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차별에 반대한다고 동일성을 지지하는 건 아니다
앙리-자크 스티케, 『장애: 약체들과 사회들』 [연재] 노들장애학궁리소 ‘마이너의 서재’
노들장애학궁리소는 장애인운동단체의 진지인 ‘대항로’에 있으며, 장애 문제를 연구하고 토론하는 곳이다. ‘궁리’를 통해 장애를 규정하는 근거에 대해 바닥까지 따져 묻고, 장애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억압하는 온갖 삶의 형식을 부수어나갈 운동의 지혜와 전략을 모색하고자 한다. 강좌, 세미나, 차담회 형태로 해 오던 궁리 외 또 다른 방식을 궁리하다가 연구자들이 매달 돌아가며 장애와 관련한 책을 읽고 서평을 쓰기로 했다. 장애인뿐만 아니라 정상성 권력에 의해 억압받고 차별받는 다양한 소수자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도 담으려 한다.
불구는 어떤 존재인가
“어째서 우리는 불구를 ‘불구’라고 명명하게 되었을까.” 이것이 앙리-자크 스티케의 책 『장애: 약체들과 사회들』의 밑바닥 물음이다(원제는 ‘불구의 신체와 사회들’이다). 장애인들의 운명과 고통을 둘러싼 온갖 물음들은 그다음에 온다. 왜 우리에게는 ‘불구’(나중에는 ‘장애’)라는 이름으로 어떤 사람들을 묶는 일이 필요했던 걸까.
‘불구’란 온전하지 않고, 정상적이지 않은 존재들에게 붙이는 이름이다. 이들은 차이의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지닌 차이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불구를 지칭하는 말들은 모두 “이상하리만큼 부정적”이며 “공포감을 증폭”시킨다. 사람들은 불구 앞에서 감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심지어 ‘정신의 붕괴’가 나타날 때도 있다. 마치 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존재, 내가 그 앞에서 방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라도 본 것처럼 반응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불구를 이토록 두려워하는가. 스티케에 따르면 불구는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 자신의 결함, 우리 존재의 원치 않는 부분을 상기시킨다. 우리가 외면하는 우리 자신의 일부, 우리 자신의 다른 얼굴인 것이다. 이 점에서 불구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프로이트가 말한 ‘두려운 낯섦’, 랑크와 지라르가 말한 ‘분신’에 대한 감정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떨쳐내는 방식으로만 다가서고, 배제하는 방식으로만 껴안는다.
그래서 불구는 언제나 배제와 포함이 문제되는 곳에 자리한다. ‘경계’, ‘한계’, ‘테두리’, ‘주변’ 등으로 불리는 곳이다. 이 점이 불구를 인간과 사회에 대해 “사유하기 적합한 기호”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테두리를 그리면 사물의 형상이 드러나듯 불구를 그리면 인간의 얼굴이 나타난다. 스티케의 이 책은 불구를 따라 그린 인간의 얼굴, 불구를 타자화함으로써 성립한 ‘인간학’(인류학)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인간학은 역사적으로 변모해왔다. 불구에 대한 인식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불구 자체는 영속적이지만 불구를 포함하고 배제하는 구조는 시대마다 다르다. 그래서 스티케는 인간관계의 영속성을 포착한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인간학)과 사유의 역사적 불연속성을 포착한 푸코의 고고학을 함께 취한다. “인류학은 역사 속에서만 명확히 인식될 수 있으며, 역사는 인류학적인 것으로서만 공감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 책의 부제를 ‘역사적 인간학(인류학) 시론’이라고 달았다.
- 역사적 ‘인간학=불구학’ 시론
스티케의 ‘인간학’은 불구를 타자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불구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이 직접 다루는 것은 불구의 역사적 형상이다. 불구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모해왔는가. 스티케는 담론 분석을 통해 이것을 보여준다. 각 시대의 주요 텍스트들을 분석해서 기저에 놓인 불구에 대한 인식틀, 그의 용어로 말하자면 ‘담론 구성’을 드러내는 식이다.
