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제①] 잘못된 만남 / 홍은전

[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2022-10-13     홍은전
대구시 동구에 있는 장애인지역공동체 앞에 조민제 활동가가 서 있다. 사진 현다혜 

누군가 나에게 다시 보고 싶은 가수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했던 길거리 힙합패 ‘유치장’이라고 대답하겠다. 2007년 장애인차별철폐 문화제를 준비하던 두 활동가 조민제와 전근배가 공연 팀을 섭외할 돈이 없어서 ‘우리가 그냥 불러봐?’ 하며 랩을 한 것이 시작이었다. 비장한 민중가요 일색의 운동판에서 젊음과 힙함을 뽐내며 사랑받았던 그들은 2015년 세 번째 곡 “지겹다고?”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활동하지 않았다. ‘유치장’은 싸이월드처럼 어떤 시절을 상징하는 화석 같은 존재다. 그들이 활동했던 시기 일군의 청년들이 대구지역에서 진보적 장애인운동을 개척하고 뿌리를 내린 것이다. 이후 그들은 대구시립희망원 시설폐쇄와 최중증장애인의 탈시설 의제를 선도했고 이젠 토론자나 발표자로 마이크를 잡는 게 더 익숙한 아저씨, 아니 중견 활동가가 되었다.

조민제를 처음 알게 된 건 그가 스물세 살이던 2006년쯤이었다. 힙함을 추구하지만 근본이 아주 올드했던 그는 나를 꼬박꼬박 “은전동지”라고 불렀고 그때마다 나는 내가 낯설어져서 ‘네가 나를 어떻게 안다고 내가 네 동지예요?’하고 생각했다. 민제는 다 쓰러져가는 인권단체였던 장애인지역공동체에 들어가 전임자들이 엉망진창으로 버려두고 간 회계 서류들과 낮밤으로 씨름하던 중이었고 나는 노들야학 상근자였다. 민제는 수시로 전화를 걸어 “작년 전기세 영수증은 어디서 받나요?” 같은 걸 물었다.

그래봤자 나도 스물여덟이었지만 우리의 처지는 몹시 달랐다. 내가 작지만 튼튼한 벽돌집에서 든든한 선배들의 그늘 아래 안온하게 살았다면 민제는 중증장애인 서너 명과 함께 기둥만 겨우 남은 집에 살면서 세찬 비바람을 막아내는 중이었는데, 왜인지 집을 버리고 떠난 선배들로부터 이해할 수 없는 비난과 공격까지 당하고 있었다. 내 눈에 민제는 지켜야 할 식구가 많은 소년가장처럼 보였는데 딱했다기보다 대단해 보였다. 순전히 민제가 선택한 삶이었기 때문이다.

서럽고 힘들어서 사무실에 앉아 꺼이꺼이 울었다던 스물셋의 민제는 이제 서른아홉이 되었다. 그 사이 장애인지역공동체는 산하에 질라라비장애인야학, 다릿돌장애인자립생활센터, 나로장애인자립주택지원센터, 여기서함께센터(주간보호센터) 등 4개의 기관을 운영하고 40여 명의 직원이 일하는 단체로 성장했다. 더 다양하고 더 중증의 장애를 가진 이들의 주거, 교육, 탈시설, 자립생활 등을 지원하고 차별에 저항하는 튼튼한 공동체를 이룬 것이다.

2009년 대구 질라라비야학 교사들이 서울에 있는 노들야학을 방문했다. 노들야학 건물 앞에서 다 같이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모습.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검은색 크로스백을 메고 브이를 한 안경 쓴 사람이 조민제 활동가다. 정면에 있는 휠체어 탄 사람은 당시 노들야학 교장인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이며, 그의 뒤에 회색 모자를 쓴 사람이 홍은전 작가이다. 사진 제공 조민제 

