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은 누구에게나

[연속기고] 청소년 수다‘집’

2021-10-25     피아

《 기획의도 》

2019년부터 현재까지 청소년 “탈시설”과 “주거권”을 키워드로 활동하는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아래 청주넷)는 청소년 당사자, 청소년자립지원현장 활동가, 인권활동가, 법률활동가 등이 연대해 청소년 주거권 서사를 발굴하고, 담론을 확장하며, 정책 변화를 위한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지난해 청주넷에서는 청소년 당사자 활동가 6명이 경험한 주거 약자로서의 삶을 강연 내용으로 정리했습니다. 올해는 청소년 활동가와 비청소년 활동가들이 함께 이 강연 원고를 다시 읽어보고 청소년 주거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수다회’를 진행했습니다.

이번 기획연재를 통해 ‘소소한 일상’, ‘퀴어한 삶’, ‘청소년 인권’, ‘시설’, ‘가족’이라는 주제로 수다회에서 나눈 통찰력과 영감이 넘치는 이야기들을 더 많은 분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저희의 글들이 청소년의 집다운 집을 만들기 위한 다양한 상상과 시도들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 연재순서 ] 

[서문] 청소년 수다‘집’, 그 다섯 개의 이야기를 시작하며

① 소소한 일상은 누구에게나

청소년에게 있어 집다운 집은 무엇일까? 어떤 공간이 누군가에게, 그리고 청소년에게 집다운 집이 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청소년 주거권의 여러 모습을 상상하는 첫 번째 수다회, ‘청소년 주거권과 소소한 일상’은 각자가 느끼는 집에서의 소소한 즐거움을 나누며 시작되었다.

창문에 비치는 노을 풍경, 집 근처 시장에서 사 온 식재료로 직접 요리한 저녁 식사, 일정이 끝나고 돌아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날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마음껏 발사하는 이불킥……

참여자들은 각자의 순간을 떠올리고 말하기를 이어나갔다. ‘이게 곧 집다운 집의 조건이다’라고 딱 말할 수는 없어도, 나를 이 집에서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작은 여유들에 관한 이야기가 도란도란 흘러나왔다. 그러다 곧, 현재 시설에 거주하며 앞으로 살아갈 집다운 집을 그리는 한 청소년 참여자의 기대가 이어졌다.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이 잔뜩 있는 집. 옷방에는 저거, 부엌에는 이거, 침실에는 귀여운 무드등이 있었으면 좋겠고…” 나답게 지낼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기대에 부푼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흐뭇해지던 것도 잠시, 곧 다른 고민들이 쏟아져 나왔다.

- ‘방꾸’의 딜레마

“근데 그거 되게 고민되지 않아? 이사할 때마다, 이사를 계속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니까 가구를 뭔가를 사도 이게 짐이 돼 버릴 것 같아서. 그러다 보니까 안 꾸미게 되는 것 같아요.”

“2년짜리 꾸며서 뭐 해.”

“그러니까 내가 5년을 살면 좋은데 이게 내 집이라고는 할 수 없는. […] 그래가지고 가구 사기도 참 뭐 해요.”

집다운 집은 적어도 먹고 자고 싸는 것이 전부이기만 한 공간은 아닐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수다회에 모인 우리에게도 집다운 집이란, 머무르는 동안 내가 나다울 수 있도록 나의 흔적들을 끊임없이 남기고, 그 속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막상 계약 기간에 쫓겨 2년, 혹은 4년마다 이동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나의 흔적을 남기기란 쉽지 않다. 집이 단지 짧게 빌려 쓰는 공간에 가까운 지금의 사회에서는 나의 흔적을 남기기보다는 최대한 없애며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현명할지도 모른다. 지금 마음에 드는 이 물건이 다음 집에서는 둘 곳이 없어질 수도 있고, 이동할 때 짐이 늘어나 곤란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을 전부 감수하고서 ‘방꾸(방 꾸미기)’로 심신의 안정과 행복을 얻더라도, 이 행복은 기간제에 불과하다는 무력감과 찝찝함이 들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이사 이후 모두가 약속한 듯이 저렴한 생활용품을 파는 다이소에 가는 이유와도 연결될 것이다. 저렴하고, 망가져도 상관없는 물건들을 사들이는 것, 오래 쓸 생각이 아닌, 오히려 2~3년이면 생명을 다하기를 바라는 물건들을 기대하는 것. 나의 소비가 나에게 짐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는 불안정한 주거 환경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집이 나를 위한 공간이 되기를 바라지만 물건을 새로 들임에 앞서 이 물건이 결국 짐이 될까 갈등하게 되는 이 애매하고 불편한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내 집’이 사실은 남의 공간에 가깝고, 나는 남의 집에 얹혀살고 있을 뿐이라고 새삼 느끼게 된다. 참여자들이 집다운 집의 첫 번째 조건으로 ‘맘 놓고 내가 지내고 싶은 만큼 지낼 수 있는 넉넉한 기간’을 꼽은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을 것이다.

