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진만이 인정받을 수 있는 고통인 사회에서 / 안희제

[칼럼]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2022-07-27     안희제

6월 중순, 온 가족의 목에 이상이 생겼다. 목이 따끔거리고, 기침이 나오고, 코가 막히고, 두통이 왔다. 평소에 가장 건강한 아버지까지 감기 기운이 왔다. 코로나19가 끝난 듯한 느낌으로 지내던 시점이었다. 밀접접촉자가 된 적은 수차례 있었으나, 우리 가족 중 누구도 확진자가 된 적은 없었다. 자가진단키트와 PCR 검사에는 매번 음성이 찍혀 나왔다.

전체 국민 중 누적 확진자의 비율이 30퍼센트를 넘어간 이후로 나와 친구들은 사실상 이 정도면 집단면역이 달성된 상태 아니냐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2022년에는 외식할 때도 별로 조심한 적이 없다. 면역억제제를 먹는 자가면역질환자인 나도 이렇게 지냈으니, 건강한 사람들은 얼마나 무감하게 지냈을까.

빨간 털의 곰돌이 인형이 파란색 마스크를 쓰고 누워 있다. 사진 언스플래시 

학교는 다시 대면으로 ‘돌아가고’, 직장들도 재택근무를 끝내고 출근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사회는 이런 걸 ‘위드 코로나’라고 불렀다. 이상했다. 코로나19가 터진 직후, 얼마 안 있으면 상황이 정리될 거라고 믿었던 2020년 봄에 나는 만약 코로나19가 끝나더라도 고위험군의 아픈 학생들은 한동안이나마 더 비대면으로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사방에 메일을 돌리고 다녔는데.

내가 생각한 ‘위드 코로나’는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코로나로 인해 드러난 사회의 약한 고리와 그에 대한 고려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가능성들로 다른 형태의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일이었다. 그런데 ‘위드 코로나’가 현실에서 지칭하는 사회란 누구든 코로나19에 걸릴 위험이 있지만 죽지는 않을 테니 일단 출근해야 하는 사회였다.

“차라리 코로나면 좋겠다. (나: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 응.”

가족이 모두 감기 기운이 왔을 때, 어머니는 자가진단키트를 사러 가면서 얘기했다. ‘차라리 코로나면 좋겠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평생 ‘건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지금도 자주 아프다. 6월에 감기 기운이 왔을 때 어머니는 기침을 많이 했고, 오랜만에 정말 방에서 나오기가 힘들 만큼 아팠다. 몇 주 동안 제대로 쉴 수 있는 날이 거의 없었고, 코로나19인지 감기인지 헷갈리던 그날도 다음 날에 있을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만약 코로나19 양성 판정이 나오면 그걸 근거로 집에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어차피 아플 거면 차라리 확진된 것이길 바라는 그 마음은 오히려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코로나19만이 정당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질병이 된 사회를 보여주는 듯했다. 원래도 지병이 있으니 그걸 핑계로 하루만 쉬면 안 되냐는 나의 이야기에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학생일 때는 핑계대도 되지만, 비정규직일 때는 핑계 대면 안 돼.”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비염 치료 도구에 따뜻한 물로 용액을 만들었다. 나는 그걸 들고 화장실로 가서 코를 풀었다. 한쪽 콧구멍에 그 도구의 구멍을 대고 손으로 누르면, 다른 쪽 구멍으로 물이 흘러나오면서 코가 풀린다. 이때 물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아-’ 소리를 계속 내 줘야 한다. 나는 어머니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화장실로 가서 이상한 소리를 내며 코를 풀었다.

‘아- 으어- 아으아-’

15분쯤 지났다. 세 개의 자가진단키트에는 모두 C 옆에만 붉은 선이 하나씩 생겼다. 셋 다 음성. 아픈 우리에게 음성은 아프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인정받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여느 때처럼 우리의 통증은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마주했다. 이미 어떤 만성질환이 있더라도 소용없었다. 코로나19처럼 그것이 ‘모두’의 문제일 때, 혹은 다른 건강한 사람들을 해칠 수 있을 때만, 달리 말해 질병이 보편의 문제가 되거나 보편을 위협하는 문제가 될 때만 질병은 진지한 고려의 대상이 되었다. 아픈 사람이 자기 몸을 해치지 않고 일하기 위해 자가 격리라도 하고 싶다고 바라야 하는 사회란 도대체 무엇일까, 코를 푸는 내내 생각했다.

몸살감기, 두통, 기침, 인후통 등과 관련한 약 봉투 위에 코로나 자가진단키트가 있다. 자가진단키트에는 C에만 붉은 선이 하나(음성) 나 있다. 사진 안희제 

‘아- 아아- 으아어아-’

코는 풀렸지만 목은 여전히 아팠고, 말을 크게 하기도 힘들었다. 누군가가 나를 이해해줄 채비를 하고 있을 때만 이해받을 수 있는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하염없이 틀어놓은 유튜브 영상의 소리 뒤로 어머니 방에서 나오는 기침 소리. 무엇이 약점이 되어 잘릴지 몰라 아픈 날에도 누워서 기침하며 일해야 하는 비정규직의 불안과 억울함이 들렸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달리 없었고, 다음 날 식사에 무엇을 준비할지 고민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내가 소박하고 하찮아서 내 머릿속에는 코 푸는 소리만 가득해졌다.

‘아- 아으- 아아으아아-’

원래도 채팅보다는 전화를, 전화보다는 만남을 더 좋아하는 나는 ‘위드 코로나’를 나름 즐기고 있었다. 체력이 부족해도 기왕이면 수업도 강의실에서 듣는 걸 더 좋아한다. 하지만 이미 수많은 행사들이 순전히 대면으로만 진행되도록 전환되고 있고, 이는 곧 코로나19의 종식과 함께 찾아올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했다. 다시 비대면은 선택지에서 사라진 세상, 어떤 이유에서든 방에서 나가기 힘들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힘들고, 앉아 있기 힘든 사람이 자기 몸을 덜 해치며 공부하고 일할 수 있는 선택지 중 하나가 사라진 세상.

코로나19가 이런 식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한다던 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코로나19가 얼른 ‘극복’해야 할 이례적인 사건으로만 취급될 때, 코로나19 참사 안에서 질병과 함께해야 하는 삶, 질병을 권하는 사회에 대해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던 일말의 가능성조차 사라진다. 나아가 참사에서 죽어 간 노동자, 노인, 장애인, 빈민, 아픈 사람들, 무분별한 동선 공개로 낙인찍힌 성소수자들, 제대로 된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죽어간 확진자들에 대한 사회적 기억마저 사라지고 만다.

코로나19가 어떻게 마무리되어야 할지는 나도 정확히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 결말에 등장하지 못할 이들, 그리고 이들을 코로나19 이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지우고 있는 사회의 존재다. 질병이 단지 인간 신체의 근원적 취약성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에게 불가해한 화학적 영역에서 질병을 만들어내는 위험사회의 문제이기도 할 때, 즉 질병이 오히려 우리 삶의 기본값일 때, 코로나와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 그리고 새로운 ‘사회’의 모습은 아픈 몸들의 경험에서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관해기(증상이 일정 정도 가라앉아 통증이 거의 없는 시기)의 만성질환자.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며, 질병과 장애를 중심으로 사회를 고민하려 노력한다. 책 《난치의 상상력》, 《식물의 시간》, 《과학잡지 에피: 16호-장애와 테크놀로지》(공저), 《아픈 몸, 무대에 서다》(공저), 《몸이 말이 될 때》(공저)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