이를테면 구약성서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는 고대 유대인들이 불구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성서에는 불구의 사례가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불구는 고대 유대인들에게 일상적 현실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성서에 따르면 불구는 종교적 제의에는 참여할 수 없다. 일상적 현실에는 포함되지만 성스러운 현실에서는 배제된 것이다. 불구는 온전성이 결여된 존재이므로 신과 관계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종교적 금기가 불구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 또한 막았다. 공동체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불구를 희생물(처형, 추방)로 바칠 수도 없었다. 불구에 대한 종교적 배제가 사회적 제거를 막아준 셈이다.
스티케는 유대인들의 인식을 몇 개의 차원으로 도식화해서 설명한다. 먼저 유대인들에게는 종교적 차원이 존재한다. 이 차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생물학적 차원이 겹쳐진다. 생물학적 차원에서는 온전과 기형, 정상과 괴물, 자연과 일탈 등의 구분이 이루어지는데, 종교적 차원은 이 구분에 배제의 원리를 제공한다. 생물학적으로 온전하지 않은 불구들을 종교적 금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금기의 존재는 희생물도 될 수 없다는 논리에 따라 유대인들에게는 공동체 안에 불구를 위치시킬 또 다른 차원이 필요했다. 바로 윤리적 차원이다. 종교적 차원이 신적인 영역, 신성한 영역과 관련된다면 윤리적 차원은 인간의 영역, 일상의 영역과 관계한다. 이 ‘종교적-윤리적 차원’에 따라 불구는 유대인 공동체의 특정한 자리를 배정받았다. 이것이 불구에 대한 유대적 ‘배제/통합’ 시스템이다.
스티케는 이런 식으로 고대 그리스와 중세, 근대의 다양한 텍스트들을 분석해서 고유한 담론 구성을 보여주고, 불구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불구를 ‘배제/통합’하는 각각의 시스템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불구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고대 그리스에서 불구는 신의 분노나 공동체 해체의 불길한 기호로 간주되어 추방되지만(영아유기) 동시에 신적 능력을 가진 존재로 숭앙되기도 한다. 반면 중세에서 불구는 신의 염려 대상, 공동체의 적선 대상이 된다. 고전주의 시기(17~18세기)에는 이성과 질서의 대조 표본으로 간주되고, 19세기에는 개인이나 민족, 종의 진화를 저해하는 ‘퇴화’의 존재로 간주된다. 불구의 형상이 이렇게 달라지는 것은 시대마다 담론 구성이 바뀌기 때문이다.
- 차이를 지우는 것에 반대한다
물론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현대적 담론 구성이다. 스티케에 따르면 20세기 들어 새로운 인식, 새로운 담론 구성이 생겨났다. 과거의 담론 구성에서는 생물학적 차원과 윤리적-종교적 차원이 중요했다. 생물학적 차원은 불구를 비정상으로 간주할 수 있는 ‘온전성’의 기준을 제시했고, 윤리적-종교적 차원은 불구를 공동체 안에 특정한 형태로 자리하게 했다. 그런데 이 두 차원은 약화되고 그 자리를 사회적 차원과 의학적 차원이 대체한다. 사회적 차원은 불구를 ‘통합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의학적 차원은 ‘치료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검토한다.
현대적 담론 구성에서는 불구가 지닌 차이와 타자성이 상당 부분 사라진다. 적절한 사회적 지원과 의료적 처치가 제공된다면 불구성은 제거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예 ‘불구’라는 말 자체가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되어 ‘장애인’(handicapé)이라는 말이 전면에 등장한다. ‘장애인’은 불구의 현대적 형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불구와 다르다. 현대적 담론 구성에서 장애인은 더 이상 비정상인이 아니다. 장애인의 신체는 비장애인과 차이가 나지만, 이 차이는 적절한 지원과 처치를 통해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 즉 그는 보통의 존재,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존재이다. 이런 맥락에서 새로운 담론 구성에서는 ‘재적응’(réadaptation), ‘재활’(rehabilitation) 같은 말들이 떠오른다.
스티케가 더욱 공들여 설명하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배제/통합’ 시스템이다. 장애인을 비정상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이 곧바로 장애인에 대한 배제와 차별이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스티케에 따르면 차별과 배제는 장애인을 “기막히게 잘 통합하는” 가운데서 일어난다. 장애인에게 정상성의 외관을 부여하면서 장애인이라는 존재와 그 삶이 지닌 우툴두툴한 면을 모두 평탄화한다. 차이는 세분화되고 개인화된다. 장애인들은 각자의 신체적 조건에 따라 평범한 삶에서 ‘뒤처진’ 저마다의 ‘거리’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거리는 앞서 말한 것처럼 적절한 처치와 지원을 통해 줄여갈 수 있다.
