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관위, 법원 강제조정에도 발달장애인 투표보조 끝내 거부
“투표보조 재개하라”는 법원 결정 무위로 돌아간 대선 대리투표 가능성 이유로 투표보조 불허한 선관위 “민주주의는 죽었다” 발달장애인들 분노
“발달장애인은 선택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신체장애인은 투표보조를 받아도 대리투표의 가능성을 묻지 않으면서 왜 발달장애인에게만 대리투표의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입니까? 이는 발달장애인은 투표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명백히 발달장애인을 차별하는 것입니다. 정당한 편의도, 투표보조도 지원하지 않으면서 발달장애인의 투표 가능성을 의심하는 것은 발달장애인을 이 나라의 국민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문윤경 한국피플퍼스트 대표)
법원의 강제조정에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아래 중앙선관위)는 발달장애인 투표보조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에 발달장애인들은 “민주주의는 죽었다”라며 중앙선관위 정문 벽면에 항의의 의미로 꽃을 달았다.
24일 오전 11시, 발달장애인 당사자단체 한국피플퍼스트 활동가들이 경기도 과천시 중앙선관위 앞에 모였다.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사전투표를 3일 앞둔 시점으로, 지난달 13일 항의방문 이후 한 달여만이다. 때늦었던 꽃샘추위는 낮 기온 26도의 초여름 더위로 바뀌었지만, 발달장애인의 참정권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은 그대로였다.
중앙선관위는 2020년 4월에 시행된 21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선거사무지침상 투표보조 대상에 발달장애인을 제외했다. 이에 장애계는 지난해 11월 법원에 임시조치를 신청했고, 지난 2월 법원은 강제조정을 통해 3·9 대선부터 발달장애인 투표보조를 재개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지난 대선에서도 발달장애인은 투표보조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중앙선관위는 사실상 발달장애인 투표보조를 거부했다. 지난 4일 장애계와의 면담에서 중앙선관위는 “(발달장애인 투표보조는) 공직선거법을 넘어서는 것”이라며 난색을 표했다. 중앙선관위는 공직선거법이 ‘시각 또는 신체장애인’에 대한 투표보조만 규정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보행 등 활동에 어려움이 있거나 손떨림 등의 ‘증상’이 있는 발달장애인만 투표보조를 받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는 지난 10일 중앙선관위가 각급선관위에 보낸 문서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제8회 지선 각급위원회 안내사항’이란 제목의 이 문서에는 ‘투표보조 관련 사례별 대응방안’이 담겨있다. 내용을 보면, “보행 등 활동에 어려움이 없어 보이는 발달장애선거인(또는 동행인)이 투표보조를 요청한 경우”에 “‘후보자가 누군지 몰라서’, ‘인지기능이 부족하여 보호자가 대신해주어야 해서’ 등 대리투표에 이를 수 있는 경우 투표보조 불가”라고 적혀있다.
중앙선관위의 조치에 발달장애인들은 “차별적”이라며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문윤경 대표는 “눈이 보이거나 걸어 다닐 수 있다 해도 투표용지의 글자와 숫자를 읽는 것 등을 어려워하는 발달장애인들이 있다. 그래서 투표보조를 지원해달라는 것인데 다른 사람이 대신 투표할 수 있다고 투표보조를 거부하고 있다. 이게 말이 되는가?”라고 분노했다.
김대범 서울피플퍼스트 활동가는 “우리는 2016년부터 발달장애인의 참정권 보장을 요구해왔다. 발달장애인은 참정권을 보장받기 위해 언제까지 기다려야만 하는가? 발달장애인도 유권자다. 새로 취임한 노태악 중앙선관위원장은 우리의 요구를 포스트잇에 메모라도 해라”고 힘줘 말했다.
강복순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서울지부 부회장은 “장애유형에 맞게 투표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것들이 투표현장에 갖춰져야 하는데, 국가는 그런 의무를 철저하게 외면하며 가장 기본적인 참정권마저 포기하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발달장애인 활동가들은 투표보조 외에 △이해하기 쉬운 선거자료 제공 △정당의 로고와 후보자의 사진 등이 담긴 그림투표용지 제작 △지역설명회와 모의투표 진행 등을 요구했다.
기자회견 직후 문윤경 대표, 김대범 활동가, 김수원 한국피플퍼스트 활동가는 중앙선관위에 항의서한을 전달하고, 중앙선관위원장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김휘정 중앙선과위 선거1과 주무관은 검토 후 회신하겠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내놨다.
활동가들은 6·1 지방선거 이후 중앙선관위에 투표보조 관련 차별구제청구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