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에는 김동선이 살았다 / 김윤영
[칼럼] 쫓겨나는 이들의 서울산책 종로를 걸으며 김동선을 생각한다
- 나의 청춘, 종로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쭉 경기도에서 자랐기 때문에 서울에 대해 나는 어느 정도 이방인이다. 특히 서울을 오가며 살 수밖에 없는 경기도인의 숙명 상 서울은 면이라기보다는 선과 점으로 연상되는 공간이었다. 서울과 나를 연결해 주는 것은 빨간 광역버스였기 때문이다. 빨간 광역버스를 타고 잠실운동장으로 가는 날은 콘서트가 있는 날이다. 빨간 광역버스를 타고 강남역으로 가면 시험이 끝나고 친구들과 괜히 몰려 나가는 날이다. 빨간 광역버스를 타고 종로를 가는 날은 가장 신나는 날이다. 신촌이나 홍대에 있는 클럽으로, 광화문의 교보문고와 대학로로 어느 날보다 값진 점을 만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늘 종로를 좋아한다. 종로구의 캐릭터인 웃고 있는 종도 귀엽고, 길을 걷다가 아무렇게나 고궁이나 오래된 골목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좋다. 종로에는 신기한 영화관도 많았다. 약간의 방황을 겪던 이십 대 시절 청춘답게 독립영화를 보면서 하루를 때우곤 했는데, 종로는 명동의 중앙시네마부터 종로2가 필름포럼, 낙원 상가의 서울아트시네마, 광화문 씨네큐브까지 이어지는 독립영화관의 집합소나 다름없었다. 영화와 영화 사이 빈 시간은 넉넉히 걸어 다니면서 우수를 불태웠다. 종로는 그러기 적당한 곳이다.
종로는 옛 친구, 구 애인들과 나눈 모든 추억의 본산이기도 하다. 창경궁으로 입장해 창덕궁으로 나와 인사동과 종로3가 골목들을 마냥 걷는 게 좋았다. 여름밤이면 굳게 닫힌 커다란 궐문 아래로 바람이 잘 분다. 그 아래 대충 앉아 맥주를 마시면 문 사이 바람이 에어컨처럼 시원하다. 관리노동자에게 혼날 수 있으니 추천하지는 않지만 소중한 추억이 궁궐 어귀마다 남아있다. 지금은 사라진 피맛골 생선구이집에서 밥을 먹고, 지금은 이전한 열차집이나 종로의 전설 육미, 혹은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면서 어른 된 기분을 즐겼다. 한번은 종로구청 앞 소시지집에서 아빠를 만난 적도 있다. 나의 단골 맥주집이 아빠의 30년 단골집이었다는 것을 알고난 이후 그 가게에 방문하는 일은 좀 줄어들었다.
그래서 종로에 대해 말하자면 끝이 없다. 종로에서 열린 집회는 또 얼마나 많았나. 종로2가에 가면 그런 날이 생각난다. 2006년 농활을 마치고 마을 농민들과 함께 서울에 올라와 한미FTA에 반대하는 집회에 참석한 날이었다. 함께 온 우리 읍 농민 회장님은 새까만 얼굴과 두꺼운 손마디가 멋있는 분이었는데, 고무장화 위로 걷어 올린 바짓단이나 가슴 앞주머니에 꽂힌 담뱃갑이 서울에서는 오려 붙인 듯 어색했다. 며칠의 농활로 까맣고 푸석해진 내 얼굴도 갑자기 서울을 만나니 생경해졌다. 땀 냄새 나는 행진단을 맞닥뜨린 서울 사람들은 구겨진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버스를 기다리던 시민들의 까칠한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도로 위를 행진하던 그때 회장님은 버스 정류장의 시민들을 향해 돌조각이 든 페트병을 흔들며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충주에서 농사짓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먹거리를 제가 만들어요. 농민들이 살아야 여러분도 삽니다. 거리로 나와 주세요. 함께 외쳐 주세요!” 우리 마을 농민회 회장님은 언제나 “WTO Kills Farmers”라고 쓰인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이경해 열사가 WTO 각료 회의에 항의하며 돌아가셨던 그 시기의 조끼였다. 그날 이후 한 번도 벗지 않았다는 낡은 조끼를 입고 뽀얀 얼굴의 냉담한 사람들을 향해 소리치는 농민의 모습이 내 눈에는 늘 어제인 듯 남아있다.
