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소연⑤] 21세기 가장 극렬한 존재 투쟁 / 홍은전
[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요
쉬고 있을 때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아래 한자협) 양영희 대표가 안식년 끝나면 뭐 할 거냐고 묻더니 한자협으로 오라고 했어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일이었어요. 그런데 그 말을 듣고는, 지금 생각해도 좀 이상한데, “언니, 내가 긍정적으로 생각해볼게” 그랬어요.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아래 발바닥행동)에서 활동하며 한 사람이 탈시설해서 자립하는 데 필요한 일을 A부터 Z까지를 다 경험해봤어요. 마지막으로 장애인이 있어야 할 곳은 지역사회이고, 필요한 지원을 받으면서 자기 권한을 찾는 거점은 장애인자립생활센터였어요. 탈시설운동도 그들이 있어서 가능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센터에 대한 고마움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던 것 같아요. 발바닥행동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느끼던 차에 나의 운동을 확장하고 싶다는 마음, 한자협은 전국조직이니까 새로운 지평이 열릴 거라는 기대도 있었어요.
발바닥행동과 논의한 뒤 2015년 한자협에 들어갔어요. 직위가 사무총장이었는데 저한테는 어떤 부담이 있었어요.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는 장애인이 권한을 갖는 게 상징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아주 중요해요. 같은 의미로 비장애인인 내가 한자협 사무총장으로 오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어요. ‘나도 장애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10년 전의 나였다면 많이 고민했을 거 같아요. 하지만 그사이 나는 많은 경험을 쌓았고 운동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어요. 내 본질이 장애인이라면 그 정체성이 장애인운동을 끌고 가는 좋은 동력이 되겠죠. 하지만 내가 비장애인이어도, 물론 장애인과 똑같은 정체성을 가질 수는 없지만, 이 운동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나의 진심도 본질이라고 생각했어요. 열심히 할 테니 나를 믿고 평가는 나중에 해달라고 요청한 뒤 한자협에서 활동을 시작했어요.
2003년에 출범한 한자협은 전국 100여 개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연대한 협의체예요. 2001년 이동권 투쟁으로 중증장애인들이 운동의 주체로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이동권 투쟁으로 단단해진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 세미나를 하면서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만들었고 활동지원서비스 같은 장애인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어요. 센터는 동료상담, 활동지원서비스, 권익옹호, 탈시설, 공공일자리 등의 활동을 하는데, 이 모든 게 정부가 먼저 해주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투쟁을 통해 목적의식적으로 만든 거예요. 장애인 차별에 저항하고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운동의 거점이죠. 이 거점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제도와 정책을 만들어 왔죠.
한자협은 각 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운영을 지원하고 조직과 교육 사업을 해요. 또한 장애인 의제를 만들어내고 장애인 권리 투쟁을 하는 곳이죠. 나는 조직사업이 잘 맞는 사람이에요. 장애인 당사자를 만나서 이 운동이 왜 필요한지 그 의미를 나누고 새로 만들어졌거나 변화하는 정책들을 공유하면서 당사자들이 계속 운동할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발바닥행동을 통해 운동을 해야 한다는 미션을 얻었다면 한자협에서 만난 장애당사자를 통해 이 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얻었어요. 발바닥행동이 탈시설운동의 중요함을 알리고 꽃 피웠다면 결국 마지막에 그 역할을 수행하는 건 장애인자립생활센터예요. 한자협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의 가장 기본 단위인 이 센터들을 조직하지 못한다면 어떤 운동도 지속되기 어려워요.
중앙에 정보가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각 지역 센터에 성실하게 공유해야 해요. 온라인 소통방을 만들어서 수시로 자료들을 공유하고 메일로 소식을 알리고 전화 연락을 하죠. 서울에서 대규모 집회나 농성이 있으면 농성에 참여할 수 있도록 조직해요. 농성은 그 시기 가장 핫한 이슈로 싸우는 현장이기 때문에 여기에 한 번 와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건 너무나 달라요. 오기 전날 어떻게 오는지 확인하고 고맙다고 인사하고, 당일엔 직접 가서 얼굴 보고 어떻게 지내는지, 어려움은 없는지 묻고, 끝나고 돌아가면 고생했다고 고맙다고 꼭 인사하는 거, 그런 게 정말 중요한 일이고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장애인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면서 공동체로 함께 살아가는 곳, 장애인의 비빌 언덕이 되어 주는 곳, 장애인이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는 곳, 그런 곳이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되도록 한자협은 비전과 방향을 계속 제시해줘야 해요.
