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희③] 자유로운 존재들의 바다 / 김원영
[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 이상한 단체 장애여성공감
장애여성공감(아래 공감)이라는 단체에 대해 처음 들은 건 2000년도에요. 그때 노들에서 내는 소식지 「부싯돌」에서 검정고시를 주제로 공감을 취재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취재를 다녀온 분이 미경 언니에게 말하기를, 도대체 요점이 뭔지를 알 수 없었다는 거예요. 검정고시 제도의 문제나 장애인교육권 이런 걸 주제로 쓸 생각이었을 텐데 공감 회원분들이 검정고시에 관한 자기 경험을 그냥 주구장창 말했다는 거죠. 핵심 주장을 뽑기가 어려워서 인터뷰이의 말을 약간 요약해서 그대로 실었어요. 그런데 공감에서 잡지의 내용을 보고서 우리가 말한 거를 우리의 허락과 동의를 구하지 않고, 소통하지 않고 그대로 쓰면 어떡하냐고 문제제기를 한 거예요. 미경 언니도 나도 ‘공감 이상한 단체 같다’고(웃음), 뭐 아무 운동적인 내용이 없고 자기 얘기만 하는 그런 단체 같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공감에 대한 첫 기억이죠.
2000년대 초는 한국에서 영페미니스트 운동이 본격화된 시기에요. 언니네트워크라는 웹사이트에서 여성들이 자기 계정을 만들어서 자신의 경험을 써서 올렸단 말이에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이렇게 많은 여성이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었구나, 이게 내 경험만이 아니었구나. 페미니즘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노들에서 이런 공부를 하기는 어려울 거 같았어요. 조직 안에 젠더나 섹슈얼리티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고 한창 생각했고 성희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까요.
하루는 혜화동에서 박경석 교장선생님과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았어요. 연애 고민도 있었던 거 같고, 당시 노들에서 내가 키워가던 의문들을 나눴겠죠. 그런데 말이 잘 안 통하는 거야. 교장선생님은 계속 구조적 모순 이런 이야기하고(웃음). 내가 그냥 집에 들어가시라고 밀어드리고, 공감에서 활동하던 배복주 님에게 전화를 했죠. 밤 11시쯤이었는데, 우리는 개인적으로 만나서 술을 마실 사이가 전혀 아니었어요. 복주 언니는 아예 술을 마시지 않던 때이고요.
배복주에 대한 나의 첫 이미지는 음, 좋지는 않았어요. 아마 이규식(현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님의 리프트 추락사건 투쟁이었던 거 같아요. 1999년에 당시 노들야학 학생이었던 규식 님이 혜화역에서 휠체어 리프트를 타다가 떨어져 다쳤거든요. 사당역에서 열린 집회 현장에서 처음 봤는데, 당시에 다들 워낙 분노할 상황이기는 했죠. 장애인들이 추락해서 다치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으니까요. 그렇기는 해도, 다 같이 분노를 표출하고 약간 잠잠해지고 나서까지 복주 언니 혼자 너무나 광분해서 막 소리를 지르는 거야. “으악~~!” (이때 진희는 배복주의 분노를 몸으로 재현했다) 나는 “어? 저럴 정도까지는…” 하면서 진짜 이상한 언니다. 나라도 진정을 시켜야 하나? 그러고 있었죠.
나는 활동가로서 사람들을 잘 선동하거나 분노를 효과적으로 표출하는 행위를 잘 못한다고 생각하며 자괴감을 느꼈잖아요. 그러니 집회 현장에서 스스로 자제를 많이 했어요. 내가 그런 정치적 선동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괜히 위축되었던 거죠. 서툴고 이상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날 배복주 언니를 보고서 ‘와, 너무 창피하다… 그런데, 속이 시원하다!’ 이런 감정이 드는 거예요. 교장선생님과 술을 마시며 고민을 토로했던 그날, 바로 그 이상한 배복주 언니가 생각나는 거죠. ‘그래, 다 필요 없다. 같이 욕해줄 사람이 필요해.’ 그렇게 한밤에 전화를 했는데, 언니가 나왔어요. 술도 안 마시는 사람이 그날은 둘이 만취할 때까지 마셨어요. 운동에 대한 고민부터 개인사까지 나의 모든 이야기를 끝까지, 정말 끝까지 했고 언니가 그 모든 걸 들은 후 말했죠.
