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병원 1만7천 개 중 홈리스가 갈 수 있는 병원은 13개뿐

인권위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 폐지” 권고 복지부 “노숙인 진료시설 1년간 확대” 엉뚱한 대안 내놔 의사협회 “노숙인 진료시설 확대는 의료기관 자율성 침해” 홈리스 건강권 침해 심각… “새 정부 의지만 있으면 당장 폐지 가능”

2022-04-06     하민지 기자
기자회견 참가자가 ‘홈리스 차별하는 진료시설 지정제도 전면 폐지하라!’라고 적힌 노란색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하민지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가 보건복지부에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를 폐지하라고 권고한 지 석 달이 다 돼 가는데, 복지부는 폐지는커녕 노숙인 진료시설을 1년간 한시적으로 확대한다는 엉뚱한 대안을 내놨다.

이런 가운데 홈리스 당사자들과 홈리스행동 등 시민사회단체는 6일 오전 9시 30분, 서울시 종로구 대통령직인수위원회(아래 인수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인수위는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를 폐지하라”라고 촉구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는 지난 2월, “노숙인 복지사업의 지방이양 결정에 대체로 반대”한다는 의견을 밝히고 지난달에 홈리스 무료급식소 배식 봉사를 한 번 했을 뿐, 공약집에는 홈리스 관련 내용이 없는 상황이다.

기자회견 현장.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현수막에는 ‘10년간 계속된 건강권과 평등권 침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인수위원회의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 폐지 촉구 기자회견’이라 적혀 있다. 사진 하민지

- 서울 시내 병원 1만7천 개나 있는데 홈리스가 갈 수 있는 곳은 고작 13개뿐

2012년 6월 신설된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는 의료급여 수급자인 홈리스가 지방자치단체가 지정한 진료시설에서만 의료급여를 신청할 수 있게 한 제도다. 즉, 홈리스는 정해진 병원에 가야만 의료급여를 적용받아 적은 비용으로 진료를 받을 수 있다. 다른 병원에 가면 의료급여를 신청할 수 없어서 병원비를 그대로 내야 한다. 의료급여 수급자 중 이런 제도가 적용되는 사람은 홈리스뿐이다.

2021년 12월 기준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전국 노숙인 진료시설은 289개다. 이 중 보건소가 213개로 전체의 73.7%를 차지한다. 보건소에서는 전문의 진료를 받기가 어렵기 때문에 보건소가 노숙인 진료시설로 지정된 건 크게 의미가 없다.

병·의원급 진료시설은 전국 76개에 불과하다. 76개 중 13개가 서울에 있다. 서울 시내 병원 1만 7339개(2018, 행정안전부. 보건소·보건지소 제외) 중 서울에서 생활하는 홈리스 3895명(2020, 서울시)이 갈 수 있는 병원은 고작 13개뿐이라는 뜻이다.

지방은 더 심각하다. 광주시와 세종시 노숙인 진료시설 중 병·의원급은 하나도 없다. 울산시와 제주도는 1개, 대구시·인천시·대전시·충청북도는 2개, 경상남도는 3개밖에 없다.

이 때문에 홈리스는 아파도 병원에 가기 어렵다. 가더라도 서울 각지에 흩어진 13개 병원을 찾아 이동하는 데 긴 시간을 들여야 한다. 차비가 없어서 아픈 몸을 이끌고 오랜 시간을 걸어가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를 설명한 그림. 많은 병원 중 홈리스가 갈 수 있는 병원이 거의 없다는 걸 나타내고 있다. 사진 하민지

- 인권위 권고 무시하는 복지부, 돈 되는 진료만 하는 민간병원 편든다

인권위는 지난 1월 19일,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를 폐지하라고 권고했다. 인권위는 이 제도가 의료급여를 받는 홈리스의 평등권과 의료접근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복지부는 인권위 권고를 무시한 채 엉뚱한 방안을 내놨다. 앞으로 1년간, 감염병 ‘주의’ 단계 이상의 위기경보가 발령됐을 때 노숙인 진료시설을 확대한다는 고시를 제정했다고 지난달 22일 발표했다. 이마저도 1·2차 의료급여기관에 한정되고, 종합병원 같은 3차 병원은 제외된다.

