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재건하는 비평을 향해 / 안희제

[칼럼]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2022-02-21     안희제
한 인물의 굳은 표정이 검은 배경에 크게 담긴다. 눈썹을 살짝 가리고 뒷목을 덮는 길이의 머리카락, 짧게 남아 있는 수염, 탁한 상의. “희망 같은 거 갖지 마요”라는 자막. 넷플릭스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 예고편 화면 캡쳐.

나의 편향된 관심사 때문인지는 몰라도, 최근에는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콘텐츠들이 많이 생산되는 것 같다. 이를테면,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오징어 게임〉은 금융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지금 우리 학교는〉은 계급 불평등과 성차별 등이 복잡하게 맞물려 발생하는 학교폭력 등을 ‘비판적으로 재현’한다고 이야기된다.

미디어에서 사회비판적 함의를 발견해내고, 문제의식을 사람들과 공유하는 건 나처럼 수많은 시청각적 매체에 둘러싸여 그것을 향유하는 이들에게 (어쩌면) 중요한 일일 수 있다. 그리고 혐오로 먹고사는 극우 유튜버나 ‘사이버 렉카’ 유튜버의 구독자 수를 늘려 주기보다는 〈오징어 게임〉 같은 작품을 보고 사람들과 비평을 나누는 것이 물론 나을 것이다. 실제로 과거의 어떤 작품들은 현실적 변화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갈수록 그러한 작품들은 현실을 비판이나 변혁의 대상보다는 오히려 구경거리로 만드는 듯하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 이전에 나온 〈스위트 홈〉의 경우에도 계급 문제와 학교폭력을 다루고 있으나, 괴물들의 엄청난 스펙터클로 인해 그러한 문제의식은 순식간에 뒷전으로 밀려난다. 나아가 ‘모든 것이 돈이 되는 세상’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금융기관의 광고 모델로 금융 자본주의의 참상을 비판적으로 재현한다는 드라마의 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웃으며 등장하는 장면은 미디어의 비판적 기능에 대한 허무함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거대 자본을 등에 업은 이러한 작품들은 현실의 폭력과 고통을 생생하면서도 ‘즐길 만한’ 것으로 만든다. 여기서 사회문제와 폭력은 단지 시청자 수를 늘리기 위한, 그러니까 돈을 벌기 위한 ‘공감할 만한 이야기’로 이용된다. 감독이나 작가는 사회적 가치를 담은 작품을 만들었다고 명성을 얻고, 배우들은 그 연기를 인정받아 명성을 얻는데, 현실의 문제는 의제화조차 되지 않는다. 〈기생충〉의 흥행 이후 서울시는 촬영지들에 ‘기생충 포토존’을 만들었으나, 빈부격차와 주거권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사회문제에 관한 작품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어도 별 감흥이 없는 이유다.

2011년에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블랙 미러(Black Mirror)〉 시즌 1에는 ‘핫 샷(Hot Shot)’이라는 에피소드가 있다. 더 나은 삶의 유일한 가능성은 ‘핫 샷’이라는 오디션에서 우승하는 것뿐인 사회가 배경이다. 주인공은 오디션 무대에 올라서 몰래 가져온 깨진 유리조각을 자기 목에 댄 채 그 사회의 폭력성을 고발하는데, 사람들은 그마저도 ‘열정적인 퍼포먼스’로 소비한다. 그는 폭발적 인기를 얻어 캐스팅되고, ‘비판적 메시지’는 TV에 정규 편성된다. 비판의 기능을 잃은 미디어에 대한 메타적 비판인 이 에피소드가 앞서 언급한 작품들과 같은 플랫폼에서 공개되었다는 것은 물론 그 자체로 코미디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혹자는 이것이 드라마나 영화라는 매체 자체의 한계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대중매체란 기본적으로 즐길 거리라서 재미가 있어야 하고, 작품을 말로 비판하기란 쉬운 일이라고. 그러나 이는 반쪽짜리 이야기 아닌가? 애초에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담겠다고 결정한 이상, 해당 작품은 이미 그 자체로 사회에 대한 비평이 되기로 결정한 것 아닌가? 신문 기사, 칼럼, 논문, 책 같은 문자 매체만이 ‘비평’의 자격을 가진다는 생각이야말로 문자 매체가 지적인 측면에서 시청각적 매체보다 우위에 있다는 전제에서 시청각적 매체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이다.

