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
[나눔과나눔] 무연사회, 죽음을 기억하다 10월 장례이야기
# 진심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보건복지부의 지침을 토대로 ‘가족대신장례’가 서울시에서 시작된 지 어느덧 1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제도 덕분에 사랑하는 이의 장례를 치를 수 있었던 사람들, 제도가 있음에도 사회의 편견과 안내의 미비 탓에 장례를 치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혈연 중심의 법 바깥에 있는 이에게 장례 치를 권리를 부여하는 이 제도는 그동안 많은 사례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를 둘러싼 다양한 논의가 오고 갔습니다. 제도에 찬성하며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었고, 제도에 반대하며 폐지를 요구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었습니다. 확실한 것은, 제도가 시행된 후 스물여섯 번의 ‘가족대신장례’를 진행하는 동안 제도를 반대했던 이들이 우려하던 일들은 한 번도 벌어진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적게는 수백, 많게는 천만 원 이상이 들어갈 수도 있는 장례를 아무런 금전적 이득 없이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라고요. 자신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순수한 마음으로 가족이 아닌 이의 장례를 치러줄 이는 없을 것이라는 그 말들에 대한 대답으로 아래의 사례들을 가져왔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왜 장례를 치르고자 했는지에 대한 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스쳐가듯 지나칠 수 있었지만 마지막을 책임진 사람
어느 날 공영장례지원 상담센터로 음성 꽃동네의 수사가 찾아왔습니다. 수사는 자신이 알고 지내던 홈리스가 사망했는데, 장례 후 그의 유골을 인수해 봉안당에 모시고 싶다며 가족이 아니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인지, 가능하다면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에 대한 안내를 요청했습니다. 상담센터의 활동가는 ‘가족대신장례’ 제도를 소개하며 어떤 절차로 이루어지는지와 증빙서류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안내했습니다. 방법을 안내받은 수사는 서류를 준비해서 구청에 접수했고, 적극적인 수사의 요청에 구청도 ‘가족대신장례’를 위한 공문을 시행했습니다.
‘가족대신장례’ 제도가 시행될 때, 주로 이 제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고인과 각별했거나,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쌓아왔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이웃이나 종교활동을 함께 했던 교인 등 최소한 인연이라 부를 수 있는 관계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장례 당일 수사를 통해 들은 고인과의 관계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저 스쳐가듯 지나치는 사이’로 보였습니다. 수사와 고인은 올해 8월에 처음 만났고, 첫 만남을 포함해 딱 두 번 만났으며, 그마저도 긴 대화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수사는 오랫동안 거리 홈리스를 대상으로 무료 급식소를 운영해왔다고 합니다. 고인을 만나게 된 것도 식사를 전달하다 공원에서 마주친 것이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이미 복수가 차 있어 치료가 필요해 보였던 고인에게 수사는 자신의 연락처를 주며 도움이 필요하면 이곳으로 연락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그 후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수사의 핸드폰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받아 보니 자신의 명의로 핸드폰을 만들 수 없었던 고인이 지나가던 행인에게 부탁해 연락한 것이었습니다. 이날 수사가 전화를 통해 들은 고인의 첫 마디는 “살려주세요…”였습니다. 수사는 바로 날짜를 잡아 고인을 만났고, 병원으로 입원시키기 위해 선별검사소에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다음 날 결과가 음성으로 나온다면, 고인을 지체 없이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받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선별 검사소에서 검사를 받은 후 다음날, 수사는 고인의 검사 결과가 음성이라는 문자와 고인이 앰뷸런스를 타고 응급실로 이동 중이라는 연락을 동시에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입원과 치료가 확정되었던 그날, 고인은 응급실에서 사망했습니다. 고인과의 만남과 이별의 순간을 회상하던 수사는 “제 불찰이죠…”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 속에 녹아 있는 무수한 ‘만약’이 느껴져 활동가는 뭐라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없었습니다. 단 두 번의 만남으로 장례까지 치르고자 했던 것은 그 ‘만약’이라는 마음의 짐 탓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혈연 밖의 가족들
‘가족이란 무엇인가?’ 매일 같이 공영장례를 치르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고개를 드는 질문입니다. ‘표준 국어대사전’에 명시된 가족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사전적인 설명을 벗어나, 우리가 직접 느끼는 가족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위의 설명에 부합하지만 여러 이유로 인해 30년간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사람들을 가족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매일 같이 얼굴을 마주하며 누구보다 가깝게 지냈지만 위의 설명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은 절대로 가족이라 부를 수 없는 걸까요? 무연고 사망자의 시신위임서에 자주 적히는 문구 중에는 ‘가족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에 온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에는 “제가 가족입니다”가 있습니다. 10월에도 역시나, 가족이지만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 장례에 참여했습니다.