종로는 처음 거리 홈리스 상담 활동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매주 목요일 종각역에서 진행하던 ‘노숙인인권공동실천단’ 활동을 했고, 지금 함께 활동하는 동료들과 처음 정을 쌓은 곳도 그곳이다. 노숙의 일상도 종각역에서 처음 배웠다. 지하철 운행이 멈추고 한 시경 잠을 청해도 네 시면 역 청소가 시작돼 일어나야 한다는 것, 여름부터 가을까지 하수도에서 엄청 많은 모기가 올라온다는 것, 바닥에 앉아 있을 때 사람들의 발소리가 천둥처럼 들리는 것을 처음 알았다. 벽을 보고 앉아도 쏟아지는 시선은 뜨끈하게 등이 먼저 알아차린다는 것도, 지하철 역무원으로부터 받는 냉대에 어떤 상처를 입는지에 대해서도 조금 배웠다. 활동이 끝나면 활동가와 아저씨들 몇몇이 육미로 몰려가 6000원짜리 주꾸미데침 두어 그릇에 소주를 마셨다. 기본 안주인 오뎅국만 축내는 손님들이라 반갑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육미는 늘 편안한 곳이었다. 그리고 동선 아저씨(가명)를 처음 만난 곳도 종각역이었다.
- 1958년생, 김동선
1958년생 김동선. 말수는 적었지만 어렵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술 좋아하는 동선 아저씨는 쪽방에 살다 거리에 있다 했다. 동자동에도 살고, 종로3가 돈의동에도 살았다. 일거리가 생기면 몇 주씩 일을 나가기도 했지만, 술을 마시다 보면 계속 못 가기도 했다. 일이 없을 때는 고물을 줍거나 밥을 먹으러 서울 곳곳을 두 발로 다녔다. 우리는 집회 때 동선 아저씨 손수레도 곧잘 빌려 썼다. 손수레 위에 ‘빈곤의 감옥’도 올리고 ‘G20 반대’ 공도 올려서 함께 행진했다.
가평에서 자란 그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의 폭행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술을 먹고 들어오는 아버지 소리가 나면 언젠가부터 그의 어머니도 그를 집 밖으로 내보냈다. 매일 밤 이어진 아버지의 매질, 지긋지긋한 통증이 동선 아저씨의 집에 대한 기억이다.
학교에서는 똘똘하다고 선생님께 칭찬받은 기억도 있지만 아버지는 학교에 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어느 날 아버지는 교과서를 아궁이에 던졌다. 선생님은 집까지 찾아와 동선이를 학교에 보내 달라고 청했지만 아버지는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님이 오셨던 날 동선 아저씨는 많이 부끄러웠다고 한다. 동선 아저씨는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외양간에서 잠을 청하곤 했다. 아부지는 상상도 못 했겠지, 나는 외양간에 있었는데. 오십이 넘어서도 킬킬 웃는 농담거리였다.
십 대에 집을 나와 동선 아저씨는 건설 일을 시작했다. 동선 아저씨는 일을 잘한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는데, 실제 같이 일을 다니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거나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도 일거리가 찾아왔던 것을 보면 순 뻥은 아닌 것 같았다. 두 명 몫을 혼자 해내는 데다가 누구보다 꼼꼼하다고 늘 목소리를 높였다. 종각역에 박스집을 제대로 지어 전파한 것 역시 동선 아저씨였다고 한다.
