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희②] 다른 세계와 함께 갱신되는 몸 / 김원영
[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 더 친밀하기 위해 긴장하는, 잘 긴장하기 위해 더욱 친밀한
노들야학에서 당시 학생이었던 조미경(현 장애여성공감 공동대표)을 만났어요. 미경 언니는 나보다 두 살이 많았고, 작은 충격에도 뼈가 잘 부러지는 몸을 가져서 19살 때 처음 가족이 있는 집 밖을 나왔다고 해요. 내가 집을 떠나 이삼 년 서울 생활하며 ‘사람과 관계 맺을 때 대략 이 정도면 기본은 한다’라고 자신했던 모든 것이 미경 언니와의 관계 앞에서 쓸모없어졌어요. 나는 알고 있던 지식이나 감각이 좀 쓸모없어지는 순간을 좋아해요. ‘이렇게 무너졌으니까 다음에 뭐가 찾아올까?’ 이런 기대가 들거든요. 우리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그간 모르던 것들이 내게 찾아왔죠.
야학에서 학생들의 이동을 지원할 사람을 찾았어요. 나는 몸이 늘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니 그 일을 하겠다고 손을 들었죠. 두 명의 언니들을 지원하기로 했어요. 한 분은 조금 걸을 수 있었고 미경 언니는 수동휠체어를 타는 사람이었죠. 지하철로 같이 이동하는데 두 언니 모두 엘리베이터가 없는 답십리역과 애오개역에 살았어요. 두 언니의 이동 지원을 일주일에 두 번씩 각각 따로 했어요. 그러면서 특히 미경 언니와 급속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죠.
함께 이동하면서 언니에게 모든 걸 배웠어요. 휠체어 잡는 방식, 미는 법, 당기는 법. 계단을 오르내리는 방법. 언니를 안는 법, 안아서 휠체어로 언니를 옮겨 앉도록 하는 방식. 나는 젊었고 내가 몸을 잘 쓰는 사람이라고, 힘이 좋다고 생각했기에 자신감에 차 있었어요. 항상 활기차고 씩씩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도 분명 있었어요. 그런데 그 자신감이 위험한 순간을 부를 수도 있다는 걸 언니가 알려줬어요. ‘항상 씩씩하고 강인하지 않아도 된다. 집중하고 조심해야 한다. 지금 네 팔이 힘들다면, 몸이 떨린다면 이런 것을 표현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함께 안전하게 움직이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런 말을 언니가 해주었죠.
신체활동을 지원하다 보면 남에게 잘 보이고 싶지 않거나 보이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 몸의 일부를 드러내야 할 때가 있어요. 이런 과정은 낯설고, 부끄럽죠. 때로 수치심이라고 말할만한 감정을 공유할 수도 있고요. 나는 그런 부분을 둘만의 어떤 비밀로서 생각한 것 같아요. 그 안에서 우리만의 친밀함이 형성되는 거죠. 애오개의 가파른 언덕을 함께 휠체어를 밀고 오르내릴 때 나는 어떤 일체감을 느꼈어요.
동시에 이 관계는 몸의 상태, 상황과 조건이 계속 변하기에 매일매일 갱신이 필요해요. 내가 미경 언니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의 일이에요. 둘이 술을 많이 마시고서 한 선배의 집에서 잠을 자기로 했어요. 술이 많이 취한 채로 언니를 안았고, 처음 가보는 그 집으로 들어갔어요. 언니를 안아본 경험이 많으니까 익숙하다고 생각한 거죠. 그때 어두운 바닥에 계단이 있었고 그걸 보지 못해 발을 잘못 짚고 넘어지면서 언니를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어요. 간신히 언니를 놓치지 않았지만 우리 둘 다 엄청나게 놀랐죠. 언니가 늘 강조하는 것. ‘팔을 깍지 끼고 다리를 이렇게 잡고…’ 나는 술에 취했고, 친밀하고 익숙한 관계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긴장을 놓았던 거예요.
어느 날은 미경 언니가 이동하는 데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를 언니 대신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한 적이 있어요. 그 자리가 지나고서 미경 언니가 내게 말했죠. 자신에 대해서는 자신이 직접 이야기하겠다고. 당시에는 그 말을 듣고 서운함을 느꼈던 거 같아요. 하지만 곧 이해했어요. 친밀하더라도 거리를 두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걸. 언니가 한번은 내게 이렇게 말한 기억이 나요. ‘장애에 대해서 우리 둘이 나눈 이야기는 우리 둘 사이에서, 그리고 자신의 경험에 한정되는 것인데, 네가 그걸 전체화해서 다른 사람에게 장애는 어떤 거라고 설명한다면 위험할 수 있지 않겠냐’고요. 하나의 사례로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를 일반화하고, 그걸 비장애인이 지식처럼 소유해 내 주장의 근거로 삼는 걸 경계하라는 뜻이었겠죠.
