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선로에 떨어져 본 적 있나요? / 김헌용
안전문 없던 시절, 수많은 시각장애인들이 승강장에서 추락 N 번째 사망자가 될 뻔했던 그 시간, 장애인의 피로 만들어진 이동권 잠깐 멈췄다가 같이 가는 사회를 꿈꾸며
- 나에게도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
나는 시각장애인으로 평범한 중학교 영어교사이다. 2013년에는 잠시 교직 생활을 멈추고 대학원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 새로운 곳에 가면 늘 그렇듯 초기에는 길을 익히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그래도 그때는 마냥 기뻤다. 여한 없이 공부하고 친구들과 헤어져 밤늦게 집에 돌아올 때면 몸은 고단해도 가슴은 벅찼다. 그런데 그렇게 밤늦게 들어오던 어느 날, 사달이 나고 말았다. 텅 빈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친 것이다.
휘적휘적 흰 지팡이를 휘두르며 반대편 플랫폼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발밑이 쑥 꺼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내 몸이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서둘러 일어나 주변을 더듬어 보고선 선로에 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필 그 역은 지하철 안전문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역이었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늦은 시간이라 배차 간격이 길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승강장 위에서도 소동이 일었다. 내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올라와 보려고 시도했지만, 불가능했다. 누군가는 역무원을 불렀으리라. 하지만 시민들의 손이 더 빨랐다. 뒤따라오던 아주머니들 몇 분이 내 양팔을 잡았고 순식간에 내 몸을 승강장 위로 끌어올렸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학창 시절, 누군가 지하철 선로에 떨어졌다는 것은 친구들 사이에선 특별한 뉴스거리가 아니었다. 동창 중 한 명은 선로에 떨어지자마자 지하철이 들어왔지만, 몸을 구석으로 굴려 목숨을 건졌다고 했다. 나이가 조금 있던 아는 형은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내게도 언젠가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지하철에 안전문이 설치되기 시작하면서 그 위험은 사라진 줄 알았다. 하지만 사업이 상당히 진행된 2013년, 안전문이 아직 설치되지 않은 역사 중 한 곳에 우연히 내가 갔고, 나는 떨어졌다.
그 후에도 슬픈 소식은 계속 들려왔다. 그 일이 있은 지 1년 남짓 지났을 무렵, 아는 동생이 선로에 떨어져 지하철에 치여 하반신마비가 되었다. 아는 시각장애인들과 그 역으로 달려가 시위를 했다. 그 사건 덕분에 안전문 설치 사업은 더욱 속도를 내게 되었지만, 그 친구는 시각장애에 하나의 장애를 더 얻게 되었다. 지금 우리 모두가 누리는 한 줌의 안전은 이렇게 많은 장애인의 죽음과 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비장애인들은 잘 모른다.
- 학생들에게서 받은 뜻밖의 선물
그럼에도 지하철은 그나마 가장 안전한 대중교통에 속한다. 내가 대학원을 마치고 교직에 복직했을 때 지하철은 다시 나의 정든 출퇴근길이 되었다. 교사 임용 후 두 번째로 발령받은 학교는 교통과 환경 면에서 훌륭한 곳이었다. 싱그러운 풀냄새가 진동하는 평온한 동네였다.
새 학교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봄날, 내가 가르치는 중학교 1학년 아이들이 나를 찾아왔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프로젝트를 하나 하고 있다며 학교생활에 어려운 점이 없냐고 물었다. 한참 골똘히 생각하다가 출근길에 점자유도블록이 없다는 점을 이야기해주었다. 아이들은 별다른 대구도 없이 금방 돌아갔다. 당연히 그날의 대화도 곧 내 머리에서 잊혔다.
그런데 두 달쯤 흘렀을 때, 출근길에 지하철역에서 나와 지상에 발을 디뎠는데 며칠 전만 해도 없었던 올록볼록한 것이 발바닥에 느껴졌다. 반신반의하며 몇 걸음을 더 내딛고 나서야 그것이 점자유도블록인 것을 알았다. 내 얼굴엔 나도 모르게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이미 어느 정도 익숙해진 길이었지만, 점자유도블록은 화룡점정이었다. 흰 지팡이에만 의존하지 않고서도 정확하게 방향을 잡을 수 있었으므로 그것이 없을 때와는 이루 비교할 수 없는 안정감을 느꼈다.
