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개인예산제 논의가 지닌 공허함과 무익함 / 김도현

현금지급제와 개인예산제, 무익하거나 혹은 나쁘거나 ①

2022-06-29     김도현

* 이 글은 2022년 6월 14일 탈시설정책위원회 주최로 진행된 ‘개인예산제와 장애인 탈시설’ 세미나에 필자가 제출한 토론문을 수정·보완한 것임을 밝혀둔다.

- 논의를 위해 확인해 두어야 할 것

주지하다시피 ‘서비스 현금지급제’(cash for care)란 활동지원서비스 등의 사회서비스를 현물이 아닌 현금으로 지급하여, 서비스 이용자가 시장에서 직접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말한다. 그리고 ‘개인예산제’(personal budgets)는 어떤 개인에게 제공될 사회서비스의 총량이 정해지면, 그 내에서 어떤 서비스를 얼마나 이용할지를 해당 개인이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캐서린 니덤(Catherine Needham)과 헬렌 디킨슨(Helen Dickinson)은 개인예산제가 많은 나라에서 호응을 얻게 된 것이 현대 사회의 중요한 두 가지 정책 서사(policy narrative), 즉 신자유주의적 공공부문 개혁과 인권 담론이 잘 엮여 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1) 신자유주의와 인권의 결합이란 마치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매우 모순적인 말이지만, 이러한 평가는 아마도 일정한 역사적 사태를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지난 40년간 신자유주의는 노골적으로든 소위 ‘제3의 길’이라는 수사 속에서든 유럽과 북미 대다수 국가에서 정책적 헤게모니를 행사해 왔고, 소수자들의 인권과 다양성을 신자유주의적 정책 추진을 정당화하는 외피로 활용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한 탈근대 담론의 부상과 소위 ‘문화적 전회’(cultural turn) 속에서 사회운동의 자유주의적 분파 역시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물결에 조응해 왔던 측면도 존재한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 사진. 사진 제20대 대통령실

다른 한편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에는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자유로운 정치적 권리, 자유로운 시장이 숨 쉬고 있던 곳은 언제나 번영과 풍요가 꽃 피었습니다”라는 문장이 나오는데,2) 이는 신자유주의의 주요 사상적 원천 중 하나인 미국 시카고학파의 거두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의 『자본주의와 자유』(Capitalism and Freedom)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은 프리드먼의 또 다른 저서 『선택할 자유』(Free to Choose)가 자신의 가치관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라고 직접 언급한 바 있다. 그러고 보면 ‘자유로운 시장’과 ‘선택할 자유’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그가 ‘소비자의 선택권’을 증진한다는 사회경제적 명분을 지닌 개인예산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니덤과 디킨슨 외에도 많은 논자가 지적한 것처럼 서비스 현금지급제와 연동된 개인예산제는 1980년대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적 복지 개혁을 하나의 사회정치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서구 사회에서는 ‘국가와 공공영역을 중심’으로 하여 ‘현물서비스를 기반’으로 구축되어 있던 사회서비스 영역을 민간 중심의 시장 시스템으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현금지급제 및 개인예산제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현금지급제/개인예산제는 흔히 소비자중심주의(consumerism)라는 이념에 따라 ‘공급자 중심에서 이용자 중심으로의 전환’이라는 원리에 기반을 둔다는 점이 강조되곤 하지만, 이는 절반만을 이야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핵심적인 지점은 공급자라는 항(項) 내에서 이루어진 ‘공공 중심에서 민간 중심으로의 전환’이었다.

여기서 우선 확인해 두어야 할 것은 첫째, 2차 세계대전 이후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공공 중심의 복지시스템을 구축했던 서구 사회와 우리나라는 그 제도적 토대가 매우 다르다는 점이고, 둘째, 현금지급제와 개인예산제는 일정하게 연동되어 도입되기는 했지만, 그 의미와 효과 면에서 서로 구분되는 시스템이라는 점이다. 원리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개인예산제는 현금지급제 없이도 구축될 수 있고, 역으로 개별 서비스를 현금지급제로 운영한다 해도 개인예산제라는 시스템을 도입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양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후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좀 더 상세히 언급하도록 하겠다.