그러니까 내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의 몸에 익숙한 채로 편안하게 어울리고, 함께 ‘건들건들’하는 어떤 장면을 동경했더라도, 그것이 결코 전부가 아니라는 거예요. 어떤 순간 우리는 서로를 위해서 긴장을 유지한 채 거리를 두어야 하며 그마저도 매일매일 새롭게 갱신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는 시간이었어요. 당시 나는 내 모습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어요. 작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상상만 하던 10대의 모습도 싫었고, 어찌할 줄 몰라 방황하던 20대 초반의 촌뜨기같이 어설픈 모습도 싫었죠. 그래서 내가 쓸모없어지는 순간을 겪고, 새로운 세계를 만나 갱신되는 일은 즐거웠어요.
가파른 경사길에서는 밀지 말고 지그재그로 당기듯이, 자갈길은 앞바퀴를 살짝 들고, 누군가 부를 때 내 몸만 돌리지 말고 휠체어 방향도 동시에 움직여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둔덕과 얕은 자갈밭, 모랫길의 파임과 덜컹거림이 휠체어에 앉은 사람에게 줄 미세한 충격을 함께 느껴야 밀고 당기는 손의 힘도 달라진다. (…) ’장애인은 이렇게 대하라’라는 매뉴얼로는 체득할 수 없는 기술. 비장애인은 끝없이 몸을 부딪치고 시행착오를 거듭해서 익혀야 하고, 장애인은 비장애인이 알아듣게 설명하는 반복적인 노동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이 기술은 장애인 저마다 몸에 맞는 방식이 달라서 한 장애인과 익힌 기술이 다른 장애인을 만날 땐 무용해지기도 한다. 때론 비장애인인 나의 제안으로 서로를 지원하는 더 나은 기술을 개발한다. (…) 나는 이것을 존엄이 담긴 기술과 노동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진희, 「실패를 위한 활동, 포기하지 않는 몸」, 『어쩌면 이상한 몸』, 공감 지음, 오월의 봄, 2018, 223~224쪽)
- 혁명의 예행연습
노들야학에서 연극을 배웠어요. 당시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극작을 공부하던 경민선 님이 판소리 수업을 열었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신체만으로 다양한 소리와 행동을 모두 소화하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우리가 판소리를 즐기고 곧잘 하니까 민선 님이 이번에는 연극을 하자며 『아우구스또 보알(Augusto Boal)의 연극메소드』를 가져왔어요. 이 책에는 신체 훈련법이 나와요. 자기 이야기를 말하고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기. 몸으로 감정을 표현하기. 그중에서도 처음 했던 거울 놀이가 기억에 남아요. 보통 장애인의 몸을 따라 한다는 건 그 사람을 놀리는 행위로 여겨서 금기시되잖아요. 그런데 이 프로그램에서 우리는 서로의 몸을 따라 했어요. 뇌병변 장애가 있는 몸을, 휠체어를 타는 몸을 따라서 움직였죠. 그 안에서 이 움직임은 누군가를 조롱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사람의 몸을 쫓아가는 일이었고, 그 몸을 파악하려는 시도고, 그 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한 훈련이었죠.
이후 우리는 토론연극을 만들었어요. 나는 연극으로 토론을 한다는 게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경민선 님이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관객과 함께 풀어가는 거라고, 관객이 직접 나와서 경험하며 방향을 찾는 연극형식이라고 했어요. 우리가 만든 첫 번째 토론연극 ‘피라카숑 하퐁출롤’의 대본을 지금도 가지고 있어요. 장애여성이 계단 때문에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상황을 장면으로 만들고, 관객이 참여해서 대안을 만드는 이야기에요. 세종문화회관 컨벤션홀에서 공연을 올렸어요. 내용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공연장 바닥에는 후원받은 생리대를 깔아두었어요. 연습 과정에서 우리가 장애여성의 생리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거든요. 관객이 입장하면 음악에 맞춰서 거울 놀이를 해요. 몸풀기 시간이죠. 관객들과 인사를 하며 몸으로 호흡을 맞추면서 관객들 역시 참여할 준비를 하는 거죠. 공연이 시작되면, 집에서 외출을 시도하는 장애여성 앞을 문이 가로막고, 계단이 가로막아요. 어떤 방법으로 나가지? 오늘 그냥 나가지 말고 집에 있을까? 계단을 기어서 나가려는 시도도 해보죠. 나는 경민선 연출이 빌려온 빨간 원피스를 입고서 빨간색 계단 역할을 맡았어요. 외출을 시도하는 장애여성에게 내가 말하죠. “집에 있어 밖은 위험해.”