신이 나서 거의 뛰다시피 학교로 갔다. 알아보니 예상대로였다. 학생들은 그날의 대화 이후 구청에 민원을 넣었고, 구청은 예산이 만들어지는 대로 공사를 단행한 것이다. 얼마나 기뻤는지 그 후로 기회가 될 때마다 그 학생들에 대해 칭찬했다. 그 학교에 있는 5년 내내 새로 들어오는 모든 학생에게 선배들의 선행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도 선배들을 자랑스러워하며 손뼉을 쳤다. 구청에 민원을 넣었던 아이들은 물론, 그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도 아마 자신의 작은 실천 하나가 세상을 얼마나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지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 사건을 통해 무언가를 배운 쪽은 오히려 나였다. 그간 나는 장애를 ‘극복’한 교사가 되려고만 했지, 아이들에게서 무언가를 받으리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그런 나의 ‘찌질함’에 한 방 먹인 것이다. 교사와 학생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채워주는 쌍방의 관계란 것을 아이들이 직접 가르쳐준 셈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장애 극복’이란 말은 쓰지 않는다. 나와 함께하는 이들이 나의 장애를 받아들여 준다면 그때부터 장애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 이동권 투쟁의 궁극적 목표는 ‘함께 살기’
요즘 세간에 어지러운 말들이 떠돈다. 지하철 시위를 하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시민을 볼모로 잡은 채 장애인 이동권과 관련 없는 요구를 하고 있다’는 말말이다. 이 말은 하버드에서 공부한 유력한 정치인,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장애인 이동권은 중요하지만 다른 시민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시위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일갈했다. 그의 준법정신을 높이 산다. 하지만 그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지하철에서 죽은 N 번째 장애인이었을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이동권은 사람의 피 값이 묻은 권리이다. 이러한 장애인 이동권과 대중의 불편을 과연 저울로 잴 수 있는가? 무엇보다 장애인의 삶과 시민의 삶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장애인의 이익과 시민의 이익이 별개인 것처럼 갈라치기 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소박하다. 우리의 삶이 결국 이동의 연속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이동하자는 것이다. 내가 지구 끝까지 갈 수 있다고 한들,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줘가며 이동해야 한다면 그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지금까지 바로 그 이유로 장애인들은 바깥으로 나오지 못했다.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피해가 될까 봐, 가게에 손해를 끼칠까 봐, 혹은 우리의 모습 자체로 누군가에게 거부감을 일으킬까 봐. 그런데 이렇게 눈치를 봐야 하는 사회는 제대로 된 사회가 아니다. 장애인을 ‘격리해야 할 존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제 장애인의 이동을 제한하는 이 사회 전체가 변해야 하지 않을까.
이동권 투쟁을 출근 시간에 했던 것은 바꿔 말하면 우리의 출근 자체가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이동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같이 배우러 가고, 같이 일하러 가고, 같이 놀러 가고, 그래서 결국 우리가 함께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우리가 탈시설과 교육권과 노동권과 이동권을 다 같이 말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애초에 따로 얘기할 수 있는 속성의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논의되지 않는다면 결국 저상버스 도입률, 엘리베이터 설치율과 같은 ‘몇 퍼센트’라는 통계 숫자에만 집착하게 된다.
우리는 숫자로 치환될 수 없는 존엄한 삶을 살고 싶다.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유예되었던 그 삶을 살기 위해 시민들께 온몸으로 이야기하는 중이다. 그것을 이해해주신다면, 함께 가기 위해 잠깐 같이 멈춰주시길 부탁드린다. 그리고 다시 출발할 때는 같이 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우리 같이 살자고, 어렵게 내민 손을 기꺼이 잡아주시길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그때 선로 위에서 뻗친 나의 두 팔을 굳게 잡고 당겨준 그분들처럼.
필자 소개
김헌용. 신명중학교 영어 교사, 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동조합 위원장. 장애, 외국어, 음악을 평생의 주제로 삼아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6세에 실명했고, 2010년에 서울에서 영어 교사가 되었습니다. 경원중학교, 구룡중학교에 이어 현재는 세 번째 학교인 신명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