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하④] 맥심 커피가 식기도 전에 / 홍은전
[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 맥심 커피가 식기도 전에
1년 동안 싸운 결과 석암재단의 비리 책임자들이 사법처리되고 운영진들이 교체되는 성과를 만들었어요. 2년 전 S재단 투쟁과는 그 결과가 아주 달랐죠. S재단 역시 이사장이 구속되었지만 운영진을 바꾸진 못했거든요. 그새 법이 달라졌거나 사회적 상황이 크게 변한 게 아닌데 결과는 왜 그토록 달랐을까 생각해보면 시설에 살았던 장애당사자들의 힘 때문이었어요. 같은 이야기도 직원이 하는 것과 당사자들이 하는 건 많이 달랐어요. 원장이 나를 발로 찼어, 밥에서 냄새가 났어, 만날 무말랭이만 먹었어, 내가 사람이 죽는 걸 봤어, 하면서 당사자들이 농성하고 삭발을 하니까 사회적 울림이 굉장히 컸던 것 같아요.
2009년 투쟁이 일단락되었을 때 우리 내부에서는 그분들을 계속 시설에 살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모이고 있었어요. 투쟁은 승리했지만 그분들의 삶은 오히려 생기를 잃었어요. 싸움이 끝났으니 이제 시설 밖에서 매일 자신들을 데리러 오던 활동가들의 발걸음도 끊어진 거죠. 우리 역시 결국 대안은 시설 안에서 찾을 수 없다는 걸 더 절실히 알아갔어요. 시설비리 척결 싸움은 해볼 만큼 해봤으니 이제 다음 단계의 싸움으로 넘어가야 했어요. 탈시설운동이죠.
중증장애인이 탈시설을 하기 위해선 활동지원서비스, 소득, 주거가 필요해요. 수급권자라면 소득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고 2007년 활동지원서비스가 제도화되어 조금씩 확대되고 있었어요. 남은 건 주거였죠. 탈시설운동은 주거를 요구하는 투쟁이에요. 중요한 건 이 권리를 요구할 주체인데 그 시기엔 석암재단 비리 투쟁을 이끌었던 장애당사자 그룹이 형성되어 있었어요. 그분들이 시설을 박차고 나와 노숙투쟁을 하며 탈시설 권리를 외친다면 얼마나 획기적일까 하는 이야기들이 오갔지만 함부로 미래를 약속할 수 없으니 무언가를 제안하기에는 막막하고 막연했어요. 그런데 그 여름 평원재단이라는 사회복지재단이 혜성같이 나타났어요. 평원재단은 서울 혜화동에 장애인이 자립을 준비할 수 있는 집 ‘평원재’를 짓고 개소를 앞두고 있었어요. 우리가 노숙농성을 하면 그 기간 동안 평원재를 이용해도 좋다고 했어요. 생짜 노숙과 그나마 돌아가면서 씻고 자고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건 천지 차이니까, 그렇다면 이 싸움을 한 번 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투쟁의 판을 구상한 뒤 석암재단 장애인분들께 제안하러 갔어요. 마음이 조마조마했어요. “우리보고 언제까지가 될지도 모르는 노숙을 하라는 거야?”라고 하시면 뭐라고 답하지? 아, 모르겠다, 그냥 말이라도 해보자, 그런 마음이었어요. 시설 앞에 3.1운동 기념공원이 조그맣게 있는데 거기에 맥심 커피믹스를 타서 둘러앉았어요. 열 몇 분이 모였어요. 제가 말했어요. “형님들이 나는 그렇게 열심히 싸웠는데 내 삶은 왜 변하지 않지? 나는 왜 시설에서 계속 살아야 하지? 억울하고 화나는 마음 느끼시는 거 잘 알고 있어요. 이제 나오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바깥엔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가 그걸 만드는 싸움을 해봅시다. 시설을 박차고 나오세요. 믿고 함께해주시면 우리도 끝까지 가보겠습니다.”