- 현금지급제/개인예산제의 공허함 : 서비스 총량의 절대적 부족

개인예산제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것이 다 제각각이어서 제대로 된 토론을 진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맥락은 좀 다르지만, 우리나라에서 많은 논쟁이 되어 온 기본소득제(basic income)의 경우에도 구체적인 설계도를 두고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얼마간 추상적인 논의에 그치게 된다. 이는 기본소득제가 우파적 버전에서 좌파적 버전까지 매우 넓은 스펙트럼을 지니며, 핵심적으로는 기본소득의 액수(총액)를 어느 수준에서 정하고 재원을 어떻게 조달하느냐에 따라 매우 상이한 효과를 지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가 ‘110대 국정 과제’에도 포함시킨 장애 관련 핵심 정책으로 개인예산제를 천명한 후 이 제도는 말 그대로 핫이슈가 되었는데, 최근 관련 토론회 및 세미나에서 가장 활발하게 정책적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이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아래 보사연)의 이한나 부연구위원이다. 보사연이 2020년 발간한 연구보고서 『사회서비스 분야 개인예산제도에 관한 기초연구』의 책임연구를 맡은 이 부연구위원은 지난 3월 31일 국민의힘 이종성 의원이 개최한 토론회에서는 발제자로, 4월 18일 김예지 의원이 주최한 토론회에서는 토론자로 초청되었다.

그런 그가 근래 발표한 논문에서 제시하고 있는 개인예산제의 도입 방안은 결론적으로 비교적 간명하다. 현재 바우처 시스템을 통해 제공되고 있는 활동지원서비스, 주간활동서비스(18세 이상) 및 방과 후 돌봄서비스(청소년), 발달재활서비스에 대한 칸막이를 부분적 혹은 전면적으로 없애자는 것이다.3)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기획조정분과가 2022년 4월 작성한 국정과제 이행계획서의 내용도 이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에 장애아가족 양육지원서비스, 장애인 보조기기 교부, 장애인 응급안전알림서비스를 추가하는 방안 정도가 논의되고 있지만,4) 장애아가족 양육지원의 경우 18세 미만에서 선택할 수 있는 활동지원의 대체 서비스이고, 보조기기 교부와 응급안전알림서비스의 경우 예산의 규모와 서비스의 성격을 고려했을 때 개인예산제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미미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방식으로 개인예산제가 도입되었을 경우 장애인 대중과 그 가족들은 어떤 효과를 피부로 느끼게 될까? 우선 신체적 장애인들의 경우 현재 제공받고 있는 사회서비스가 사실상 활동지원서비스뿐이므로 별다른 변화가 없으며, 전체 장애인 중 9% 정도를 차지하는 발달장애인들이 실질적 대상이 된다고 할 수 있다.

4월 19일, 전국의 발달장애인과 가족 557명이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제’를 요구하며 삭발했다. 사진 이슬하

2022년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이 시작되던 시기, 전국장애인부모연대는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 체계 구축’을 촉구하며 557명의 동시 삭발 투쟁과 더불어 15일에 걸친 단식 농성을 진행한 바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정부는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다. 돌봄의 한계에 내몰린 장애인 부모가 자녀를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올해 3월부터 6월까지 3개월 사이 (언론에 보도된 것만) 다음과 같이 8명의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이 세상을 등지는 사건이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기존 서비스의 총량 내에서 칸막이를 없애는 개인예산제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까?