“너는 노들에 있으면 안 되겠다.”
“그래요?”
“공감 캠프에 와.”
“언니, 나 페미니즘 모르는데…”
“그냥 와서 활동보조해. 너 잘하잖아.”
2001년 9월 공감이 개최한 첫 번째 캠프에 참가했어요. 스무 명의 장애, 비장애 여성들이 모였는데, 자기소개만 3시간을 하더군요. 중도 장애를 가지게 된 중년의 여성이 자기가 비장애여성으로 살다가 장애를 입은 후 남편과의 관계에서 겪는 이야기를 털어놓았어요. 그건 바로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한 사람이 20분 넘게 이야기를 하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죠. ‘세 시간이 뭐야 30일로도 부족하다. 자기 삶의 서사 각각이 너무나 중요하다. 이 맥락을 알지 못하고 운동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어느덧 나도 내 이야기를 긴 시간 말하고 있었어요.
- 산을 내려와 바다로
첫 번째 공감캠프에서 엄청난 ‘은혜’를 받고서, 그 후에도 노들에서 활동을 계속했어요. 6개월간은 상근활동가로 일했죠. 2001년 1월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사고 이후 2월 서울역 선로점거로 폭발하기 시작한 이동권 투쟁은 2001년에서 2002년으로 이어지며 점점 더 격렬해지고 있었어요. 이 운동의 의미는 정말 컸기에 함께 열심히 했어요. 다만 노들의 상황이 계속 급박하게 돌아가고, 맞서 싸워야 할 문제가 많아지자 내가 조직에서 제기하고 싶었던 문제를 이야기하기는 더 어려웠어요. 나는 조직 안에 성차별이 있음을 인정받고 싶었어요. 노들에는 좋은 분들이 많았지만 개인적인 위로가 아니라 조직이 변화하는 길을 함께 찾기를 원했어요. 사실 나 역시 이런 문제의식을 잘 설명하기보다는 거칠고 공격적인 태도로 표현했어요. 노들 사람들과 관계가 점점 멀어졌죠.
나는 공감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어요. 공감을 통해서 알게 된, 타리(현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활동가)를 비롯한 페미니스트들을 만나고 싶었어요. 월경 페스티벌처럼 그들이 기획하는 당시의 새로운 활동들이 흥미로웠고, 이들이 장애여성과 맺는 관계를 나도 맺고 싶었어요. 이동권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그렇게 공감을 향해 조금씩 이동했던 거 같아요. 그리고 2002년 봄이 지날 무렵 노들을 정리하기로 결심했어요. 물론 쉽지 않은 과정이었죠. 노들 자체가 나의 20대 대부분을 보낸 공간이었으니까요. 노들에서 만난 관계들, 특히 박경석 교장선생님과 잘 정리하는 일이 힘들었어요. 함께 오래 활동하고 싶은 사람이었으니까요.
2002년 6월 노들야학을 내려와 공감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9월, 우리에게는 정말 역사적인 캠프를 가게 되죠. 캠프의 이름은 ‘장애여성 인권 캠프 억압된 천사에서 자유로운 마녀로’였어요. 섹슈얼리티를 주제로 한 캠프였죠. 지금은 평범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완전히 혁명적이었어요. 2001년 내가 처음 참가했던 캠프는 서울 도봉구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수련원 건물에서 진행했어요. 2002년 캠프는 비행기를 타고서 제주로, 그것도 제주의 협재해변으로 갔어요. 장애여성 스무 명과 비장애여성 스무 명이 비행기를 탄 거예요. 장애여성들 대부분 휠체어를 이용했고요. 우리가 이용하기로 한 대한항공이 정말 난리가 났죠. 휠체어 탑승 문제로 전화가 계속 왔어요. 수동휠체어뿐 아니라 전동휠체어도 있었고 당시는 항공기 안에 적재하기가 까다로운 습식배터리가 많던 시절이에요. 장애인 탑승객이 많지도 않았던 때이니 항공사도 우왕좌왕하고, 게다가 장애인의 경우 항공료 할인이 있잖아요. 항공사 입장에서 어렵고 ‘수익성’은 없는 몸들이 대거 타는 거죠. 준비를 하던 우리도 전동휠체어 타고 참여하려는 참가자에게 “언니 꼭 전동 타야 돼?”이런 말도 마구 했죠(웃음).
