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 바퀴가 걸렸던 그 승강장에서 / 안희제

[칼럼]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2022-04-29     안희제
머리가 새하얀 어르신이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휠체어 탄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다리 등이 있다. 사진 강혜민

엘리베이터도 많아졌고, 저상버스도 있는데 무엇이 그렇게 불만이라고 ‘일반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지하철 운행을 방해하냐는 말들이 사방에서 범람한다. 그래, 이제는 과거와 달리 스타트업을 이끄는 장애인도 있고, 법조계에서 일하는 장애인도 있고, 장애대학생도 있고, 장애인 교수도 있으니, 그런 성공의 서사들만 얼핏 본 사람들은 ‘장애인 살기 좋아졌다’고 정말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2016년, 나는 대학 안에 있는 장애인권동아리에 가입했다. 학교 근처 상권을 조사했다. 상인들의 반응은 천차만별이었고, 솔직히 말하면 불편한 기색을 비치는 이들이 더 많았지만, 어쨌든 우리의 조사로 만들어진 ‘배리어프리 지도’는 학내의 장애학생들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로부터도 꽤 좋은 반응을 얻었다. 어떤 장애학생들은 대기업이 주관하는 프로젝트에 참가해서 장애인 관광 코스를 검토하고, 개발하기도 했다. 변화한 게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학교 안에서 인기가 많은 행사들에 ‘장애학우석’을 적절한 위치에 확보하려고 할 때마다, 행사를 주관하는 단위는 ‘일반 학우의 여론’을 고려해야 한다며 우리의 의견을 묵살했다. 우리가 평소 쓰는 비속어나 속담에 장애인 비하가 얼마나 많은지 그 목록을 작성했을 때도, 좋은 반응도 많았지만 “억지 부리지 말라”는 의견들도 종종 보였다. 평소에 장애인권 활동을 ‘착한 것’으로 여기던 이들은 자신들의 ‘당연한 일상’에 변화가 필요한 순간마다 등을 돌렸다.

대학의 장애인권동아리 활동은 다른 단체들과 싸울 때가 아니면 나에게는 대체로 즐거웠다. 그 즐거움이, 이 활동이 내게 주는 보람이 사실은 얼마나 편협했는지 깨달은 것은 2016년의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날은 내 친구가 장애등급제 폐지와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외치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광화문역 농성장에서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의 사회자를 맡은 날이었다. 나는 동아리 친구에게 연대방문을 제안했다.

우리는 경복궁역에서 만나서 농성장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장애인콜택시 대기 시간은 길었고, 긴 리프트가 있는 광화문역보다는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는 경복궁역이 나았다. 경복궁역에 도착한 친구는 엘리베이터가 수리 중임을 발견했다. 다음 열차를 타려던 그때, 휠체어 바퀴는 열차와 승강장 사이의 틈에 꼈고, 주변의 시민들은 어찌할 줄 몰랐다고 한다. 몇 사람이 달려들어서 그는 간신히 지하철에 탈 수 있었고, 우리는 안국역에서 만나서 농성장으로 향했다.

맞다. 어떤 장애인들은 대학생도, 교수도, 변호사도, 스타트업 대표도, 유튜브도 한다. 대기업과 함께 그럴싸한 프로젝트도 진행한다. 그런데 콜택시 하나를 어떤 날에는 길게는 서너 시간까지도 기다려야 한다. 지하철을 탈 때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목숨을 걸면서 리프트를 타지 않으려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역으로 가도, 여전히 어떤 날에는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페이스북 캡쳐. 이준석. 3월 27일. 전체공개. 내일도 결국 한다고 합니다. 순환선 2호선은 후폭풍이 두려워서 못건드리고 3호선, 4호선 위주로 지속해서 이렇게 하는 이유는 결국 하루에 14만명이 환승하는 충무로역을 마비시켜서 X자노선인 3,4호선 상하행선을 모두 마비시키는 목적입니다. 결국 불편을 주고자 하는 대상은 4호선 노원, 도봉, 강북, 성북주민과 3호선 고양 은평 서대문 등의 서민주거지역입니다.