2009년에 민제가 질라라비야학 교사들 열댓 명을 이끌고 서울에 있는 노들야학에 온 적이 있었다. 질라라비야학 교사들이 노들야학처럼 열심히 데모하는 교사가 되기를 바랐던 민제의 기획이었다. 프로그램은 1) 교류회를 하고 2) 밤새 교류회를 하고(술을 마시고) 3) 교실 바닥에서 침낭 깔고 대충 잠을 잔 뒤 4) 이튿날 탈시설 권리 보장을 위한 서명운동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둘째 날 나는 술 냄새를 폴폴 풍기는 대구 손님들을 인솔해 지하철을 타고 이동한 뒤 시민들에게 장애인의 탈시설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피를 토하듯 외쳐야 했다. 내 역할은 말하자면 “데모는 이렇게!” 같은 걸 보여주는 것이었겠지만 사실 내 전문은 “뒤풀이는 이렇게!”였다. 지난밤을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하얗게 불태워버린 나는 탈시설이고 뭐고 그냥 지하철 바닥에 드러누운 채 자고만 싶었다.

질라라비 교사들도 같은 마음인 게 분명한 퀭한 얼굴들이었다. 우리는 모두 한 사람을 깊이 원망하고 있었는데 그놈이 지금 옆에 없다는 게 우리의 피로감을 더욱 맹렬히 자극했다. 전날 밤 가장 열렬히 교류해버린 그는 우리가 서명운동을 마친 뒤 노들야학으로 돌아갔을 때까지 교실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혹자는 민제에 대해 ‘하나를 얘기하면 열을 이해하고 실행하는 놀라운 추진력의 소유자’라고 했는데 나는 그때 민제를 내려다보며 ‘이 친구에겐 무언가 좀 과도한 면이 있다’고 생각하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우리는 피폐한 몰골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나는 “다시는 우리 야학에 오지 마…” 하며 민제를 꼬집어주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이게 모두 노들야학에 대한 동경과 질라라비야학에 대한 애정의 실천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몇 년 후 나는 노들야학을 떠났고 다시 몇 년 후 민제는 질라라비야학의 교장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민제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지난 9월 1일 질라라비야학에서 학력인정 나래과정 졸업식·입학식이 열렸다. 조민제 활동가는 질라라비야학 교장 선생님이다. 초등과정을 졸업하는 이성진 씨를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다. 사진 현다혜 

지난 9월 질라라비야학 졸업식과 입학식이 있었다. 중년의 발달장애인 분들이 학사모와 졸업복을 갖춰 입고 얌전히 앉아 계셨는데, 졸업한 분들이 다음 과정의 입학생이 되는 것이었다. 최연소 학생의 나이는 서른여덟, 평균 나이는 오십 대, 40년이나 지연된 입학식이었다. 서른아홉의 교장선생님은 오십 세의 학생분들에게 꽃다발을 전달하고 일일이 사진을 찍으며, 학사모는 무겁지 않은지, 리허설하느라 힘들지 않았는지 물었고, 교무실에 지나치게 자주 들락거리는 학생에겐 너무 자주 오지 말아 달라며 농담을 했다. 그리고 시청과 구청에서 나온 공무원들과도 연신 점잖고 공손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다정하고 온화하느라 그의 얼굴 근육이 쉴 틈 없이 긴장해 있었다. 나에겐 낯선 민제의 얼굴이었다. 늦은 밤 사무실에 앉아 꺼이꺼이 울던 소년가장 민제는, 무대 위에서 힙합 공연을 하며 동지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던 빛나던 민제는, 숙취에 허덕이며 남의 야학에 쓰러져 자던 궁상맞던 민제는 언제 저런 얼굴을 갖게 되었나. 나는 민제가 인터뷰 때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장애인을 피해 다녔습니다.”

“금호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퇴로가 사라졌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대구와 장지공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야학 교장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무수히 떠나고 싶었던 그곳에, 민제가 여전히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자부심이 되었다고 민제가 말했다. 행사 진행을 맡은 야학 선생님은 학생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부르며 “OOO님의 졸업을 축하합니다!”, “OOO님의 입학을 허가합니다!”라는 짧은 문장을 반복했다. 그 특별할 것 없는 말이 모두 선언문처럼 강렬하게 들렸다. 내 안의 야학 교사가 되살아나 눈물이 좀 날 것 같았다. 민제가 그 자리에 계속 있다는 게 가슴이 아플 만큼 고맙고 부럽고 존경스러웠다.