- 소소한 일상일까, 심심한 일상일까

“제가 만난 청소년분들이 독립 직전에는 다 거의 엄청 큰 기대를 갖고 독립을 준비해요. 요거 하고 싶다, 이런 거 하고 싶다, 이런 얘기들을 해요. 근데 이제 막상 자립을 하고 이사를 하시고 한 3개월 정도 지나고 나면 거의 그 집에 안 들어가시는 거야. […] 무료하고 심심하다는 거야. 그러니까 이게 소소한 일상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심심한 일상으로 볼 것이냐가 좀 종이 한 장 차이의 느낌이랄까?”

“나만의 독립된 공간이 있는데, 걸어서 10분 거리에 친구집이 있었으면 좋겠고, 한 15분 거리에 다른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오늘 밤은 내가 혼자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데 내일 밤은 쟤네들이랑 같이 보낼 것이고. […] 이런 것들이 가능할 때… 그냥 집에 나 혼자 산다고 생각하면 막 그 두려움과 외로움과 그런 감정들이 너무 걱정이 되는 거예요.”

1인 가구를 겨냥한 많은 데이팅/채팅 어플에서 가장 앞세우는 홍보 키워드는 단연 ‘동네친구’다. 1인 가구의 비율이 점차 늘어가는 사회에서, 외로움과 고립은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이는 독립을 시작하는 청소년들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다. 폭력이 가득한 시설과 원가정에서 나와 첫 독립을 시작하는 많은 청소년들이 맞닥뜨리는 큰 문제 중 하나는 외로움이다.

[그런데... 혼자인 나는 자꾸만 힘들어졌다. 안전과 자유를 원했지 외롭고 싶진 않았는데.] 주인공이 눈물을 흘리며 어둠에 둘러싸여 있다. 복잡한 마음을 나타내는 듯한 동그라미들이 있다. ⓒ문제없는스튜디오
[원가정을 벗어났다고 돌봄도 필요없다거나 혼자 알아 하겠다는 게 아니다! 서로 함께 돌보는 건 모두의 권리다.] 주인공이 집 옆에서 확성기를 들고 외치고 있다. “나 안 돌아갈래~ 지금 여기서 함께 살 거야!!” ⓒ문제없는스튜디오

‘안전과 자유를 원했지, 외로워지고 싶진 않았던’ 청소년들은 집이 생겼지만 혼자가 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다시 집을 떠나 친구 집을 떠돌아다니는 일상이 찾아오기도 한다. 자립은 그저 독립적인 공간이 생기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집다운 집은 방 한 칸이 덩그러니 생기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그 집에서 앞으로 살아갈 개인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

더군다나 탈가정 청소년은 보편적인 가족 규범에서 벗어난 존재로서, 여러 사회적 관계를 쌓는 것에 있어 더욱 취약해지기 쉽다. 이들 또한 권리를 가진 존재로서, 이러한 취약성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개인의 상황에 맞게 필요한 지원을 누리는 것이 마땅한 권리라는 점을 고려할 때, 탈가정 청소년들을 고립시키는 여러 사회적 상황에 대한 진단과 함께 새 사회적 관계망을 만들어갈 지원이 필요하다. 그렇게 두 번째로 꼽은 집다운 집의 조건은, ‘외롭지 않을 수 있게 나를 잡아주는 단단한 관계, 그리고 그러한 관계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었다.

- 집안일, 면제와 배제 사이

마지막으로 참여자들은 공간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집안일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 시작한 자취와 구더기가 피어난 쓰레기봉투, 썩은 반찬들, 곰팡이로 뒤덮인 화장실…… 듣기만 해도 절로 구역질이 나올 법한 이야기들이 시끌시끌 쏟아져나왔다. 자취의 경험이 있는 많은 참여자들은 모두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사실 우리가 얘기하는 소소한 일상은 엄청난 노동의 결과가 아닐까?”

“처음에 얘기한 노을 진 창가, 아름다운 어쩌구 이런 거 전부 우리의 피, 땀, 눈물 위에 있는 거야.”

별거 없다는 듯 사회에서 쉽게 무시하지만, 끊임없이 찾아오고, 또 마냥 쉽지만은 않은 노동들. 기깔나게 청소해도 밥 한번 차려 먹으면 다시 되돌아가는 허무한 노동. 탈가정 후 독립한 모든 청소년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어떤 청소년들에게는 유독 집안일이 어렵게 다가오는 건 왜일까? 무엇이 청소년들이 재생산 노동을 어렵게 느끼도록 했을까? 수다회 도중에 던져진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청소년이기 때문에 살아와야 했던 삶을 떠올리게 했다.