장애인 즉 ‘핸디캡’이라는 말이 이런 함의를 담고 있다. 스티케에 따르면 이것은 애초에 경마에서 사용되던 단어였다. 동등한 경쟁을 위해 열등한 말에게는 유리한 조건을, 우등한 말에게는 불리한 조건을 부과했던 데서 유래한다(장애를 지칭할 때는 불리한 조건이 부과된 상태만을 지칭한다). 그런데 이 개념은 트랙의 동일성은 문제 삼지 않는다. 적절한 편의를 제공하면 동일한 경주에 투입할 수 있다는 생각만을 표현하고 있다(애초에 삶을 경주 같은 거로 이해한다). 현실적으로는 그럴 수 없다고 해도 이념적으로는 그것을 지향한다. 그래서 최소한 그것을 흉내라도 내게 한다. 이를테면 장애인도 노동한다며 별 의미 없는 일에 저임금을 지급하며 보호작업장 같은 걸 운영한다.
현대적 시스템에서는 개별 장애인의 뒤처진 ‘거리’와 이 거리 극복에 필요한 서비스 제공을 둘러싸고 권력이 행사된다. 장애 정도를 판단하는 의료기관(의사)과 서비스를 통제하는 행정기관(사회복지사)이 권력을 가진다(서비스를 개발하고 판매하는 기업도 포함될 수 있다). 이것이 현대적 담론 구성에 상응하는 권력 형태이다. 이 권력은 장애인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는 인식에 입각해 장애인의 ‘정상화’를 관리하고 통제한다.
그런데 스티케에 따르면 현대적 시스템에서 ‘장애인도 똑같다’는 인식은 “동등성의 도식이 아니라 동일성의 도식”이다. 여기서 제거되는 것은 ‘불평등’이 아니라 ‘차이’다. 여기서 장애인은 “얼굴을 잃”는다. 장애인 자신이 만들어온 삶, 그 자신이 만들어갈 삶의 독특한 표정이 사라진다. 장애인 얼굴이 지닌 미학이 사라지고, 이 미학이 표준 얼굴에 대해 가졌던 비판적 타자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비정상인은 없다’는 말은 ‘정상인’이라는 말의 ‘비정상성’을 보이지 않게 한다.
나는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담론 구성을 밝히는 것은 그 구성의 해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한다. 스티케는 역사적인 담론 구성들, 불구를 둘러싼 ‘배제/통합’ 시스템이 어떻게 해체되거나 기능부전을 일으켰는지 몇몇 페이지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를테면 불구에 대한 종교적 금기에 근거한 고대 유대인들의 시스템(구약성서)은 그 금기를 거부한 예수의 실천(복음서)에 의해 위기에 빠진다. 또 불구를 적선과 동정의 대상으로 간주했던 중세의 자선 시스템은 빈민들이 봉기의 주체로 나서는 순간 무너졌다.
그렇다면 현대적 담론 구성은 어떨까. 잘 알려진 것처럼 20세기 장애인 운동은 ‘장애인도 똑같다’라는 구호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장애인 차별의 현실을 고발하고 평등권을 요구했다. 하지만 정상성에 대한 비판이 전제되지 않을 때 이 요구는 동일화의 도식으로 전용될 수 있다.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 기능부전이 아니라 기능을 수행하는 셈이다.
이 책의 저자가 불평등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차이의 제거에 반대한다. 적어도 이 책이 보여준 바에 따르면, 장애인을 차별하는 현대적 시스템은 장애인들이 비장애인과 똑같은 삶을 살아갈 때가 아니라 독특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때, 그리고 그런 삶이 가능한 조건들을 위해 투쟁할 때 극복될 수 있다. 장애인이 비장애인의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 더 나아가 장애인의 삶이 비장애인의 삶, 비장애인의 정상성을 비판하고 전복시킬 수 있는 타자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이 책이 현대적 담론 구성에서 읽어내는 투쟁의 방향이다.
* 필자 소개 _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