지난 9월 1일 질라라비야학에서 학력인정 나래과정 졸업식·입학식이 열렸다. 야학 사람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모습. 사진 현다혜 

*                       *                       *

대구에서 태어나 자랐어요. 장난꾸러기였고 성장기에 약간 센치하기도 했지만 괴짜 같은 면도 많은 복잡한 내면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부모님이 가전제품 대리점을 하셨는데 가게 사정에 따라 자주 이사를 했어요. 초등학교 때 살던 동네가 개발되면서 행정구역이 개편되는 바람에 갑자기 신생학교로 전학 가게 되었어요. 그때 신도시 신축아파트로 이사 온 아이들과 같은 반이 되었는데 사는 곳도 노는 곳도 많이 달랐어요. 95년도였는데 그 친구들 집에 가면 양문형 냉장고가 있었고 방과 후엔 BBQ 같은 데 모여서 놀았어요. 그 친구들이랑 놀려면 회비를 지참해야 했어요. 엄마한테 돈을 달라고 하니까 몇 번은 주셨는데 나중엔 혼을 내셔서 자연스럽게 그런 모임에 못 가게 됐죠.

우리 집은 가게에 딸린 허름한 방이었어요.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온 다음부터 나를 대하는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졌어요. 가난하다는 건 수치스러운 거구나, 동물적으로 느꼈죠. “우리는 왜 이런 곳에 삽니까?” 하면서 아버지한테 울먹거렸던 기억이 나요. 나는 안경 끼고 키도 작아서 항상 앞자리에 앉았는데, 어느 날 선생님이 나를 제일 뒷자리로 보내더니 평소 같으면 혼나지 않을 행동에도 자꾸 트집을 잡고 때리는 것 같았어요. 선생님이 이상해, 라고 했더니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는 “촌지 달라는데 안 줘갖고 그런 갑네” 하셨어요. 살면서 그때가 제일 서러웠다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의 아버지가 고백하셨어요.

중학교 때 IMF가 터졌어요. 부모님은 가전제품 가게를 처분하고 메기 매운탕집을 열었는데 그것도 잘 안됐어요. 좋은 학교로 진학해보라는 추천을 받았지만 비용 때문에 망설이던 어머니의 모습 같은 게 꿈에 영향을 많이 줬어요. 교사가 되면 빨리 안정적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학생들을 차별하지 않는 교사다운 교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닥터 노구찌》, 《도토리의 집》 같은 만화책을 본 뒤엔 특수교사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어요. 전형적인 장애극복 스토리에 차별받던 장애인 자녀들을 위해 부모들이 작은 거주시설을 만들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인데, 지금은 동의하지 않지만 그때는 꽤 감동적이었어요. 일반 교사보다 임용이 더 쉽다는 것도 특수교육을 선택한 중요한 이유였어요.

대구대 특수교육과 학생회실 문 앞. ‘최강 특수교육과’라는 글씨가 붙어 있고 그 아래에는 특수교육과 학생회실 이용 수칙이 적혀 있다. 사진 현다혜

2003년 대구대 특수교육과에 합격했어요. 등록금이 걱정돼서 수능 끝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입학 전날까지 주유소에서 시급 2천 원을 받으며 하루 15시간 30분 동안 일했는데 그렇게 해서 번 돈은 결국 부모님이 쓰시고 저는 학자금 대출을 받아 입학했어요. 세상에 대한 분노 같은 게 있었어요. 조금 남은 돈으로 머리를 파마하고 노랗게 탈색했어요. 특수교육과엔 왠지 다 착하고 개성 없는 사람들만 있을 것 같았어요. 잘 노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가다마이와 뾰족구두를 사서 그렇게 입학을 했어요.

대구대는 경산시에 있어서 대구에 있는 집에서 버스를 타고 왕복 4시간이 걸렸어요. 기숙사를 신청했는데 경쟁률이 높아서 걱정이었어요. 그런데 장애인의 룸메이트를 하면 기숙사에 계속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냅다 신청했어요. 어차피 특수교육과니까 장애인과 생활하는 게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만화에서 봤던 착하고 순수한 장애인, 시트콤에서 봤던 낭만적인 기숙사의 모습을 상상하며 집을 떠날 땐 마냥 신났어요. 막상 기숙사에 도착하니 상상과 달리 아주 삭막했어요. 대구대는 전국에서 장애학생이 제일 많은 학교였는데, 기숙사 건물엔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장애인은 무조건 1층에 배정되었어요. 1층에 방이 40개였는데 모두 장애인이 있었죠. 어두침침한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방이 있는 모습이 꼭 장애인시설 같았어요. 환상이 와르르 무너지며 우울하게 입소했죠.