제주공항에 내려서 협재해수욕장까지 가는 것도 문제였어요. 접근 가능한 교통수단이 제주에 거의 없던 시절이니 특수학교에 협조를 구해서 휠체어 리프트가 달린 버스를 섭외했죠. 그걸 타고 바다를 향해 가는 거예요. 해수욕장에 도착하고, 각자의 휠체어에서 내리고, 물에 들어갔어요. 중증의 장애를 가진 언니들이 튜브 한 가운데 타고 함께 노는데, 이 과정 자체가 엄청난 노동을 동반해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활동지원이 필요하죠. 서로 몸을 드러낸 채로 밀착하고, 끌어안고. 노들에서는 비장애인 남성 선배들이 힘을 통해 해결했던 많은 상황을 우리는 소통을 해서 같이 답을 찾아야 했죠. 한 사람이 번쩍 안을 수 없으니 두세 사람이 안을지, 한 명이 팔짱을 끼면 다른 사람이 신체의 다른 어디를 보조하는 게 좋을지, 보조를 받는 사람은 보조하는 사람의 어디를 어떻게 붙잡을지, 이 모든 과정에서 지원하는 사람과 지원을 받는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해요.
나는 물을 엄청 무서워해요. 그런데 용기를 내어서 처음 물에 누군가가 들어가니까 나도 같이 들어가 파도를 타게 되었어요. 물에서 나와서는 모래 처리하고 수건을 빨고 몸과 휠체어를 씻으니 반나절이 사라졌죠. 이 모든 시간을 결코 잊을 수 없어요. 참여했던 우리 모두에게 평생 처음이었던 경험이었죠.
해변에서 시간을 보낸 후 숙소에 도착해서는 캠프의 주제이기도 한 섹슈얼리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마련됐어요. 장애여성에게 월경이란 무엇인지, 연애란 무엇이고 연애 관계에서 왜 장애여성은 주도권을 가지기 어려운지, 이성애 중심의 연애 관계가 지닌 억압은 어떤 것인지 이야기를 나눴어요.
우리는 이 이야기들 속으로 더 깊고 현실적으로 들어가기 위해 워크숍을 준비했어요. 노들에서 했던 토론연극의 형식을 가져왔죠. 캠프를 함께 준비한 장애인, 비장애인 스태프들이 몇 가지 상황을 설정하고 각각의 역할을 나눠 맡아 연기했어요. 장애여성이 연애하는 남성에게 일방적인 스킨십을 당하는 성폭력적인 상황, 차를 타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운전자에게 성희롱 피해를 겪는 상황 등을 연기로 보여주고, 그에 대항하는 방법을 함께 찾았어요. 왜 나는 이런 상황에서 위축되었을까. 이 상황에 맞서기 위해 누구와 함께할 수 있을까 물음을 던졌죠. 그때 비장애여성 타리가 일방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남성 애인 역을 탁월하게 수행해서 공공의 적이 되었어요. 참가자들은 타리가 맡은 인물에 대항해서 명확히 거절 의사를 표하고, 그 행동에 문제를 제기하고, 경찰에 신고를 하고, 친구와 연대해서 대항하는 방식을 찾았어요. 몸을 부대끼며 수영을 하고, 밤늦게 이야기를 나누다 함께 잠이 드는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이었으니, 불특정 다수가 극장에 모여 대안을 모색하는 토론연극 무대보다 더 다양하고 구체적인 대안이 안전한 분위기 가운데 제시될 수 있었죠.
‘억압된 천사에서 자유로운 마녀로’ 캠프가 진행되던 숙소에는 캠프 선발대가 먼저 와서 꾸며놓은 ‘자궁방’이 있었어요. 시뻘건 천으로 둘러싸인 방이었어요. 캠프 초반 쑥스럽다며 자궁방에 오지 못하던 분들도 점차 캠프가 진행되면서 너도나도 이 방으로 왔어요. 다 같이 그곳에서 성기를 주제로 작업한 작가들의 전시물을 보고, 자신의 몸 사진을 찍고, 서로의 성기를 폴라로이드로 찍어 주기도 했죠. 생각해보세요. 그때는 2002년이에요. 장애여성이든 비장애여성이든 제주에서 수영을 하는 일조차 흔하지 않던 때예요. 말해지지 못했던 언어와 만나야 했던 경험들이 그야말로 폭발했죠.
