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체에 떠넘긴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이제는 국가가 나서라”

최중증장애인 우선 채용하는 일자리 노동자와 전담인력 수 턱없이 모자라 전권협 “고용노동부가 책임져라!”

2022-04-08     이슬하 기자

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아래 권리중심공공일자리)가 지자체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이제는 중앙정부 차원에서 제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전국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협회(아래 전권협)는 7일 오후 2시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고용노동부에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제도화를 촉구했다.

서울고용노동청 앞에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모여있다. “이것도 노동이다”라고 적힌 노란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눈에 띈다. 사진 이슬하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자본주의 시장 내에서 ‘노동할 수 없는 몸’으로 여겨진 최중증장애인을 우선적으로 고용한다.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는 대한민국 정부와 지자체에 유엔장애인권리협약 홍보를 권고한 바 있는데, 그 역할을 이들이 대신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들은 권익옹호, 문화예술, 장애인식개선교육, 이렇게 3가지 직무를 수행한다.

이는 기존의 이윤 중심, 생산성 중심의 노동 개념에 균열을 낸다. 자본주의 시장 내에서는 민간기업에 고용돼 자본의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것만이 노동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자본의 이익이 아닌, 국가와 지자체가 중증장애인을 고용해 ‘공공의 가치 창출’을 목표로 한다. 여기서 공공의 가치란 ‘장애인의 권리’다. 이때 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 고용된 중증장애인 노동자들은 ‘권리 생산의 주체’가 된다. 지역사회에서 도저히 함께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돼 배제됐던 증증장애인들이 그들 스스로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권리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노동’이 되는 것이다. 이는 국가와 지자체가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이기도 했다.

- 최중증장애인, 탈시설장애인 우선 채용하는 일자리

이처럼 ‘노동’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는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지난 2020년 7월 서울에서 260명 규모로 시작된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2022년 4월 현재 경기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춘천시 등에서 총 650여 개의 일자리 사업으로 확대됐다.

최용기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은 “생산성과 효율성을 따지는 노동시장에서 우리 최중증장애인은 언제나 철저하게 배제돼왔다. ‘일할 수 없는 몸’, ‘쓸모없는 몸’을 지닌 사람으로 규정됐던 우리는 권리중심공공일자리가 없었다면 ‘나도 일하고 싶다’는 꿈만 꾸면서 살아야 했을 것”이라고 의미를 짚었다.

신동권 중랑장애인자립생활센터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이슬하

“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서 일하기 전에도 취업을 시도해봤지만, 저한테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 예전에는 허무하게 보냈던 시간을 지금은 알차게 보내고 있습니다. 월급을 받아서 청약과 적금을 들고, 부모님 생활비를 보태드린 뒤 남은 돈을 용돈으로 쓰고 있습니다. 근무하면서 장애인 편의시설 실태조사를 했는데, 저도 장애인이지만 잘 몰랐던 것들을 직접 눈으로 보며 알게 됐습니다. 저도 이제 중증장애인의 평등을 위해 일하는 떳떳하고 멋있는 노동자로 살고 있습니다.” (신동권 중랑장애인자립생활센터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특히 탈시설장애인이 일할 수 있는 일자리라는 점에서 더욱 가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애인은 ‘일할 수 없는 몸’이라고 낙인찍혀 지역사회에서 배제된 채 수용시설에 갇혀 살아야 했다. 그러나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노동’을 재정의하고 중증장애인도 노동자로 자신의 권리를 이야기할 수 있게 한다.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은 “탈시설권리와 노동권은 연결돼 있다. 시설에 있는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면 나오고 싶지 않을 것”이라면서 권리중심공공일자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장기 노들장애인야학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가 문화공연을 펼치고 있다. 무대에 올라 능숙하게 청중의 박수를 유도한 그가 ‘내 나이가 어때서’를 열창하고 있다. 사진 이슬하

- 노동자와 전담인력 수 대폭 늘려야

이런 권리중심공공일자리가 전국에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중앙정부 차원의 제도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이 사업은 전액 지자체 예산으로 운영되고 있다.

지자체에서 운영하다 보니 일자리 규모가 작다. 서울시는 현재 350명의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를 채용하고 있지만, 서울시 등록장애인 중 중증장애인 인구는 15만 명(2020년 기준)에 이른다. 전국으로 넓혀봐도 약 98만 명(2021년 기준)의 중증장애인에 비해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총 650여 개로 턱없이 모자란다.

일자리 전담인력 확충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사업 위탁기관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는 전담인력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울시는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가 지난해 275명에서 올해 350명으로 75명이 늘었는데, 전담인력의 수는 15명으로 동결했다. 전담인력 1명이 중증장애인 23명 이상을 지원하게 된 것이다. 경기도의 경우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가 지난해 25명에서 올해 200명으로 175명 늘었는데, 전담인력은 10명만 증원했다. 지난해 전담인력이 한 명도 없었던 것에 비해서는 나아졌지만, 전담인력 1명이 중증장애인 20명을 지원해야 하는 상황이다.

조우리 용산행복장애인자립생활센터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전담인력은 “전담인력이 지금 숫자로는 안 된다. 최소한 노동자 5명에 전담인력 1명꼴은 돼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조우리 용산행복장애인자립생활센터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전담인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이슬하

또한 중증장애인의 안정적인 소득을 위해 권리중심공공일자리를 지속가능한 일자리로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현재는 1년마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수탁기관을 선정한다. 따라서 노동자와 전담인력은 1년마다 수탁기관 선정 여부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강인호 김포장애인야학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는 “매년 (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 참여할 수 있을지 가슴을 졸이는 게 싫다. 우리는 일을 계속해서 돈을 벌고 싶고, 나중에 퇴사할 때는 퇴직금도 받고 싶다. 중증장애인 모두가 고용유지 때문에 두려움에 떨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올 때까지 열심히 투쟁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전권협은 황보국 노동부 통합고용정책국 국장, 이부용 장애인고용과 과장 등과 면담을 가졌다. 전권협은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제도화를 위한 법적 근거 마련 △권리중심공공일자리 5천 개 보장 △전담인력 천 명 확충 등을 요구했다. 아울러 전권협의 법정단체 등록허가를 요구했다.

노동부 측은 “제도화를 위한 매뉴얼 개발은 4월 20일까지 실무협의하고 6월부터 착수할 수 있도록 하겠다. 다만, 법안과 예산 문제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전권협의 법인 설립 승인 여부도 답변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포천나눔의집장애인자립생활센터 권리중심공공일자리 권익옹호 노동자들이 만든 피켓의 모습. “모든 사람은 일할 권리가 있다. 이것도 노동이다”라고 적혀 있다. 사진 이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