예상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노숙 생활은 건강에 참 안 좋다. 영양가 적은 식사나 찬 바닥에 몸을 붙이고 있는 일은 몸에 구멍을 숭숭 내기라도 하는 것인지, 사오십 젊은 나이에 이가 빠지거나 더운 날에도 몸에 냉기가 가시지 않는다고들 한다. 주변 활동가들은 오랜 노숙 생활로 건강을 잃은 동선 아저씨가 기초생활수급자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부양의무자 기준이 있는 사회에서 수급 신청을 한다는 것은 부양의무자인 부모님에게 연락하고, ‘금융정보제공동의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동선 아저씨는 오랫동안 보지 않은 부모님과 그렇게 연락할 사람이 아니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 결심을 굳힌 어느 날, 동선 아저씨는 부모님을 찾아갔다. 오랜만에 찾는 고향이었다. 홈리스행동 활동가와 함께 만난 부모님께 동선 아저씨가 신청하려고 하는 기초생활보장제도와 ‘금융정보제공동의서’가 무엇인지 설명했지만, 부모님은 서류에 서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부모님의 거절에 동선 아저씨는 간청 한 번 더하지 않고 돌아 나왔다. 생각해 보면 그의 부모님은 동선 아저씨를 먼저 찾은 적이 없다. 동선 아저씨의 부모님에 대한 기억과 일말의 관심은 평생 일방적인 것은 아니었을까. 늙은 부모님의 집에서 “됐다, 그냥 가자” 하던 동선 아저씨의 말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을까, 아니면 상처였을까.
- 사나운 세상에서
이 질문을 던질 기회는 앞으로도 영영 없다. 착한 눈이 그렁그렁한 동선 아저씨는 2020년 2월 14일, 방에서 앉은 채로 발견되었다. 동선 아저씨가 실려 가고, 돈의동 쪽방촌 마을 이웃들은 그를 위한 작은 추모의 시간을 마련했다. 동선 아저씨의 몸은 병원에 머물러 있으니 빈소라 하긴 어렵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두 모였으니 의미는 꼭 같았다.
그곳에서 만난 그의 친구 이○○ 님은 동선 아저씨와 이십년지기 친구라고 했다. 함께 고물을 모으고 술 좀 작작 마시라며 싸웠다가 다시 만나 한잔하는 그런 친구였다고 한다. 술만 먹지 말고 밥도 챙겨 먹고 병원 좀 가라고 잔소리도 하다가, 잔소리가 싸움으로 번져 한동안 얼굴도 안 보다가 그래도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방문을 열어 보는 친구였다. 그날도 술병이라도 치워 줄까 하는 마음으로 방문을 열어 본 친구 이○○ 님이 동선 아저씨를 발견했다. 도무지 어디가 아프다는 말도, 병원 문턱 한 번 넘는 것도 거절하고, 하루를 술로만 채우던 동선 아저씨는 고단한 삶의 마지막까지 눕지 않고 떠났다.
사람들은 쉽게 거리의 인연이나 쪽방촌에서의 인간관계를 부정적인 것으로 짐작한다. 특히 사회복지의 소위 ‘사례 관리’는 가난한 이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독립적인 가계를 꾸리거나 사회적으로 괜찮은 관계로 이동하는 것을 발전이자 해결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동선 아저씨의 빈 병을 치워 주는 이○○ 님의 손길이 없었다면 아저씨를 언제 발견했을 것인가. 가족들의 동의하에 무연고 사망자로 화장되는 그때까지 어디서 동선 아저씨를 추모했을 것인가. 술이 몸에 나쁘다는 것을 알아도 마음의 구멍을 메우지 못해 빈 병을 팔아 다시 술을 먹는 나쁜 버릇을 누구와 공유하며 키득거릴 수 있을 것인가.