20분간의 공연이 끝나면 관객들이 참여하고 싶은 장면을 선택하고 해당 장면을 반복해요. 각 장면 앞에서 관객은 자기 나름대로 방법을 제안하죠. 어떤 관객은 본인이 업고 내려가겠다고 하고, 다른 관객은 계단 역할을 맡은 나에게 문제제기를 하면서 계단 대신 경사로를 깔아야 한다고 말해요. 토론연극을 무대에 올리던 그때는 2001년 하반기였어요. 1월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사고 이후 한국사회에 이동권 투쟁의 불이 붙은 시기. 노들야학이 전면에서 현장투쟁을 점점 더 강렬하게 이끌어 가던 때요. 관객이 쉽게 상상하지 못하는 현실의 억압을 극장에서 직면하고 그것을 함께 몸과 행동으로 부딪혀보며 해결 방안을 찾는다는 점에서, 토론연극의 창시자 아우구스트 보알이 ‘혁명의 예행연습’이라고 토론연극을 부른 이유를 이해하게 됐어요.
노들야학 시간표가 현장투쟁으로 채워지자 야학 안에서는 교육기관으로서 야학의 역할을 두고 논쟁도 있었어요. 나는 운동단체로서 노들야학의 정체성을 지지하는 사람이었어요. 학생들을 조직하고 피켓을 만들어 현장에 나갔고, 장애인들이 지하철 선로로 내려가 장애인이동권을 외치는 순간에 함께 하면서 벅찬 마음을 느꼈어요. 다만 나는 현장에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잘 구조화된 언어로 사태를 분석한 글을 써내는 활동가는 아니었어요. ‘왜 나는 성명서를 못쓰는가’하며 자괴감을 느꼈고 공부가 부족하다고 생각해 활동가로서 나의 한계를 직면하기도 했죠.
하지만 집회에서는 영영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관객과 토론연극의 무대에서 만났을 때, 장애여성을 업고 계단을 내려가겠다고 말하는 관객과 장애인들이 그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경계 없이 대화를 나눌 때, 나는 활동가로서 한계만큼이나 나의 장점을 조금은 깨달았던 거 같아요. 정제된 언어로 사람들을 지휘하는 말하기와 글쓰기는 내게 어렵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타인과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쌓아 올리는 만담의 과정 안에서라면 나는 누구보다 즐겁다는 걸요. 그 안에서라면 우리의 몸과 사회의 변화를 추동하는 말하기에 이를 수도 있을 거 같았어요. 노들에서 문화활동을 하며 그렇게 나를 배워갔어요.
- 말해져야 할 것을 말하는 몸
미경 언니와는 연애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친한 사이라면 기본 아닌가요? 노들야학에도 여러 커플이 있었어요. 젊으나 나이가 드나 우리는 연애를 하죠. 나도 했고…. 그런데 노들에서 커플이라 하면 교사끼리의 커플이었어요. 장애인들 사이에 커플은 잘 없었고, 장애인 학생들이 비장애인 교사를 좋아하는 관계가 주로 있었어요. 이렇게 관계가 형성되는 것에 대해 미경 언니와 의견을 나눈 적이 있어요. 내가 왜 장애인은 장애인을 좋아하지 않는 거야? 물은 적도 있어요. 언니가 되물었죠. “너라면 좋아했을까?” 연애를 하면 관계에서 힘든 일들도 많잖아요.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없었어요. 어떤 종류의 관계들이 제기하는 권력과 평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야학 안에서 정치화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죠.
