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구는 멀지 않다 / 안희제
[칼럼]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 영화 〈돈 룩 업(Don’t Look Up)〉(2021)과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2020)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 독서모임에서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를 읽은 후로, 지금의 사회를 이해하고자 할 때마다 ‘위험사회’는 내가 가장 많이 떠올리는 개념 중 하나가 되었다. 합리적인 ‘이성’이 언제나 우리에게 ‘발전’을 가져다주리라는 믿음으로 과학과 기술로 대표되는 ‘문명’에 사실상 유일한 권위를 부여하고, 그에 따라 생겨난 기후위기와 같은 수많은 위험 안에서 살아가게 된 우리의 삶을 포착하는 ‘위험사회’라는 개념은 질병권을 고민하는 내게도 항상 중요한 화두였다. 내가 겪는 크론병이든, 수많은 원인 모를 자가면역질환이든, 그것의 원인은 종종 근대화가 우리 일상 전반에 채워 둔 화학적 위험으로 추정되곤 하기 때문이다.
위험사회는 다양한 재난 상황에서 소수자가 더 큰 피해를 겪는다는 방식으로 인용되는 일이 자주 있는데, 이는 사실 그리 적절한 인용이 아니다. 울리히 벡은 자신의 책에서 “위험사회는 계급사회가 아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충분히 이야기되지 않고 있다.”와 같이 위험사회와 계급사회가 다르다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즉, 위험사회라는 개념의 핵심은 ‘누가 더 위험한가’가 아니라, 서로 다른 원리로 생산되고 분배되는 자본과 위험이 어떤 방식으로 연동되어 지금의 사회를 주조해 나가는가에 관한 것이다.
최근 넷플릭스에 공개된 영화 〈돈 룩 업〉은 위험사회의 일면을 신랄하게 보여준다. 공룡을 멸종시킨 운석보다 큰 혜성이 지구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과학자들은 이를 정부에 보고하지만, 대통령을 비롯한 백악관의 사람들은 그 위험을 직시하기보다 정권 유지를 위한 정치적 계산을 더 중시하며, 인공지능 서비스를 만드는 대기업은 또 다른 과학자들을 동원하여 혜성에서 (아마 희토류로 추정되는) 비싼 광물들을 채취함으로써 이윤을 창출할 뿐 아니라 지구의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결국 그 계획은 실패하고, 지구는 혜성을 맞아 무너지고, 우주선을 타고 도망친 권력자들은 2만 년도 넘게 냉동된 채로 우주를 떠돌다가 도착한 행성에서 정체 모를 외계 생명체에게 물어뜯겨 죽는다. 결국, 살아남은 인류는 없다.
여기서 혜성은 분명 인간이 불러온 위험은 아니다. 하지만 혜성을 막을 방법도, 멸망마저 이윤으로 전유하려다가 충돌을 막지 못한 상황도 분명 인간의 ‘문명’에 기인하는 것임은 틀림없다. 혹자는 〈돈 룩 업〉을 보고 나서 ‘이래서 과학자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반지성주의 혹은 음모론에 대한 경멸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내가 발견한 것은 오히려 문명, 혹은 발전을 중심으로 하는 사고방식을 경계하고 의심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었다. 정치인이나 거대 자본과 결탁하여 동료 평가(peer review)도 안 한 기술에 인류의 미래를 맡기고, 그런 방법을 TV에 나와서 홍보하는 과학자들도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과학자는 자본이나 정치의 대척점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정치-과학이 이루는 하나의 복합체를 구성하는 요소에 가깝다. 위험사회에서 과학적 지식은 위험을 생산하고, 통제하는 권위로 작동하면서 자본이나 정치와 같은 다른 권력들과 맞물려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복합체에 맞서 혜성 충돌을 끊임없이 경고하는 과학자들은 그 복합체로부터 외면당한 이들이기에, 오히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자본-정치-과학의 권위적 복합체를 의심하고, 외면당하는 지식을 복원하고 저항적 지식으로 발전시키는 일일 테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문제의식은 최첨단 우주 항공 기술을 통해 다른 행성을 대안으로 찾은 자본가와 정치인들의 처참한 몰살을 예고하는 결말에서 잘 드러난다. 자본가와 정치인이 지구의 운명을 걸고 희토류를 채취하려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에게 지구 바깥의 대안이 존재한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학 혹은 기술의 실패에 꼼꼼히 대비했지만, 그런 대비는 결국 소용없었다. 2만 년 이상을 우주에서 견딜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추고도 인류는 생존하지 못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의 주제가 드러난다. 인류를 멸망으로 몰아넣은 바로 그 기술로는 해답을 찾을 수 없고, 지금 이 지구 바깥에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혹은, 대안이 없다는 전제에서만 우리는 여기서 존엄하게 살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거나.