제 얘기가 끝나자마자 그중 8명이 그 자리에서 ‘오케이!’ 하셨어요. 뭔가 많은 걸 설명해야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죠. 마치 ‘그걸 왜 이제 얘기해? 얼마나 기다렸는데’ 하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농성은 얼마나 걸리는데? 그다음엔 어떻게 되는 건데? 그런 질문 하나 없이 알았다고, 좋다고, 디데이가 언제냐고, 그것만 물으셨어요. 그날의 이야기는 맥심 커피가 식기도 전에 끝났어요.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과연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여덟 분이 일단 시설을 나와 버리면 정말로 한 발도 물러설 수 없는 그런 투쟁이 될 테니까요. 몇 해 전 일본에 연수를 갔다가 ‘장애인 차별과 싸우는 전국공동체연합’의 사이또 겐조를 만났어요. 사이또 씨는 젊은 시절 학생운동을 하는 비장애인이었는데 장애인시설에 갔다가 그 열악한 환경을 보고 너무 분노했어요. 다음날 리어카를 끌고 그 시설에 다시 가서는 장애인 네 명을 태우고 나와 버렸대요. 그리고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살았대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찔렸는지 몰라요. ‘2001년에 나는 왜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나는 겁쟁이다…’ 하면서요. 이 일이 엄청난 사건이 될 거는 생각은 전혀 못했고 다만 나의 오랜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만회할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그리고 2009년 6월 4일 수십 년간 시설에 갇혀 살았던 8명이 시설을 뛰쳐나와 마로니에 공원에서 노숙농성을 하면서 탈시설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어요. 서울시를 향해 탈시설 권리 보장, 주거대책 마련을 요구하면서 두 달 동안 싸웠어요. 이번에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의 인적 물적 자원이 총동원됐어요. 당시 전장연은 활동지원서비스 투쟁을 너무나도 뜨겁게 펼치고 있을 때라 제 입장에선 그 바쁜 사람들에게 부담을 하나 더 얹는 것 같아서 몹시 미안했어요. 지역사회에서 살고 있는 장애인들에게 탈시설은 어쨌든 자기 문제는 아니니까요. 그런데 그건 내가 비장애인이라 몰랐던 거더라고요. 중증장애인들은 시설문제를 모두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어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제 일처럼 달려와 주는 게 놀라워서 더 신나게 싸웠어요.
제일 신났던 건 ‘오세훈 시장 따라잡기 투쟁’에 성공했을 때였어요. 사회복지사의 날 행사를 하던 날이었어요. 객석에 천명쯤 앉아 있었는데 오세훈 시장이 단상에 올라 인사말을 하자마자 제가 벌떡 일어나서 외쳤어요. 탈시설 권리 보장하라! 진행요원들에게 끌려 나오면서도 끝까지 외쳤어요. 오세훈 시장이 대선 가도를 달릴 야망을 품고 있던 때라 대중 강연 같은 자리가 많았어요. 우리로선 기회였죠. 가는 곳마다 소리치고 드러눕고 그러다 멱살잡이도 했죠. 오세훈 시장은 우리가 정말 싫었던 것 같아요. 농성 두 달 만에 연락이 왔고 협의가 시작됐죠. 시설에서 나온 사람들이 자립을 준비할 수 있는 체험홈, 5년까지 살 수 있는 자립생활주택 정책이 발표되었어요. 한국의 첫 번째 탈시설 정책이었어요. 장애인은 무조건 시설수용 정책으로 일관했던 이 사회에 균열이 시작된 순간이었죠.
-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탈시설운동은 활동지원서비스, 교육권 투쟁, 이동권 투쟁과는 성격이 달라요. 다른 권리운동이 정부 당국과 싸우며 법을 만들고 예산을 확보하는 싸움이라면 탈시설운동은 대형 민간법인들과의 전쟁이에요. 그들은 시설수용 정책으로부터 구체적으로 이득을 얻는 기득권세력이에요. 그러니까 탈시설운동은 명확한 적들이 있는 싸움이죠. 첫 번째는 족벌법인과의 전쟁이고 두 번째는 종교법인과의 전쟁이에요. 그들은 사회복지 안에서 문어발처럼 시설을 운영하며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고 있어요. 한국 사회복지의 근간을 이루며 어마어마한 국가 예산을 가져가요. 이건 한두 명 탈시설시키는 그런 싸움이 아니에요. 한국사회 복지 권력층과 중증장애인들과의 대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늘 패배했던 거예요.
마로니에 농성 후 나는 2년 동안 전장연에서 활동했어요. 박경석 대표와 함께 싸우면서 이것이 굉장히 뿌리가 깊은 세력과의 전쟁이란 걸 알게 됐고 그렇다면 더더욱 전장연과 합심해서 나아가야 한다는 마음이었어요. 전장연이 진보적 운동을 어떻게 개척해 나가느냐가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동안 전장연이 함께 해준 것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아주 컸죠.
그 사이 석암재단은 과거의 역사와 단절하고자 ‘프리웰재단’으로 이름을 바꿨고 8명이 살았던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은 ‘향유의집’이 되었어요. 시민사회가 끈질기게 개입해서 여전히 이사회 내부에 남아있던 옛 비리세력들을 완전히 몰아낸 건 2013년 무렵이었어요. 발바닥행동의 멤버였던 박숙경 활동가가 이사장이 되었고 서울시의 1차 탈시설화 추진계획(2013년~2017년)에 발맞춰 적극적으로 거주인들을 자립시켰어요.