- 이상하게 멋지고 나쁜

다행히 저의 룸메이트는 지팡이를 짚고 걸어서 도움을 줄 일이 많지 않았어요. 어느 날 동기가 자기 룸메이트 형한테 인사하러 오라면서 나를 불렀어요. 그 형은 하늘 같은 3학년 선배였고 장애인인데 특수교육과의 유명인사였어요. 바짝 긴장한 채 그 방에 갔는데 방 구조가 희한했어요. 기숙사 모든 방은 허름한 침대가 양옆으로 있고 중간에 통행로가 있는데 그런 질서를 파괴해놨더라고요. 그 장애인 선배가 생활하기 편하도록 두 침대를 붙여놓은 거였어요. 가전제품 반입 금지였는데 냉장고도 있고 심지어 가스버너도 있었죠. 그러면 조교들이 난리를 치는데 그 선배는 “나 장애인이야, 어쩔 건데?” 뭐 이런 분위기였어요. 선배는 침대 위에 밥상을 펼쳐놓고 앉아 있었어요. 밥상엔 예수님이 길 잃은 양을 인도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그 위에 순살통닭과 2리터 페트병에 담긴 소주가 있었어요. 소주를 병 채로 들이키면서 선배는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네가 신입생이야? 인사해봐!” 충격이었죠. 가치관이 다 흔들렸달까. 장애인은 착해야 되는데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그 장애인의 이름은 노금호였어요. 저도 노금호가 충격이었는데, 노금호도 그때 제가 엄청 뺀질거려서 싫었대요.

신입생 시절은 마음껏 술을 먹고 노는 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1학년 과대표가 되어서 술자리란 술자리는 다 찾아다녔고 술자리가 없으면 만들어서 놀았어요. 어느 날 새내기들을 위한 장애 인권 교육이 있었는데 다큐멘터리 ‘버스를 타자’를 상영했어요. 장애인들이 이동권을 요구하면서 지하철 선로를 점거하고 버스를 점거하는 걸 봤어요. 술 먹고 거친 언행을 일삼는 장애인도 충격이었는데 그건 더 충격적이더라고요. 다큐가 끝났을 때 저도 모르게 막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어요. “우와! 저 흰머리 아저씨(현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완전 머싰네!!” 그 상영회를 주최한 게 노금호였는데 선배가 아직도 투쟁 중인데 이게 환호하고 박수칠 일이냐면서 화를 냈어요. 선배가 그러니까 좀 무섭긴 했는데 궁금한 게 더 많아졌어요.

지난 9월 1일, 대구대에서 조민제 활동가와 노금호 활동가가 활짝 웃고 있다. 사진 현다혜 

두 달쯤 지났을까. 금호 형이 학생회실을 돌아다니면서 평택 에바다투쟁에 연대하러 가야 한다고 사람들을 조직했어요. 청각장애인 거주시설을 운영하는 에바다복지회에서 비리와 폭력이 자행되었고 거기에 맞선 사람들의 싸움이 진행되고 있다고 했어요. 버스를 대절해서 90명 정도가 갔어요. 에바다 정문 앞에 앉아서 1박 2일 동안 집회를 했는데 밤이 되니까 시설 측의 구사대 같은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모두 농인들이었어요. 제 또래거나 고등학생 정도였는데 시위하러 온 사람들을 주먹으로 마구 때렸어요. 몸싸움을 하다 제 안경도 부서지고 금호 선배의 휠체어도 박살 났어요. 우리는 나중에 특수교사가 될 사람이고, 그분들은 나중에 우리가 가르쳐야 하는 장애인들인데, 우리가 이렇게 몸싸움을 하고 있는 그 상황이 너무 이상했어요. 경찰들이 있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농인 구사대 뒤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한 게 더 이상했어요. 경찰들은 시설을 보호하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충격의 연속이었어요.