더 해로운 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관계보다 세상 쪽이었다. 아저씨는 수원, 분당, 성남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던 곳에서 가장 마지막에 투입되는 내장 전문 노동자였다. 야무진 손끝으로 마무리해야 폼 나는 일이다. 그는 관절과 근육, 그리고 시간을 녹여 멀끔한 건물을 마무리했다. 몸이 녹듯이 일을 해도 임금은 체불되기 일쑤였고, 가난한 사람의 억울한 사정은 해결이 늘 어려웠다. 아저씨의 마지막 노동은 고물이었다. 박스를 100킬로그램씩 이고 지고 테이프를 뜯어내고 깨끗하게 포개 받을 수 있는 돈은 3000원, 4000원. 쪽방의 한 달 월세는 못해도 20만 원. 거리와 쪽방을 왔다 갔다 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불안정한 일상은 어쩌면 술 때문이 아니었다. 똑똑한 사람들,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가장 빠르게 올라섰다는 이 나라의 경제는 언제나 아저씨를 나쁜 계약관계 아래 두었다. 아저씨의 몸과 마음은 자유로운 시장 경제 아래 체계적으로 착취당했다.
동선 아저씨는 김-동-선 세 글자만 쓸 수 있었다. 자존심 센 동선 아저씨는 그걸 결코 남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5년을 알고 지낸 뒤에야 알았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비결은 아라비아숫자였다. 선생님 말씀대로 그는 비상한 기억력을 가졌음이 틀림없는데, 글씨 모르는 걸 티 내지 않기 위해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통째로 외우고, 버스 노선을 통째로 외웠다. 덜 준다고 자세히 따질 방법은 없었지만 ‘굴러먹은 통밥’으로 월급 명세서를 셈해 보았고, 간판 대신 전화번호를 눈에 익혀 두었다. 그러나 세상은 아라비아숫자만큼도 평등한 곳이 아니었다. 사나운 착취의 세계에서 글씨를 모른다는 것은 단지 부끄러움이 아니라 약점이 된다. 나쁜 사람에게 걸렸다가는 어떤 서류인지 까맣게 모른 채 서명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 뜻도 읽히지 않는 세상에서 위태롭게 밟아 간 동선 아저씨의 삶의 무게는 얼마인가.
- 종로에는 김동선이 살았다
2019년 여름에 마지막으로 만났던 동선 아저씨는 무척 자그마했다. 슬픔 아니면 술 같은 것이 그를 천천히 녹여 버린 것 같았다. 술도 많이 먹고 자존심도 강한 사람, 뻣뻣하고 성질도 잘 내지만 위악이라곤 없는 사람, 그래서 실제 사람을 깊이 미워할 줄도 모르는 그런 사람 김동선이 60여 년의 여정을 마치고 잠들었다.
큰 건물에 가장 비싼 회사들이 밀집한 종로에는 오늘도 동선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종로 대로를 한 골목만 벗어나면 밀집한 쪽방과 고시원에, “빈방/월방”이라는 알쏭달쏭한 메시지가 붙은 여인숙에. 하염없는 하루를 보내기 위해 빈 의자와 맥도날드와 5000원짜리 백반집을 찾는 노인들 사이, 1000원짜리 두 장에 간단히 머리를 밀어주는 길거리 이발소에 일렁이는 삶이 있다.
종로를 걸을 때면 이 길을 걸었던 사람, 동선 아저씨를 기억한다. 종로와 청계천 일대가 개발될수록 이들의 자리도 어떻게 줄어들지 알 수 없다. 강남에 사는 쪽방 건물주들은 쪽방 월세를 받는 것보다 더 큰 개발이익이 보장될 때 미련 없이 건물을 비워 버릴 테니 말이다. 이 도시를 함께 만들어 왔으되 아무런 지분을 얻지 못한 사람들의 삶의 자리가 10년 뒤, 20년 뒤에 종로에도 남아있을까. 꼭 그랬으면 한다.
김윤영의 쫓겨나는 이들의 서울산책
빈곤사회연대에서 활동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여러 도시에서 자랐다. 가난한 이들을 쉽게 쫓아내고, 머문 자리마저 빠르게 지우는 도시에 애증이 있다. 서울 곳곳에 스며든/지워진 역사를 되돌아보고, 가난한 이들이 빼앗긴 공간과 권리에 대해 돌아보는 ‘다크투어 칼럼’을 한 달에 한 번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