그리고 2018년 제가 프리웰재단 이사장이 됐어요. 안 하고 싶었어요. 탈시설 반대세력들의 타깃이 될 게 뻔했거든요. 시설 내부엔 탈시설에 반대하는 직원, 거주인 당사자, 그 가족들이 많았어요. 이전의 저는 시설 울타리 바깥에서 탈시설이 옳아, 너희들은 틀렸어, 하고 외치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프리웰 대표가 된다는 건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그 아수라장 한가운데 서는 거예요. 예수가 자기가 가야 할 길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길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기도를 해요. 독배가 든 이 고통의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 고난의 길을 안 갈 수만 있다면 제발 그렇게 해달라는 기도를 한 건데 그런 마음이었죠. 그래도 어차피 여기까지 왔고 누군가 해야 한다면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첫 이사회에서 향유의집을 폐지한다는 내용을 의결했어요. 모든 거주인의 자립을 지원한 뒤에 문을 닫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두고 이를 빠르게 진행하겠다는 계획이었죠. 능력 있는 장애인들이 시나브로 자립해 나가서 시설이 조용히 비어가는 것과는 다른 진행이었어요. 발바닥행동 활동가들과 경석 형과 함께 향유의집의 마지막 모습을 어떻게 할지 오랫동안 고민을 나눴어요. 최중증장애인 요양시설로 계속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슬로건이었던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를 실제로 실현해 낼 것인가. 그걸 실현하려면 지원 체계가 아주 탄탄해야 하는데 우리가 그걸 과연 감당할 자신이 있는가. 결국 시설을 폐지하기로 했죠. 이젠 새 시대를 열어야 할 때라고 판단했어요.
탈시설에 반대하는 직원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은 박숙경 이사장 재임 기간이었던 5년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저는 절차적 민주주의에 발목이 잡혀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절차적 민주성을 확보한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100명 모두가 동의해야 하는 건가요? 아니면 51명만 동의해도 민주성을 확보한 건가요? 이런 논리로 가면 탈시설은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해요. 탈시설은 인권의 문제이고 인권은 다수의 동의를 확보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그들의 인생을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모호한 논의로 붙들고 있는 것 자체가 인권침해라고 생각해요. 탈시설은 ‘빠르고 안전하게’, ‘빠르고 섬세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게 저의 입장이었고 이사회에서 모두 동의해주셨어요. 그리고 저에 대한 맹렬한 공격이 시작됐죠.
일부 직원은 우리가 무연고 발달장애인을 강제로 탈시설 시켰다면서 각종 고소·고발을 넣으면서 제동을 걸었어요. 일부 우호적인 직원을 빼면 대부분은 찬성도 반대도 아닌 중간이지만 이분들도 실은 은근한 반대예요. 일자리가 보장됐으면 하는 거죠. 이대로 평화로운데 왜 자꾸 들쑤시냐는 적대감이 느껴져요. 처음 이사장이 됐을 땐 가치 갈등을 굉장히 많이 느꼈어요. 감정이 치달을 때는 속으로 ‘당신들은 여태 돈 많이 벌었잖아, 눈앞에 이득이 조금 없어진다고 마치 죽을 것처럼 그러다니 정말 이기적이구나’ 하고 생각할 때도 있었어요. 근데 직원들과 계속 만나면서 그 마음을 반성했어요. 이것은 노동자의 기본적인 권리라고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외쳤던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구호도 떠올랐어요. 누군가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이기도 한 거죠. 그 책임자의 자리에 내가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되게 혼란스럽고 힘들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인정한다면 이제 어떡해야 하지? 탈시설은 추진해야 하고 누군가는 직장을 잃을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고민을 오랫동안 했어요. 지금도 하고 있고 계속 괴로워요. 직원 입장에서 시설폐지는 생존권의 문제인데 정부가 대책을 마련해주지 않으니 모두 법인의 몫이에요. 어떻게든 고용 연계를 해보려고 마지막까지 백방으로 뛰었지만 절반 이상은 권고사직 처분을 낼 수밖에 없었어요. 만약에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대표였다면 해고의 부담을 이렇게까지 껴안으며 탈시설을 추진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현행법상 걸리는 여러 문제들을 감당해야 하거든요. 그리고 어떤 목적에서든 해고를 쉽게 생각하는 사장이어도 문제잖아요. 가치 갈등이 많았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고요.
2021년 마침내 향유의집은 문을 닫았어요. 2009년 120여 명이 살던 시설엔 이제 아무도 살지 않고 아무도 들어올 수 없어요. 한국에서 전례가 없는 사례였어요. 탈시설은 일개 민간법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시설 노동자들의 임금은 100% 국고 보조금이에요. 진짜 사장은 월급 주는 사람이죠. 정부가 민간법인이라는 바지 사업자를 두고 대리 사업을 하고 있으면서 이 문제에 뒤로 빠져있다는 건 말이 안 돼요. 해외 어느 나라도 개별 법인이 나서서 이렇게 추진하는 경우가 없어요. 모두 정부가 했죠. 프리웰의 경우는 특수한 경우예요. 우리는 선례를 만들 뿐이에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