3. 02. 발달장애 딸 살해 후 극단 선택 시도한 50대 구속 영장 (경기 시흥시)

3. 02.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8세 발달장애 아들 입학식 날 살해한 모 (경기 수원시)

5. 17. 조카에게 폭행당한 지적장애인 사망 (전남 여수시)

5. 23. 발달장애 가정의 비극… 40대 엄마, 6세 아들과 투신 (서울 성동구)

5. 23. 뇌병변·발달 중복장애인 딸 살해 후 극단 선택 시도, 60대 모 체포 (인천 연수구)

5. 30. 발달장애 자녀 모 투신 (경남 밀양시)

6. 03. 발달장애 형제 홀로 돌보던 부 자살 (경기 안산시)

아래의 표에서 나타나듯 장애등급제 단계적 폐지가 시작된 2019년 하반기부터 2021년 상반기까지 신규로 서비스를 신청한 발달장애인 중 90.6%(14,817명 중 13,431명)가 장애인서비스지원 종합조사표의 15~13구간(활동지원서비스 월 60~120시간)에 몰려 있다. 발달장애인 대부분이 하루 2~4시간의 서비스를 지원받고 있고, 2~1구간(월 450~480시간)은 전무하며, 하루 8시간(9구간) 이상을 지원받은 사람은 1.2%인 185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주간활동서비스를 이용하게 되면 기본형(125시간)의 경우에는 활동지원에서 22시간을, 확장형(165시간)의 경우에는 56시간을 차감하고 있다. 이로 인해 종합조사표 15구간(60시간)에 해당하면서 주간활동서비스 확장형을 이용하는 발달장애인에게는 ‘월 4시간’의 활동지원이 남을 뿐이다. 나는 허울 좋은 개인예산제가 아니라, 이처럼 불합리한 서비스 차감이라도 폐지하는 것이 그들에게 훨씬 더 피부에 와 닿는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2019년 7월~2021년 6월 장애인활동지원 신규신청자 급여구간별 현황. 국민연금공단 자료를 장혜영 정의당 의원실이 재구성했다. 

- 현금지급제/개인예산제의 무익함 : 한국은 민간 중심의 준(準) 현금지급제도, ‘예산 효율화’ 효과 없어

많은 나라에서 현금지급제/개인예산제를 중심으로 정부와 장애계 간에 모종의 타협이 이루어졌던 이유 중 하나는 예산 집행의 효율성에 있었다. 즉 정부 쪽에서는 더 적은 비용으로 동일한 양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기를 바랐고(예산 절감), 장애계 쪽에서는 동일한 비용으로 더 많은 양의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서비스 확대). 영국에서 발간되는 국제적 장애학 저널 『장애와 사회』(Disability & Society) 사이트에서 ‘direct payments’로 검색을 하면 매우 많은 논문을 찾아볼 수 있는데, 관련 논문들 대다수의 논의도 그 비용효과성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영국에서 현금지급제로 전환하면서 발생했던 비용 절감 중 대부분은 기존의 현물서비스 시스템에서 다소 비대한 형태로 존재했던 인력(공무원 및 준공무원)의 인건비와 행정 비용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미 ‘준 현금지급제도(바우처)+유사시장시스템’하에서 파트타임 노동력을 활용함과 동시에 서비스 관리 업무가 비영리 민간영역에 위탁되어 있기 때문에, 비용 절감 효과가 발생할 수 있는 여지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시스템의 도입과 관리 비용으로 인해 추가적인 행정 비용이 발생할 가능성마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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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atherine Needham & Helen Dickinson, “‘Any one of us could be among that number’: Comparing the Policy Narratives for Individualized Disability Funding in Australia and England”, Social Policy & Administration 52(3), 2018, p. 734.

2) 문화체육관광부 국민소통실, 「[전문] 윤석열 제20대 대통령 취임사」,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2022. 5. 10.

3) 이한나 외, 「한국 사회서비스 분야 개인예산제도 도입에 대한 고찰」, 『한국장애인복지학』, 2020, 107~108쪽.

4) 이한나 외, 『개인예산제 운영 모형 수립 연구』, 2021,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14~215쪽.

▷ (이어서) 2부 개인예산제의 해로움과 우리의 대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