우리는 끊임없이 정상성의 기준과 신화에 도전한다! 손으로 글을 쓰고, 밥을 먹고, 세수를 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고정관념 아래 발로 글을 쓰고, 밥을 먹고 세수를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자. (…) 장애여성과 비장애여성은 서로에게 필요한 점에 대해 섬세하게 표현하고 도움을 주고받는다. 비장애여성은 필요 이상의 도움을 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고, 장애여성은 필요한 것을 요구할 때 자세하고 당당하게 요구한다. (마녀권리선언 – 캠프참여자의 권리선언, 공감, 2002)
- 물속으로
공감에 들어와 2002년의 그 엄청난 캠프를 기획하고, 너무나 경이로운 시간을 보내고서 서울로 돌아와 복주 언니랑 정말 열심히 활동해야겠다고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어요. 공감 활동가로 같이 일하자고 타리를 설득했고요. 노들에서 처음 연극을 알려줬던 경민선, 그리고 정말 특별한 개성과 신들린 듯한 퍼포먼스를 해내던 장애여성 박주희 님과 함께 연극팀을 만들었어요. 글을 쓴다는 건 특별한 역량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러면 연극을 하자. 연극은 몸으로 하면 된다. 맨날 앉아서 말로, 글로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풀어내자 이런 마음이 그 시작이었어요. 당시 공감의 사무를 책임지는 역할을 하던 복주 언니에게 제안을 하자 언니가 말했죠. “장애여성들이 원한다고? 그럼 해봐.”
‘장애여성 배우를 모집합니다’라는 포스터를 만들어 게시하고, 팀 이름을 ‘춤추는 허리’(아래 춤허리)라고 지었죠. 포스터 찍기 직전까지 이름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민선 님이 읽던 어떤 시에서 ‘춤추는 허리’라는 표현을 발견한 거예요. 주희 님도 나도 바로 저거다 싶었죠. 허리는 정상적인 신체의 상징 같으니까요. 꼿꼿한 허리. 날씬한 허리. 그런데 장애여성들은 늘 앉아 있으니 척추와 함께 허리가 휘어지죠. 이렇게 휘고 꼬인 장애여성의 허리가 춤을 추는 이미지는, 공감이 하고 싶은 신체적 연극을 잘 드러낸다고 생각했어요. 2003년 5월의 일이에요. 그리고서 나는 그해 가을 무렵 공감에서 사라져버렸어요. 잠수를 탄 것이죠. 무려 3년 동안이나.
도대체 왜 그랬을까.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노들야학을 떠나는 그 어려운 결정을 거쳐 공감활동을 시작했던 것인데, 그 자리가 감당이 되지 않았던 것일까요. 당시 나는 스물여덟 살이었어요. 많은 것을 배워야 했고 나 스스로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나 봐요. 시작은 즉흥적이고 단순했어요. 하루를 나가기 힘들어서 빠졌고, 그것이 이틀이 되고, 3일이 되었죠.
그동안 고 박종필 감독(다큐 ‘장애인 이동권 투쟁보고서-버스를 타자’ 감독)의 촬영작업에 참여하면서 녹취를 풀었고, 한글 학원에서 일을 했고, 여성문화아카데미 수업을 들었어요. 문화예술계 전반과 넓게 만나는 계기였고 다양한 예술운동을 하는 페미니스트들과 관계를 형성했어요.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점점 침체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했죠.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삶을 계속 살 수 있을지 걱정이 됐고, 안정적인 관계와 공간이 그리웠어요. 공감을 그렇게 떠났으니 다른 단체에서 운동을 하겠다고 말할 처지도 아니었죠. 3년 시간이 흘렀을 때, 당시 공감의 대표였던 박김영희 님과 사무국장 정영란 님이 연락을 주셨어요. 뭐 하고 사는지 안부를 묻더니, 다시 활동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셨어요. 춤허리에 스탭이 필요하니 그 역할로 다시 시작해보자고요. 공감이 다시 나를 불러주었으니, 열심히 해서 지난 시간을 만회하자고 마음먹었죠.
마침 그 무렵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한 미경 언니가 2006년 여름부터 공감의 활동가로 일하고 있었어요. 나는 10월 공감으로 돌아왔고요. 미경 언니가 있다는 사실이 공감에 다시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죠. 춤허리의 멤버들도 나를 환영해줬어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