공간의 주체가 아닌 관리의 대상으로 주로 여겨지던 청소년은 집안일에도 참여하지 않기가 쉽다.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들은 각종 노동으로부터 면제받곤 하는데, 가사노동도 예외는 아니다. 집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 일에서도 “이런 거 할 시간에 공부나 해.” 같은 말로 열외가 되곤 하고, 부모가 모두 있는 가정에서라면 집안일은 오롯이 엄마가 해야 할 책임으로 떠넘겨지기도 한다.

이렇게 가사노동을 면제받는다는 것은 청소년들이 편하게 지낸다 생각하는 이유가 된다. 하지만 집안일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집의 동등한 구성원이 되지 못하고 가정을 꾸려가는 데 함께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집을 나와 독립을 시도하다 보면 자신이 집안일에 대해 아는 것도, 경험도 너무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는 집안일의 ‘면제’가 다른 한편으로는 청소년이 스스로 독립해서 살아갈 일이 없을 거라는 고정관념에 따른 집안일로부터의 ‘배제’였다는 것을 드러낸다.

‘어느 정도 사는’ 부모를 두고 부모와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며 대학까지 간 청소년이라면, 자취를 시작한 뒤로도 부모에게 반찬을 받고 청소 등에 대해 잔소리를 들어가며 조금씩 집안일의 경험치를 쌓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한 번씩 집이 너무 난장판이 되면 엄마가 와서 청소를 해주는 ‘엄마 찬스’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탈가정 청소년들은 그런 지원이나 적응 과정 없이 바로 자기 집안을 꾸려나가야 한다. 그나마 참고할 수 있는 것은 인터넷 검색과 몇 안 되는 주변 사람들의 조언 정도가 전부다.

사람들은 으레 청소년들이 독립하면 오히려 생활이 망가질 거라고 걱정한다. 그러나 청소년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과정으로서의 시간’이 아닐까. 집안일을 아끼고 배워갈 시간, 그것이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않을 일임을 알아갈 시간, 나아가 ‘공간의 주체가 되는 감각’을 장착할 시간 말이다.

- ‘함께’ 만드는 집다운 집, 그리고 소소한 일상

수다회는 처음, 청소년에게 집다운 집이 어떤 공간인지, 집다운 집이 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조금씩 집다운 집이란 단순히 어떤 공간 자체가 아닌, 집을 중심으로 한 삶의 여러 맥락에서 더욱 다양한 의미를 드러낸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간의 주체가 되기 어려웠던 탈가정 이전의 삶, 나의 공간을 갖고 나의 시간과 관계를 새롭게 꾸려가는 탈가정 이후의 삶. 집다운 집을 완성하는 조건은 역설적이게도 집 안만이 아닌 집 바깥의 관계망 속에서 비로소 갖춰진다. 그래서 나는 더욱 우리가 상상해야 하는 집다운 집, 그리고 자립의 모습이란 혼자가 아닌 함께 관계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혼자일 수도, 함께할 수도 없는 공간을 버티며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이 아주 많다. 소소한 일상도, 소소한 행복도 모두 공간이 먼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임을 잊으면 안 된다. 수다회의 시작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곳’과 ‘나의 감정의 주인이 되는 곳’이라는 키워드를 꼽아 자신이 생각하는 집다운 집을 소개한 한 청소년 참여자는, 가족들과 모두 떨어져 비로소 처음으로 제대로 쉴 수 있었던 경험을 소개하며, “자신만의 공간이 있어야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 있고, 그러한 휴식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컨트롤하며 나아갈 수 있게 된다”라고 말했다.

이는 공간이 먼저 있어야 그 다음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야기였다. 안정적으로 살아가고, 자기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자기의 공간이 있어야만 각자에게 맞는 관계나 공간을 시도하고 배워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정적 주거 공간을 보장받는 것은 청소년에게 조건이나 자격을 요구하지 않는 보편적 권리가 되어야 한다. 소소한 일상과 여유를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세상이 얼른 오면 좋겠다.

2021 세계 주거의 날 기념

[청소년 주거권 말하기 확산을 위한 캠페인]

“우리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집!”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는 ‘2021 세계 주거의 날’을 기념하여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의 ‘집다운 집’에 대한 이야기가 멈추지 않도록 청소년 주거권 운동에 힘을 보태주세요. ▷http://bitly.ws/hqP5

필자 소개

피아. 청소년 때 원가정이라는 악의 소굴에서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게 도와준 활동가들을 만나 지금껏 청소년인권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청소년인권운동. 누구보다 쉽게 포기하고, 누구보다 쉽게 질리지만, 그런 나라도 이어나가고 싶은 운동을 고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