안형진 홈리스행동 활동가는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가 생긴 지 10년이 됐다. 10년간 많은 홈리스가 건강권을 침해받았다. 기저질환 관리를 포기했고, 조금 아픈 걸 참았다가 큰 병으로 키웠다. 이 제도를 폐지하라고 10년 동안 꾸준히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성토했다.

복지부는 건강보험료 재정건전성과 의료쇼핑에 대한 우려로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 폐지에 부정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형진 활동가는 “복지부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문제(의료쇼핑 등)를 앞세우면서 현재 발생한 문제(홈리스 건강권 침해)를 덮고 있다. 이제 새 정부가 들어선다. 윤석열 당선자 공약집에는 홈리스 공약이 없다. 오늘(6일) 우리가 제출한 요구서를 자세히 보고 인수위가 이 제도를 폐지하겠다고 반드시 약속해 달라”고 요구했다.

전진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정책국장에 따르면 대한의사협회는 감염병 주의 단계 이상 위기경보 발령 시 노숙인 진료시설을 확대한다는 복지부 고시 제정에 ‘의료기관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의견을 냈다.

전진한 정책국장은 이를 비판하며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는 민간병원이 노숙인을 진료하지 않는 걸 법적으로 보장해 주는 장치가 됐다. 의사협회는 벌써 ‘돈 안 되는 노숙인 진료를 거부할 자율성’을 주장한다”며 “이런 차별적 제도를 유지하는 국가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 민간병원 의사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라도 인수위가 이 제도를 하루빨리 없애겠다고 약속해야 한다”고 성토했다.

김도희 변호사가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 90년대에 폐지된 제도가 홈리스에겐 아직도… 정부 의지만 있다면 당장 폐지 가능

1990년대 당시에는 홈리스뿐 아니라 당시 생활보호대상자, 의료부조대상자 등 가난한 사람 모두가 ‘의료보호진료기관’으로 지정된 병원에서만 진료와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 제도는 1999년 7월에 폐지됐다. 대부분의 의료기관이 의료보호진료기관 지정을 기피해, 의료보호 대상환자 진료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이유에서다. 지금 홈리스가 겪고 있는 상황과 똑같다.

김도희 사회복지공익법센터 변호사는 이 같은 사례를 언급하며 “홈리스는 여전히 1999년 이전을 살고 있다. 한국은 시대를 역행해서, 20년도 더 된 낡은 관행을 떨치지 못 하고 있다.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한 차별이고 헌법상 평등권 침해”라고 규탄했다.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는 의료급여법 시행규칙 3조와 노숙인복지법 시행규칙 5조에 따라 시행되고 있다. 즉, 국회의 입법절차 없이 시행규칙 개정만으로 이 제도는 사라질 수 있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을 국회 입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질병관리본부가 상황에 맞게 바꾸듯, 정부 의지만 있다면 이 제도를 금방 폐지할 수 있다.

김도희 변호사는 “차기 정부의 의지가 중요하다. 법을 개정하지 않아도 된다. 의지만 있다면 취임 당일에도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를 없앨 수 있다. 인수위가 홈리스도 평등하게 건강권을 보장받는 사회를 위해 이 제도를 완전히 폐지하길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정성철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은 “홈리스의 건강을 생각한다면 이 제도 폐지는 굉장히 시급한 일이다. 인수위가 국정과제에 포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기자회견 후 홈리스 당사자들과 시민사회단체는 인수위에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 폐지를 촉구하는 요구서를 제출했다.

인수위 관계자가 요구서를 받아가는 동안 구호를 외치고 있는 활동가들. 사진 하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