“순환선 2호선은 후폭풍이 두려워서 못건드리고 3호선, 4호선 위주로 지속해서 이렇게 하는 이유는 결국 하루에 14만명이 환승하는 충무로역을 마비시켜서 X자노선인 3,4호선 상하행선을 모두 마비시키는 목적입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페이스북에 저런 글을 올렸다. 원래 대체로 집회란 도로를 막고 행진하며 구호를 외치는 것처럼 ‘불편을 초래’하는 일이니, 지하철에서 벌어지는 이동권 시위라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다. 다만, 이준석 대표가 경복궁역에서의 집회를 ‘전략’으로만 생각할 때, 나는 그 ‘평범한’ 여름날을 떠올린다. 얼마 전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이 무릎 꿇은 바로 그 승강장에서, 6년 전 어느 여름날에 누군가의 휠체어 바퀴는 목숨과 함께 덜컥, 걸렸다.

‘일반’이라고 자신을 당당히 칭하는 이들은 우리가 과도한 요구를 한다고 말한다. ‘과도한 요구’라는 말은 정당한 권리를 다른 이에게서 무언가를 빼앗는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럴싸하고 멋진 장애인권 활동들을 멀리서 슬쩍 보곤 마음 따뜻해지지만, 자기 일상을 바꿔야 하는 순간이 되자마자 모욕을 쏟아내는 이들. 이쯤 되면 살 만하지, 정말 기특한 청년들이야, 니들이 뭐가 그리 힘든데, 세상 참 좋아졌어, 나 출근 좀 하자, 배리어프리라니 멋져요, 씨발 비키라고, 맞아 장애인도 시민이야, 병신들이 육갑하네.

길에 턱이 너무 많아서 삶을 유지할 수 없고,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리프트를 타다가 죽고, 지하철을 타다가 승강장과 열차 사이의 간격이 넓어서 죽을 수 있는 사회는 단지 장애인콜택시 몇 대 증차한다고 해결되는 ‘덜 정비된 사회’가 아니다. 그런 사회는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배제를 통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시설사회다.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의 넓은 틈새에 전동휠체어 바퀴가 빠졌다. 그 옆으로 비장애인이 지나가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도시 정화’, ‘사회 정화’, ‘사회 명랑화’ 같은 것들은 한국의 발전국가 시기에 등장한 구호들이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이 사회가 발전되어야 할 방향을 상상할 때 ‘오염’으로 여겨지는 존재들을 거리에서 제거하는 작업이 있었다. 정부는 경찰까지 동원해서 어떤 이들을 잡아갔고, 그들을 시설에 가뒀다.

노숙인, 혼자 다니는 아동이나 여성부터 (당시로서는 세부적으로 뚜렷이 구분조차 되지 않았던) 정신적 장애인과 신체 장애인까지, 사람들은 온갖 시설에 수용되었다. 정부는 이들이 시설 생활을 통해 ‘나은 삶’을 살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도시는 시설에 수용된 이들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당연한 전제에서 만들어졌다. 시설을 기반으로 도시 공간이 ‘정화’되고 유지될 수 있는 사회, 우리는 바로 그런 시설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이동권과 함께 탈시설, 지역사회 자립을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장애인이 지하철을 타는 일은 장애인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배제하고 만든 도시에 장애인이 등장함으로써 이 사회의 근본적인 폭력을 폭로하는 일이다. ‘일반 시민’과 ‘장애인 단체’라는 프레임으로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배제를 부추겨서 어떠한 진지한 논의도 사전에 차단하려는 정치인이 보호하는 것은 ‘일반 시민’의 편의도, 권리도 아니다. 장애인의 생명과 삶을 볼모로 잡아 성장하고 발전한 시설사회다.

장애인들이 지하철을 타는 게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이라면, 사회 혼란을 불러오는 일이라면, 그 질서와 사회는 무너져야 한다. 시설사회의 잔해에서 새로이 건설되어야 할 사회에 대한 고민은 휠체어 바퀴가 걸렸던 바로 그 승강장에서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지금 당장 이곳에 살아가는 나와 당신, 우리 모두의 몫이다.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관해기(증상이 일정 정도 가라앉아 통증이 거의 없는 시기)의 만성질환자.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며, 질병과 장애를 중심으로 사회를 고민하려 노력한다. 책 《난치의 상상력》, 《식물의 시간》, 《과학잡지 에피: 16호-장애와 테크놀로지》(공저), 《아픈 몸, 무대에 서다》(공저)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