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이해 왜 필요한가?
장애라는 것을 특화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현실에서 보이는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의 부재 따른 왜곡된 장애관에 대해서는 바로잡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장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새삼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장애에 대해 알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문제는 장애에 대해서 단편적으로 알면서 마치 전부인 양 여기는 것이 문제다.
장애와 장애인은 다른 것인가? 장애와 장애인은 엄밀하게 따지고 들자면 분명히 다른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장애는 전반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포괄적 의미가 있으며, 장애인은 영역별로 이해의 내용이 다르므로 개괄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장애를 이해한다는 것은 장애와 관련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이에 속하는 것은 제도와 환경이 장애와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에 대한 부분이라 하겠고, 장애인을 이해하자는 것은 각 영역에 대한 이해, 즉 예의와 관련한 부분들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왜 장애를 이해해야 하는가? 장애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사람들의 대답은 비슷하게 나타난다. 한마디로 정리를 하면 '불편함'으로 함축되는데 이 말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장애는 불편함이다. 불편함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결국 모든 사람은 불편함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장애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정리해보니 장애라는 것이 특별한 게 아닌 것으로 정리되고, 그냥 자연스러운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왜 장애라는 것을 이해하자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장애가 있는 사람이 경험하는 불편함과 장애가 없는 사람이 가지는 불편함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장애가 있는 사람이 가지는 불편함은 일상생활의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먹고, 자고, 입는 것은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다. 그런데 이 기본적인 욕구에서부터 불편함이 존재한다. 또한 학교에서 경험하는 불편함이나 사회구조 안에서 경험하는 불편함을 더했을 때 왜 그것들이 장애인에게는 불편함이라 하는지, 제도적인 불편함이란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지, 환경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등 그 종류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왜 그것들이 불편함의 차이가 드러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사하는 곳을 지날 때 선간판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라고 쓰여있다. 불편함은 그런 것이다. 누구나 가지는 것이지만 스스로 그것을 피해서 갈 수 있는지 없는지의 차이를 안다면, 장애에 대해서 충분히 배려하는 인식을 할 수 있다. 장애를 이해하자는 것은 생각을 바꾸자는 것이다.
지금까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 무심코 던지는 말들이 당사자나 그 부모들에게 상처가 된다고 생각하지 못해 왔다. 대부분 당사자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가끔은 가족들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표현들을 보면 대부분 이렇다.
'결혼은 하겠어?', '돈벌이는 할 수 있나?', '그 몸으로 뭘 할 수 있어?', '그냥 집에 있지.' '멀끔해서 어쩌다가', '힘들겠어요' 등등의 이야기들이다.
이런 식의 표현과 생각을 바꾸는 것이 장애를 이해하는 시작이라 하겠다. 장애인과 사람으로 구분되는 인식을 바꾸는 것이 장애이해의 목적이고, 그렇게 될 때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함께 어울리는 환경을 만들 수 있다.
장애가 있다는 생각에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인데 그 말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말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억양, 표정, 행동 등으로 충분히 상대의 말을 인지한다는 것과 이런 현상은 그들에게 심리적인 억압을 주는 행위로 불안한 심리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혹은 장애당사자는 느끼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부모들에게 큰 상처가 되는 말이며 이는 언어폭력이라고 규정해도 될 정도다. 듣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말과 생각을 바꾸면 장애인들이 심리적 불안감은 없앨 수 있고, 그런 분위기에 편안하게 젖어들어 함께하는 환경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장애인도 그냥 사람이다. ‘장애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살아갈 이유가 없으며, 개개인이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옳다. 그냥 ‘장애인’으로 불리는 것은 개인의 인권이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인권이니 권리니 하고 말하면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들은 보편적인 단어들이고, 그 보편적인 권리를 장애가 없는 사람들은 누구나 누리고 지켜가고 있다. 인권과 권리를 인정하고 지켜주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하면 화를 낸다.
일반적인 권리라고 한다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위층 소음’, ‘집 앞의 쓰레기’, ‘지정주차’ 등 생활에서 나오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인권도 마찬가지로 ‘왕따’, ‘언어폭력’, ‘사생활 침해’, ‘악의적인 소문’ 등 어려운 말들이 아닌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인권이나 권리에 대한 이야기가 국민 누구나 가진 기본권에 해당한다면 장애인에게도 같이 적용되는 것이며, 이를 특별한 혜택쯤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권리로 여겨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해 준다는 식이 아닌, 내가 누리는 모든 권리는 장애가 있고 없음을 떠나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 표현 중에 ‘감히’라는 단어가 있다. 이 말은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무언가를 할 때 사용하는 데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는 늘 따라다니는 단어이다. 장애인이 직업을 가지려 한다거나, 대학교에 간다고 하거나, 어려운 일을 하려 할 때 ‘감히’라는 단어가 불쑥 튀어나온다. 이는 그 사람이 못할 것이라는, 또는 정말 할 수 있겠느냐는 의심이 전제된 것이다.
사람에게는 두 개의 눈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육체의 눈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의 눈이라 한다.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과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 이 차이는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장애를 보는 관점은 언제나 육체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고 보이는 것만으로 불쌍하게 보거나 측은한 마음을 전하게 되는데, 이는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과 연동하지 못하고 서로 통하는 길을 막아 삐뚤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장애는 그냥 장애일 뿐이다. 거기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장애를 불쌍하게 여기는 가장 큰 이유는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다거나 실제 힘든 상황에 처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장애가 있는 이들이 힘든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는 이유는 한 가지다. 그것은 시설환경의 미비에서 발생한다. 목발을 짚은 사람이 계단을 오르기 힘들고, 휠체어를 탄 사람이 화장실 출입이나 엘리베이터 이용이 불편한 것은 모든 시설 환경들이 장애가 없는 사람을 중심으로 만들어졌으며 그런 것을 이용하려니 당연히 불편함이 존재하는 것이다.
마음의 눈으로 보자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내가 아니라 누군가 몸이 불편한 사람이 이 시설을 이용할 때 어디가 불편할지' 단 한 번이라도 생각을 해 본다면 아무렇게나 만들어 놓고 뒷짐을 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 본다.
장애를 이해하자는 것은 마음을 열어놓고 사람들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거창하게 캠페인을 한다거나 하루 다 모아놓고 밥을 먹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고, 그 다리로 서로 거리낌 없이 오가자는 것이다. 그것이 장애인과 일반인, 혹은 장애인과 정상인으로 구분되는 현상을 거두고 사람과 사람으로 살아가는 시작이 되는 것이다.
불편함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 불편함 때문에 어느 만큼의 불편함을 느끼는 지의 차이를 알아가고 그 불편함을 서로 이해하고 덜어주려는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최석윤의 '늘 푸른 꿈을 가꾸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