기숙사의 장애인 선배들이 장애인권동아리 ‘레츠’에 가입하라고 했어요. 레츠는 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훨씬 많았어요. 동아리 첫 총회에 갔더니 학교에서 장애학생 장학금을 감축하는 것에 어떻게 대응할지 휠체어를 탄 학생들이 심각하게 토론을 했어요. 어려운 말을 막 쓰면서 4시간 넘게 토론만 하는데 솔직히 내 문제도 아니니까 재미도 없고 지치더라고요. 동아리에선 학교 광장에 나가 장애 대학생의 교육권을 외치면서 선전활동을 했어요.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말하는 게 좀 부끄러웠는데 그래도 ‘버스를 타자’에서 그렇게 하는 게 멋있어 보였으니까 으쓱한 기분도 들었어요.

동아리 활동은 좀 힘들었어요. 여자친구랑 데이트도 하고 비장애 동기들이랑 놀러도 다니고 싶었는데 레츠 선배들은 치열하고 심각했어요. 특히 힘든 건 장애인들의 활동보조를 하는 거였어요. 술 먹는다고 해서 좋다고 따라가면 나도 취했는데 장애인들의 활동지원을 해야 했고 노래방 간다고 해서 신이 났는데 장애인들을 업고 지하로 내려가야 했어요. 뒤풀이 파하면 기숙사에 가서 또 활동지원을 해야 했고, 다음날엔 최대한 늦게 일어나 후딱 수업 들으러 가고 싶은데 활동지원을 해야 하니까 그럴 수 없었어요. ‘내가 노예인가?’ 싶었어요. 언젠가부터 동아리 활동에 슬금슬금 빠지고 기숙사의 장애인 선배들도 슬슬 피하기 시작했어요. 2학기 때 룸메이트는 활동지원을 하는 게 빡세서 어떻게든 덜 마주치려고 12시 통금 직전에야 기숙사에 들어갔어요.

대학교에 입학한 2003년, 가을 동기 엠티(MT) 사진. 맨 아래 왼쪽 주황색 머리가 조민제 활동가다. 사진 제공 조민제 

그런데 어느 날 선배들의 하소연이 들려왔어요. 룸메이트가 없는 날에는 종일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고 수업을 들으러 갈 수도 화장실을 갈 수도 없다고 했어요. 입소 첫날 룸메가 자신을 보자마자 바로 짐을 싸서 나가버리는 걸 보고 너무 비참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끝내 룸메이트 없이 한 학기를 버텨야 했던 사람들은 학기 내내 동기들한테 구걸하듯 도움을 요청했대요. 뒤통수가 따가우면서 한편으론 충격이기도 했어요. 대구대가 ‘장애인이 다니기 좋은 대학’이라고 홍보를 많이 했는데 실상은 그랬죠. 외면하기엔 마음이 안 좋았어요. 힘들고 부담스러우니까 기숙사를 나가는 비장애인들도 많았지만 저는 경제적으로 여유도 없었고 또 이런 문제를 피하면 나중에 내가 가르칠 학생들의 문제도 피할 것 같았어요. 2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활동을 하기 시작했어요.

나중에 장애학생 자치회가 따로 만들어졌는데, 레츠 회원이 회장을 맡고 1층 방 배정 권한을 자치회에 달라고 했어요. 학교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우리가 적극적으로 사람을 조직하고 연결하기 위한 거였죠. 레츠 회원들을 기숙사 한 동에 몰고 특수교육과, 사회복지과 비장애 학생들을 룸메이트로 배정하고 교육도 했어요. 그 뒤부터는 기숙사 생활이 아주 재미있어졌어요. 3학년 여름방학 때는 한 달 내내 모여서 동아리, 학생회 사업계획을 짜고 세미나하고 밤새 술 먹고 토론하느라 학교 밖을 한 번도 안 나갔을 정도였어요. 어느 날 금호 선배와 대학 캠퍼스를 산책하는데 선배가 이렇게 말했어요. “평생 대학생만 했으면 좋겠어.” 우리는 완전히 이 활동에 빠져들었어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