해가 저무는 초저녁, 찢어진 그물망과 현수막들이 지저분하게 걸린 공사장. 크레인 근처에서 높고 커다란 불길이 터져 나오고, 크레인 높이에 약간 못 미치는 거대한 근육질의 괴물이 불길에 움찔한다. 넷플릭스 시리즈 〈스위트 홈〉 예고편 화면 캡쳐.

‘사회비판 콘텐츠’는 그 자체로 이미 사회에 대한 비평이며, 각 작품은 다양한 플랫폼을 가로질러 의견들이 각축을 벌이는 일종의 공론장으로도 기능한다. 이를테면 〈오징어 게임〉에서는 ‘한미녀’라는 캐릭터가 여성혐오적인지 아닌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고, 〈지금 우리 학교는〉에서는 성폭력 재현의 적절성이나 ‘여성 민폐 캐릭터’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이는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고 그에 대한 어떤 주장을 전개하고자 다양한 가정(assumption)이나 이야기를 동원하는 글이 잘못된 은유나 논거를 활용한 것에 대한 비판이 벌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주디스 버틀러는 나를 살게 하는 규범 혹은 관계들이 나를 살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고 느낄 때, ‘비평’이 등장한다고 말한다. 이때 비평이란 “다른 삶의 양식의 가능성을 열기 위해서 삶이 규제받는 관점이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든 폭력적인 학교든, 어떤 형태로든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동시에 무너뜨리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등장하는 작품들이 그 자체로 비평이며 공론장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작품을 만드는 이들은 무너진 세상을 내내 보여주다가 결말에 이르러 ‘그래도 인간 안에 존재하는 일말의 희망’을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나아갈 책임이 있다. 위기, 파국과 멸망보다 필요한 건 재건과 생성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작품의 책임은 문제를 보여주는 데까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작품들은 문자 매체와 달리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력을 지극히 구체적인 모습과 소리로 만들어내어 사람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그 형식 안에 이미 지닌다. 절망적인 세상을 다루는 작품을 만들려면 그러한 세상을 다양한 소품과 세트장, 사람들의 몸과 감정, 그리고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일단 물질적으로 실현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지금보다 살 만한 세상을 작품으로 그려내는 일 또한 그러한 세상을 실제로 만드는 과정이다. 기왕 하나의 세계를 만들 것이라면, 지옥 같은 곳보단 살 만한 곳이 낫지 않겠나. 오히려 더 나은 세상의 가능성을 실제로 보여주는 일이야말로 지금 여기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일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온 세상이 지금 이곳 바깥을 상상하기 어렵게 만드는 데에만 골몰해서 사회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막연한 욕망과 상상력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는 역량과 그에 따르는 책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비평으로서의 미디어는 공허하고, 그러한 미디어에 대한 비평 또한 대체로 공허하다. 글의 형태이든 영상의 형태이든, 우리에게는 공허하지 않은 비평을 생산할 책임이 있다. 자본과 권력이 밀어줄 만큼 안전하고 화려해져 버린 절망의 비평 말고, 더 나은 세상을 파편적으로라도 상세히 설계하는 구체적인 희망과 재건의 비평 말이다.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관해기(증상이 일정 정도 가라앉아 통증이 거의 없는 시기)의 만성질환자. 장애인권동아리에서 활동하고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수업을 들으며 질병과 통증을 새로운 시좌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몸의 경험과 장애학, 문화인류학에 관심이 많고, 앞으로도 그것들을 공부하려 한다. 책 『난치의 상상력』, 『식물의 시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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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조현준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5, 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