- 신의 세계에서 맺어진 부녀지간
ㄱ 님의 장례에 참여한 지인은 고인과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저는 ㄱ 님의 신딸입니다. 아버지와 저는 신의 세계에서 부녀로 맺어졌어요” 생전에 신내림을 받고 무당으로 살았던 고인에겐 위임서를 작성한 자녀 외에 또 다른 자녀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 죽으면 네가 처리해라”라고 부탁할 정도로 ㄱ 님과 신딸의 관계는 각별했습니다. 사람 좋고, 선한 사람으로 ㄱ 님을 기억하는 신딸은 ㄱ 님이 임종했을 때 장례까지 직접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연락한 ㄱ 님의 자녀에게 “뭘 그렇게까지 하세요? 그러지 마세요!”라는 말을 들었고, 결국 눈물을 머금고 ㄱ 님을 무연고로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가운 안치실에 모셔진 신아버지를 위해 신딸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습니다.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인 위령굿을 하기 시작했고, 신기하게도 굿을 마치자 상담센터를 통해 부고 문자를 받았다고 합니다. 장례가 치러지는 날, 유골함을 안은 신딸은 합동위령제에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신아버지인 ㄱ 님과 이별했습니다. 영적인 세계를 믿지 않는 이가 보더라도 ㄱ 님과 신딸의 관계를 표현하는 말에 가족보다 더 적합한 것은 없었습니다.
- 형제나 다름없었어요
ㄴ 님의 장례에 가던 길에 활동가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습니다. 스스로를 ㄴ 님의 지인이라 밝힌 이는 자신이 이미 도착했으며, 어디서 기다리면 될지를 물어봤습니다. 공문으로 파악되는 조문객도 없었고, 오겠다고 의사를 밝힌 사람도 전혀 없었기에 어디서 부고를 안내받은 것인지 궁금했던 활동가는 걸음을 빠르게 옮겼습니다.
“ㄴ 님은 성당에서 알게 됐습니다. 친해지기 전에는 몰랐다가 나중에서야 ㄴ 님에게 가족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제가 힘들었던 시절에 ㄴ 님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고, 저는 그런 ㄴ 님을 자주 집에 초대해서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거의 친형제처럼 지냈어요. 부고와 장례 일정은 ㄴ 님이 사시던 고시원의 총무에게 전달받았습니다.”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구청과 상담센터가 조문객을 놓친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ㄴ 님이 돌아가시자 지인은 장례를 치르려 했으나 장례식장에서 가족이 아니면 안 된다는 안내를 받았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이후로 장례 일정 등을 고시원 총무에게 전달받았기에 장례주관자나 연고자 지정 제도를 알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당연히 신청하고 직접 장례를 치렀을 거예요” 지인은 제도가 있었음에도 ㄴ 님의 장례를 직접 치를 수 없었다는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 불인지심(惻隱之心)_‘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장례 치를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은 그 권리를 얻기 위해 기나긴 분투의 과정을 겪습니다. 단 두 번밖에 만나본 적 없는 이를 위해 한 달의 시간동안 서류를 준비해야 했고,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에게 모진 말을 들어야 했고, 장례식장과 병원으로부터 차가운 거절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법률적으로 이들은 장례를 치를 의무가 없고, 도의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이들에게 “왜 장례를 치르지 않았느냐”고 따져 물을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재산을 노린다거나 다른 속내가 분명히 있을 거야.” 왜냐하면 우리의 상식은 그러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장례를 치르고자 하는 이의 마음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상식은 얼마나 정확할까요? 인간은 이익만을 좇는 존재일까요? 10월에 만난 이들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고인을 무연고로 보내고 유골을 지자체의 결정에 맡겨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차마 그러지 못하는 마음’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더 일찍 고인을 돌보았더라면…’이라는 ‘만약’에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고, 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가족’이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차마 그러지 못하는 마음’은 이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나의 이웃이, 내가 아는 사람이, 나와 스쳐간 누군가가 죽었다면. 나는 무슨 마음이 들까?’ 나눔과나눔은 생각합니다. 이 질문의 답으로 쉽게 외면을 말하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라고, 그것이 우리의 상식이라고 말입니다.
*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
- 10월 무연고 사망자(기초생활수급자 49명 포함)
공이식, 한재우, 이훈구, 허진석, 정오순, 박명수, 손성호, 이히로고, 한윤석, 김전태, 김성용, 김석봉, 김건명, 이승철, 박동식, 계성문, 임창건, 이종태, 이성국, 김필선, 김영구, 이승린, 조재상, 최옥순, 박해상, 최현순, 이승우, 김태성, 원춘호, 서민호, 신동명, 여정재, 권익견, 정수명, 이병석, 이석우, 홍은표, 이희진, 유풍석, 한태영, 정종수, 백성인, 박동조, 신용철, 한두식, 김교선, 양장남, 신태순, 이금철, 김광규, 김생광, 조성근, 이지훈, 이용하(중국), 김한기, 김준수, 이기혁, 함학주, 김수현, 이만행, 이웅재, 신돌복, 박인오, 한성규, 김창호, 박상만, 유위란, 강성환, 강석환, 임성관, 홍성범, 오장환, 유현호
나눔과나눔이 함께 마지막을 동행 했던 일흔세 분의 이름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하게 불렸을 이름
나눔과나눔은 함께 기억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외롭게 삶을 마감하신 분들의 이름을
함께 기억해 주세요.
“Re’member
나의 순간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
누군가의 마음속에 있을 순간을 공감하는 것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것
그렇게 함께 하는 것”
(문구출처 : 마리몬드)
필자 소개 _ 그루잠 나눔과나눔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