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 정신 그리고 사이보그

[칼럼] 의학이 장애학에 건네는 화해 아빌리파이, 매드프라이드 그리고 화학적 사이보그 ②

2021-06-24     유기훈

▷ [전편] ① 내가 너를 가능하게 하리라 - 아빌리파이의 탄생

그렇다면 ‘정상성’이라는 목표가 사라진 매드프라이드의 세상 속에서 정신과 약물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며, 약물을 복용하는 행위가 갖는 윤리적 문제는 무엇일까. 만약 정신과 약물 복용이 지금의 나와는 ‘다른 나’를 만든다면, 이는 현재의 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닐까? 정신과 약물로 인해 ‘바뀐 나’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진짜 나’ 혹은 ‘원래의 나’에 대한 기만인 것은 아닐까? 쉽게 답하기 어려운 이러한 의문들의 끝에서, 우리는 ‘정신장애에서 약(藥)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보다 근본적 질문에 맞닥뜨린다.

이러한 난제들을 풀어나가기 위해, 우선 신체장애에 대한 약물 투약의 이야기부터 시작해보고자 한다.

- ‘신체장애’에서의 약물과 휠체어

많은 신체장애 당사자들 또한 다양한 약물을 투약한다. 뇌성마비를 지닌 당사자가 흔히 복용하는 근이완제인 단트롤렌(Dantrolene)이라는 약물을 생각해보자. 단트롤렌은 근육세포의 근소포체(sarcoplasmic reticulum)에 작용하여 근육 수축을 막는데, 이를 통해 장애 당사자는 근육이 뻣뻣해지는(spastic) 몸의 상태를 보다 유연하게 변형시킬 수 있다. 만약 근육의 강직이 진행되어 기존에 사용하던 휠체어에 앉기 어려워지는 상황이 생기는 경우 – 즉, 휠체어와 몸 간의 결합이 어려워지는 경우, 근이완제는 당사자의 몸과 휠체어 사이의 틈을 메워 다시 몸-약물-휠체어 간의 새로운 결합을 형성한다.

이때 주목할 점은, 휠체어와 근이완 약물은 너무나 다른 형태를 지녔고 서로 다른 공간에서 작동함에도 불구하고, ‘뇌성마비 당사자의 몸을 재구성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즉, 나의 근육을 ‘바깥으로부터’ 기계와 결합시키는 수단이 휠체어라면, 근이완과 수축의 정도를 ‘내부로부터’ 변화시켜 약물과 결합된 새로운 몸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투약이라는 실천일 수 있는 것이다.

왼쪽에는 알약이 있고, 오른쪽에는 휠체어가 있다. 나의 근육을 ‘바깥으로부터’ 기계와 결합시키는 수단이 휠체어라면, 근이완과 수축의 정도를 ‘내부로부터’ 변화시켜 약물과 결합된 새로운 몸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투약이라는 실천일 수 있다. 

그동안 장애학(disability studies)에서는 장애인의 휠체어/인공보철 사용을 기존의 인식을 뛰어넘어, 기계와 몸의 결합을 통한 ‘사이보그로서의 몸’을 만들어나가는 적극적 실천으로 받아들일 것을 제안하여 왔다.1) ‘사이보그’로 결합된 몸속에서 기계·테크놀로지와 유기체의 경계는 모호해지고,2) 휠체어나 인공보철은 일종의 ‘확장된 몸’의 지위를 획득한다.

단지 결합의 수준만 차이가 날 뿐 약물이 휠체어와 마찬가지의 역할을 한다면, 우리는 약물과 몸의 결합을 상상하지 못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정상/비정상을 나누는 ‘치료’라는 프레임을 넘어, 장애 당사자가 투약하는 약제 또한 몸에 대한 또 하나의 적극적 실천이자 ‘사이보그가 되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일까?3) 우리가 자신의 몸에 당당할 수 있다면, 또한 내가 사용하는 휠체어에 당당할 수 있다면, 약물과 몸의 결합을 통해 나의 장애를 새롭게 변형해가는 것에 당당하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 ‘정신장애’에서의 약물 : ‘삶의 서사’의 변화 가능성

그러나 신체장애에서의 약물 투약과 정신장애에서의 약물 투약에는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정신장애에서의 약물 투약은 몸이 아닌 마음과 정신의 변화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남들이 듣지 못하는 목소리를 듣는 정신장애인이 약물을 복용하며 ‘늘 들리던 목소리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기도 하고, 일반적이지 않은 특정 사실을 굳건히 믿어왔던 당사자가 약물로 인하여 해당 믿음을 철회하기도 한다. 극심한 기분변동을 경험하던 당사자가 약물을 복용하고 마치 ‘마음에 마취제를 맞은 것처럼’ 감정이 평탄해지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감각과 사고, 기분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정신과 약물은, 보조기기나 인공보철, 근이완제와는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는 나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보다 깊은 차원의 변화를 가지고 올 수 있다.

신경 전달 물질을 나타낸 그림. 신체장애에서의 인공보철이나 약물이 신체의 일부를 보완/변형하는 것과는 달리, 정신과 약물은 감각, 사고의 내용과 과정, 감정 상태를 변화시킨다. ⓒwikimedia commons

이러한 근본적 변화 속에서 정신장애 당사자는 투약 이전과는 다른 인생 서사를 쓰기 시작할 수 있으며, 드물게는 스스로를 이전과는 ‘다른 저자’로 탈바꿈시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반응하여 그 속에서 굳은 믿음의 세계를 건설한 K라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K에게 약물을 통한 ‘증상의 해결’은 스스로가 그동안 구축한 세계를 완전히 바꾸는 과정이자 인생 서사의 패턴을 크게 변화시키는 과정일 것이다. 즉, 정신과 약제가 효과적이면 효과적일수록, K라는 ‘저자’의, K가 써 내려가는 ‘서사’의 투약 전후로의 질적 차이 혹은 불일치는 더욱 현저해질 수 있다.