〈돈 룩 업〉의 정치인과 자본가는 모두 기술 발전과 자본 축적을 통해 해결될 미래만을 바라보며 현재의 위험을 외면했다. 아직 검증되지 않은 기술도 미래의 평등이나 이윤을 위해서라면 정당화되는 장면들은 위험사회와 계급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공모하고 서로 강화하는지 보여준다. 이처럼 첨단 기술의 발전이 세계를 구원하리라는 자본의 위험한 찬양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모든 장애와 질병을 치료하여 제거할 것이라는 치유 강제의(curative) 관점과 깊이 닿아 있다. 지금 여기에 살아가는 장애인과 아픈 사람의 일상을 삭제하고, 그러한 삶의 시간성을 모두 ‘치료’라는 미래, ‘치료된 삶’이라는 미래의 대안으로 수렴시키는 치유 강제의 관점은 현재의 불평등과 고통을 모두 발전된 미래로 유예하는 위험사회의 가동 원리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해결책은 무엇일까? 이 영화를 본 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소설 《지구 끝의 온실》이었다. 지구 전체가 ‘더스트’라는 물질로 뒤덮여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 되었을 때, 어떤 이들은 더스트를 차단하는 구역을 만들고 다시금 기술 발전을 통해 재앙을 해결하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곧 실패, 악화, 혹은 폭력으로 이어졌다. 이 소설이 중심적으로 그려내는 것은 어느 ‘온실’을 바탕으로 건설된 마을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재앙의 한복판에서 숨 쉬며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친밀성을 재건해나갔다.
이 소설은 내게 위험사회에서 가능한 ‘대안’을 보여주는 듯했다. 사람이 살아갈 수 없게 된 세상에서 삶을 새롭게 구성해나가는 원동력이 된 온실은 바로 그 ‘더스트’를 불러온 기업에서 일하던 사이보그 기술자가 자신이 아끼는 식물들을 돌보던 곳이었고, 그는 단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충실했을 뿐이며, 그 마을의 사람들도 인류보다 서로와의 관계를 생각하며 살아갔다. 재앙을 끝낸 식물 ‘모스바나’ 또한 그저 자신의 영역을 넓히고자 했을 것이라는 이 이야기는 ‘종말’을 절대시하면서 ‘구원’을 낭만화하는 이야기들 사이에서 지극히 사적인 관계들이, 어찌 보면 건조하기도 한 기술적 활동들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듯하다. 중요한 것은 첨단 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과 함께 살아가며 관계 맺는 우리가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발명하는 일이다.
〈돈 룩 업〉과 《지구 끝의 온실》에서 나는 ‘현재’의 힘을 본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위험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 아름다운 미래가 아니다. 우리 각자가 살아내고 있는 일상 안에 멸망을 막을 가능성이 존재하며, 위기를 타개할 길은 우주로, 미래로 나아가는 이들이 아니라 지금 당장 멸망하고 있거나 잔해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현재를 존엄하게 살아내고자 노력하는 이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두 작품은 상기한다. 거창하고 돈 되는 구원의 약속을 의심하라. 미래에 갇히지 말자. 비상구는 멀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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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리히 벡, 《위험사회》, 홍성태 역, 새물결, 2006, 94쪽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관해기(증상이 일정 정도 가라앉아 통증이 거의 없는 시기)의 만성질환자. 장애인권동아리에서 활동하고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수업을 들으며 질병과 통증을 새로운 시좌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몸의 경험과 장애학, 문화인류학에 관심이 많고, 앞으로도 그것들을 공부하려 한다. 책 『난치의 상상력』, 『식물의 시간』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