도에 잘 접근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책도 필요하다. 또한 위원회의 장애인 차별 시정 권고가 무겁게 받아들여지게 할 구속력도 있어야 한다. 같은 차별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모니터링도 필수다.
10일, 국가인권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선택의정서 실효성 보장을 위한 토론회’에서는 이 같은 방안이 논의됐다.
- 소수자 차별 정책 바꿀 수 있는 힘, 개인진정제도
현재 한국에서 개인진정제도를 이용할 수 있는 국제조약으로는 인종차별철폐협약, 자유권규약, 여성차별철폐협약, 고문방지협약 등이 있다. 장애인권리협약 선택의정서가 정하는 개인진정제도와 동일하다. 다른 조약의 개인진정제도가 활용된 사례를 살펴보면 장애인권리협약 선택의정서 비준 시 어떤 장점이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자유권규약의 개인진정제도가 많이 활용됐다. 김기남 사단법인 아디 변호사는 “이 사례 중 대다수가 양심적 병역거부 건”이라고 말했다. 대체복무제가 실현되기 전, 한국은 병역거부자를 법정구속했다. 이 때문에 많은 병역거부자가 자유권규약 개인진정제도를 통해 진정서를 제출했다. 국내법으로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수많은 병역거부자가 ‘병역거부자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는 결정례를 받았다.
헌법 6조에 따르면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지닌다고 돼 있다. 구속력은 없지만 국내법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 이동준 외교부 인권사회과 과장은 병역거부자가 받아온 결정례가 국가제도를 바꾸는 데 중요한 힘으로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이 과장은 “자유권규약 진정사례에서 외교부 관련 진정내용은 한국에 대체복무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진정이 쌓여, 2018년에 대체복무제를 병역에 포함하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국회에서도 대체복무제를 포함하는 병역법 개정안이 통과됐고 작년부터 대체복무제가 시행됐다”고 말했다.
또한 개인진정의 결정례는 국내에서 소수자가 더 잘 싸워가기 위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국내에서 일하는 한 외국인 강사가 HIV 테스트를 강요받은 사례가 있었다. 그는 인종차별철폐협약의 개인진정제도를 통해 진정서를 제출했고 ‘차별’이라는 결정을 받았다. 이를 근거로 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진행했는데 1심에서 승소했다.
- 비준 실효성 있으려면 개인진정 절차 지원책 마련해야
정부가 선택의정서에 비준해 개인진정제도를 활용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 제도가 실효성이 있으려면 국내의 여러 가지 제도가 바뀌거나 새로 생겨야 한다. 토론자들이 제시한 것은 △개인진정 절차 지원 △위원회 권고 이행에 구속력을 더하기 위한 국내법 개정 △권고이행 여부를 감시하는 모니터링 △권리구제하는 국내법 개정 및 제도변화 등 크게 네 가지다.
우선 장애인이 개인진정제도를 통해 진정서를 제출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 이동석 교수는 “먼저 언어의 장벽이 있다. 영어로 진정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이를 위해 “법률구조공단과 같이 개인진정을 지원하는 장치를 마련하되 장애인단체가 직접 지원할 수 있도록 위탁하는 방안이 필요하다”라고 제안했다. 현재 여성차별철폐협약에서는 여성단체 등 시민사회단체가 개인진정을 지원하고 있다.
이용석 한국장애인연맹 정책실장은 개인진정 지원에 관한 역할을 세분화했다. 이 정책실장은 “진정인을 발굴, 기초상담을 통해 진정 적격여부를 판단은 현장에서 장애차별 문제를 많이 접하는 장애인단체가 맡을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진정서 작성, 접수 등 사무적 절차는 인권위 같은 국가기관에 맡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권위법에 개인진정 지원절차를 규정하는 근거조항이 마련돼야 할 것”이라 덧붙였다.
이동석 교수는 이에 더해 “다양한 유형에 맞는 지원절차도 필요하다. 정신장애인의 경우 성년후견인을 통한 대리의사결정 제도가 아니라 조력의사결정제도로 전환돼야 한다. 발달장애인의 의사소통 지원을 위한 진술조력제도,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어 및 문자통역 등이 활성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위원회 결정 무시 할 수 없도록 구속력 갖춰야
헌법에 따르면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지닌다. 하지만 국내법만큼의 구속력은 없다. 장애인 차별을 당한 피해자가 위원회에 진정을 넣어 차별이라는 결정을 받더라도 국가가 이를 무시하면 차별은 개선되지 않는다.
실제로 작년 7월, 유엔 인권 최고대표사무소는 “변희수 전 하사의 강제전역은 일할 권리와 성정체성에 기초한 차별을 금지하는 국제인권법 위반”이라는 결정을 내렸지만 법원, 국방부, 육군본부 모두 이 결정을 무시했고 변 전 하사는 지난 3월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동석 교수는 결정이행을 위한 후속 절차법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국제권리협약 선택의정서 개인진정제도에 따른 결정이행 절차법’ 등을 제정할 수 있다. 법에는 위원회의 결정을 이행하는 방안과 구제절차에 대한 내용이 포함돼야 한다. 나아가 결정에 따른 국내법원의 재심이나 국가의 배상까지 절차를 마련해야 선택의정서 비준이 실질적으로 효력이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동석 교수는 국가가 위원회의 결정을 잘 이행하는지 모니터링하는 집행기구를 신설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위원회 결정에 더 큰 구속력을 더하기 위해서다. 2009년에 선택의정서에 비준한 독일의 경우 한국의 인권위와 같은 ‘인권연구소’에 장애인권리협약을 모니터링하는 별도의 팀이 있다. 단순히 위원회 결정 이행에 관해서만 모니터링만 하는 게 아니라 독일 내 여러 판결에 논평을 내는 등 장애인 권리를 총체적으로 연구한다.
김성호 국회 입법조사처 법제사법팀 조사관은 “2019년에 독일연방헌법재판소에서 중증장애인이나 치료감호소에 수감된 장애인의 선거권을 제한하는 법이 헌법에 위반된다는 결정이 있었다. 인권연구소의 모니터링 팀은 장애인의 참정권을 보장하기 위해 앞으로 어떤 과제가 있는지 논평과 보고서를 냈는데 거기에는 유관부서의 책임과 의무까지 명시돼 있었다”며 모니터링 활동이 장애인 차별개선에 많은 기여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개인진정제도는 국내의 구제절차를 모두 거쳤는데도 차별이 개선되지 않을 경우 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할 수 있다. 따라서 국내 장애인 차별 구제절차도 바뀌어야 한다.
이동석 교수는 국내 구제절차의 개선을 위해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아래 장애인차별금지법)의 개정을 제안했다. 장애인차별금지법 48조에는 장애인 차별이 발생할 경우 손해배상, 법원의 구제조치 등 사법적 구제를 받을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2008년에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시행된 이후 차별구제 청구건은 14건에 불과하다. 그중 시정조치로 인용된 사건도 7건뿐이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를 상대로 한 구제조치는 단 한 건도 인정되지 않았다. 이 교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인권위의 시정권고를 이행하지 않을 시 시정명령 의무집행 등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