2000년을 지나면서 미경 언니가 야학 졸업 후 대학입시를 준비하며 야학 활동을 그만두었어요. 장애와 몸, 연애, 장애인운동 전반에 관해 가장 편히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떠난 것이죠. 그리고 그 무렵 김상희(현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국장)가 노들야학에 들어왔어요. 그는 언어장애가 있어요. 이전에도 노들에 언어장애가 있는 분이 계셨지만 나는 그분과의 의사소통을 대화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냥 의례적으로 대했던 거 같아요. 장애가 있는 구성원과 친밀함과 긴장을 동반하는, 깊은 관계에 기초해 이야기를 쌓아 나가는 대화를 조미경과만 주로 해왔던 거죠. 미경 언니는 언어장애가 없고 자신의 장애에 대해서 설명하고 그에 관한 의견을 나누는데 탁월한 사람이었고요. 상희는 긴장을 먼저 불러일으킨 친구였죠. 친해지고 싶은데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활동지원을 하면서 점차 상희가 가진 말의 톤, 어떤 운율과 흐름에 익숙해졌어요. 언어장애를 가진 동료와 이야기하는 몸이 되는 법을 처음으로 배워갔죠. 상희와 나는 야학 안에서 잘 이야기되지 않지만 활동을 하며 우리가 겪는 고민, 외모나 섹슈얼리티, 몸, 연애와 권력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상희는 미경보다 1,000배 정도 까칠한 사람이었어요(웃음).
우리는 평등한 세상을 위해서 투쟁하는 조직이지만 이 내부에도 어떤 권력관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시에는 페미니즘을 깊이 공부하기 전이었지만, 여성 교사들에게 이중적인 역할이 요구되는 것이 보였어요. 나와 나이가 같은 한 교사가 긴 머리에 정장을 입고, 숄을 두르고 야학에 왔는데, 그의 외모를 보고서 이 조직에서 제대로 역할을 수행할까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었죠. 술자리에서 공유하는 호탕한 모습, 형제애로 뭉친 단합된 의지 같은 것이 이 공간에서 중요했고 나 역시 그런 태도와 힘을 보이려 애쓰며 야학의 장애남성들을 조직했어요. 강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연스럽고 거침없는 태도를 공유하는, 함께 ‘건들건들’ 댈 수 있는 여성이어야 이 조직에서 남성교사들의 동료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았죠. 그러면서도 여전히 여성 활동가로서의 행동은 무엇이든 쉽게 ‘귀엽다’는 식으로 맥락화가 되었어요.
당시 운동의 리더로 점차 역할이 커지던 청년 장애남성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비장애인 남성 교사들이 있었어요. 반면에 나는 그들에게 언제나 그냥 ‘누나’였어요. 내가 어떤 교사와 연애를 하고 있을 때 한 남성교사가 한 장애남성이 나를 좋아하는데, 그가 내게 마음을 털어놓지는 않을 거라며 이렇게 말했어요. “너는 형의 여자니까” 으악. 이건 너무 구리잖아요. 이런 이중적인 역할 기대가 나는 이상하고 시시했어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더 충실히 그 역할에 부응하려 애쓰기도 했죠, 내 몸과 인식 자체가 모순적이던 시기였어요.
사실 그때는 우리 모두 구조적인, 시대적인 한계 안에 있었어요. 노들야학은 장애인운동 조직으로서 열심히 투쟁했고, 활동가들은 저마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때죠. 또 노들에서는 박경석이라는 장애인 당사자가 균형추 역할을 탁월하게 해냈다고 생각해요. 박경석은 자기 혼자가 아니라 다른 장애인 당사자 김명학(현 노들야학 교장) 님에게 그 역할과 권력을 나누면서 비장애인 중심으로 장애인운동의 무게추가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데 중요한 존재였어요. 그 점에서 나는 그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노들야학의 역사에는 섹슈얼리티, 젠더에 관한 문제들이 생략된 측면이 있어요. 장애여성, 비장애여성 활동가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어요.
나는 말하자면 김상희가 노들야학에서 권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언어능력, 장애유무, 젠더, 그리고 소속 대학의 이름, 그런 것들이 야학 내에서 어떤 권력 차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때 한 사건이 있었어요. 내가 어떤 사람에게 외모에 관한 욕설을 들었고 상희는 당시 영화 이야기를 나누다 성적으로 불쾌한 경험을 했던 거예요. 우리는 이 말이 성희롱이라고 판단하고 문제를 제기했어요. 그런데 내부에서 우리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그분은 별도 징계 없이 퇴임했고요. 나는 그 후에도 교사회의 때마다 문건을 써 가서 왜 문제인지를 주장했어요. 돌아보면 그때의 문제 제기 방식은 조금 무리했던 거 같기도 해요. 야학을 내려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던 거죠.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