투약에 의해 당사자의 삶의 서사 혹은 그 서사의 저자 자체가 변경될 수 있다면, 그러한 정신과 약물 투약을 정당화시키는 근거는 무엇일까?4) 먼저, 전통적 정신약물학 이데올로기는 차별적 답변을 제시한다. ‘비정상’의 정신 상태를 ‘정상적’ 상태로, ‘능력 없는’ 정신 상태를 ‘능력 있는’ 상태로 되돌리겠다는 전통적 정신의학에서의 약물 사용은, 정신장애 당사자의 투약 이전 인생 서사가 ‘비정상적’이고 ‘능력 없는’ 것이었다는 낙인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남들에겐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반응했던 K에게, 전통적 정신의학은 그러한 목소리는 치료해야만 하는 비정상적 증상이며, 따라서 ‘환청’이 개입된 인생의 서사 또한 그릇된 전제 위에 놓인 것이라 말하게 된다.

반대로, 매드프라이드 운동에서는 (설사 약물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입장이 아니라 하더라도) 투약과 비투약 사이의 결정을 쉽게 제공하지 못하는 듯이 보인다.5) ‘정상성’에 대한 거부는 투약 전후 인생 서사 간의 윤리적 우월성을 전제하지 않기에, 투약/비투약이라는 행위 자체의 근거도, 변화의 동력도 확보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면서 K가 약물을 투약한다는 것은, 겉으로는 정상성을 거부하면서 내심 정상성을 옹호하는 기만적 행위가 되거나, 어떠한 이유가 없음에도 단지 투약을 행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처럼 ‘어떠한 신체적 손상과 정신 상태라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수용하겠다’는 매드프라이드의 윤리적 결단은, 정신 상태를 변화시키는 행위의 윤리성에 대해서는 적절히 답하기 어렵다.6)

두 대립되는 접근법 모두가 ‘정신과 약물 투약’이라는 행위에 대해 만족스러운 해석을 내려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정신과 약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약물은 정신장애인이 특정 정신 상태에서 써 내려간 인생의 순간들이 ‘잘못되었다’고 폄하하지 않으면서도 당사자와 결합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정신과 약물을 이해하는 새로운 접근방식이 필요하다.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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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이보그와 테크놀로지, 장애학에 대한 국내외 논의에 대한 소개는 김초엽·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 2021. 참조.

2) 도나 해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 황희선 역, 책세상, 2019. p.19.

3) 약물과 신체장애, 질병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당뇨병과 장애학 : 질병과 장애 정체성, 그리고 의학」(유기훈, 비마이너, 2018.8.22.) 참조. 한편, 이처럼 장애를 사이보그와 연관 지어 설명하는 것에 대한 위험성에 대해서는 본 글의 주1, 주2 참조.

4) 본 글에서는 정신과적 증상으로 초래되는 ‘고통’의 문제를 논의에서 제외하였으며, 또한 ‘자·타해의 위험’이라는 고려의 축 또한 제외하였다. 이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하며 이는 본 글의 범위를 넘어서기에, 고통과 위험의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추후 다른 글을 통해 논의하고자 한다.

5) 매드프라이드 운동은 다양한 정신적 경험을 지닌 당사자들이 모인, 다양한 시각이 공존하는 장이기에 내부의 다양한 입장을 단일화하여 표현할 수는 없다. 본 글에서는 매드프라이드 운동의 여러 갈래의 시각 중, 특정 정신 상태에 대한 우월성을 전제하지 않고 어떠한 정신적 경험도 동등하게 취급하려는 운동적 입장을 검토의 대상으로 취하였다. 예를 들어, 그 이외에도 목소리 듣기나 망상과 같은 정신적 경험이 더 ‘가치 있다’고 보고 약물적 치료를 거부하는 매드프라이드 운동의 갈래 또한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는 글의 마지막의 ‘화학적 사이보그’에 관한 논의에서 다룰 것이다.

6) 손상과 장애를 정체성으로 ‘믿는 것’과 ‘수용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다룬 통찰력 있는 글로는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계절, 2018. 5장 참조. 책의 저자는 ‘믿는 것’과 ‘수용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언급하며, 장애를 지닌 상태가 비장애의 상태보다 더 좋다고 믿지 않더라도 그 장애 상태를 ‘수용하는’ 윤리적 결단은 여전히 가능함을 지적한다. 그러나 김원영의 논의에서는 장애가 있는 몸과 마음을 ‘변형시킨다’는 것의 윤리성은 공백으로 남겨진다. 자신의 신체장애나 정신장애를 ‘수용하는’ 사람에게 약물은 어떤 의미인가? 장애를 ‘수용하고’ 있음에도 약물을 투약한다는 것은 (자신의 손상이나 정신 상태가 나쁘다는) ‘믿음’을 강화하는 행위인 것은 아닌가? 설사 장애를 ‘수용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약물에 대한 해석은 만족스럽지 않다. 본 글에서는 선행연구의 기반 위에서, 약물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방식을 제안한다.

필자 소개

유기훈. 노들장애인야학 휴직 교사. 함께 살아가는 의미를 찾아 공학, 인류학, 의학 등을 떠돌다가 노들야학을 만났다. 야학과 병원의 언저리에 머물며, 억압하는 의학이 아닌 위로하는 의학을 꿈꾸고 있다. 노들야학 바로 앞에 사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