한자협에 와서 센터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더 알아버렸어요. 감동을 많이 받았어요. 서울에서 아무리 열불 나게 투쟁해도 지역은 시계추의 속도가 달라요. 서울의 메트로놈이 똑딱똑딱똑딱똑딱 숨 가쁘게 움직인다면 지역은 똑 딱 똑 딱 이런 속도로 가요. 지역의 공무원들 중엔 장애인을 여전히 ‘장애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인식이 1980년대에 머물러있는 거죠. 그러니 탈시설이란 건 듣도 보도 못한 거예요. 우리가 권리를 요구하면 콩고물 좀 주면서 달래려는 식이에요. 서울보다 활동하기가 훨씬 어려울 텐데 그 와중에도 센터가 깃발을 꽂고 이동권 투쟁도 하고 활동지원서비스 투쟁도 하면서 지역의 장애인인권을 끌어올린 역할을 하는 거죠. 굉장히 애를 쓰는 거예요. 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장애인운동을 실천하는 현장이자, 가장 밀접하게 장애인과 함께하는 공간이에요. 지난 20년 동안 센터를 중심으로 의제 투쟁을 했고, 보편적 권리로서 수많은 장애인 법과 제도를 만들어왔어요. 그래서 자랑스러운 한자협이에요.
지역에 교육하러 자주 가는데 2시부터 4시까지 하는 교육이 있다면 당사자들이 3시부터 벌써 나가려고 들썩거리기 시작해요. 지역에는 장애인콜택시가 몇 대 없기 때문에 한두 대 있는 그 택시를 타고 이동해야 하니까 시간차를 두고 나가시는 거예요. 그런 조건 속에서도 당사자들을 겨우겨우 대여섯 명이라도 함께 만나 교육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너무 자랑스러워요. 쉽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 고마워요. 그런 분들에게 비빌 언덕이 필요하잖아요. 싸우다가 밀릴 때 “우리 무시하지 마, 우리에겐 한자협도 있고 전장연도 있다!” 하면서 든든한 빽이 될 수 있도록 그 역할을 잘 해내고 싶었어요.
예전엔 탈시설한 장애인들이 한 명 한 명 모두 혁명가라고 생각했어요. 그 어려운 걸 해낸 거잖아요. 그런데 시간이 쌓일수록 모든 장애인이 그 삶을 유지하려는 애씀 자체가 혁명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나이가 드니까 질환이 생기고 체력이 약해지면서 내 몸을 내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게 얼마나 답답하고 힘든지 경험치가 생겨요. 그런데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몸만 못 움직이는 게 아니라 사회적 차별로 이어져서 이동도 못하고 교육도 못 받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돼요. 그게 다시 개인이 능력이 없어서 그런 거라는 낙인으로 돌아와요.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열심히 운동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장애인이었다면 이 사람들처럼 저항할 수 있을까? 나는 회피하고 순응했을 것 같거든요.
장애인운동을 하면 할수록 참 멋진 동지들을 만났다고 생각해요. 내가 이 운동을 선택하길 정말 잘했다고, 나는 진짜 사람 됐다고 생각해요. 여기선 비장애중심사회의 외피를 다 벗어 던질 수 있어요. 부모가 있건 없건 돈이 많건 적건 학력이 있건 없건 내가 예쁘거나 말거나 몸 한쪽이 이상하거나 말거나 상관없어요. 그런 사회적인 기준을 모두 깨부수고 다른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게 장애인운동이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들을 모아내는 곳이 바로 장애인자립생활센터예요. 저 산골짜기에 있는 장애인을 찾아내서 때마다 모시고 나와서 장애를 다르게 바라볼 수 있도록 교육하고 상담하는 이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없다면 어디에 모여서 공부를 하고 이게 문제라고 싸울 수 있겠어요? 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모아내는 이 훌륭한 조직들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 21세기 가장 극렬한 존재 투쟁
2022년엔 활동을 쉬고 있어요. 아버지 건강이 안 좋아지신 게 가장 큰 이유예요. 부모님이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실 때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해요. 그리고 내 건강도 좋지 않았고 또 매너리즘에 빠진 것도 있었어요. 어느 날 신입 활동가가 “임소연은 유머 감각이 없어요”라고 하는 걸 듣고 진짜 충격받았어요. 내가 유머 감각이 없다고? 나 꽤 재밌는 사람이었는데! 그러고 나를 봤더니 찌든 때 같은 게 덕지덕지 붙어있는 느낌이었어요. 혹시 장애당사자들을 만나 교육할 때도 그럴까? 동료들과 회의할 때도 그럴까? 걱정이 됐어요. 어느 날은 회의를 하는데 후배가 그래요. “이번에도 임소연이 원하는 대로 됐네.” 깜짝 놀랐어요. 내가 너무 권위적으로 밀어붙였나? 20년 된 선배가 그렇게 작동하고 있다면 후배 활동가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늙으면 다 저렇게 된다고 생각할까? 반성도 되고 두렵더라고요. 쉬면서 내 나이 듦과 앞으로 운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천천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지금 내 나이는 쉰넷이에요. 오래된 내 꿈은 50세가 넘으면 천원밥집을 하는 거였어요. 밥값이 천 원이려면 주변 사람을 아주 못 살게 굴어야 되겠죠? “정하야, 쌀 후원 받기로 했는데 네가 차 몰고 갔다 와줘” 하면서 사돈에 팔촌까지 또 전화를 돌리겠죠. 제로 웨이스트를 실현하면서 차별 없고 평등한 공동체 식당을 운영해보고 싶었어요. 활동을 쉬면 그런 생각을 더 많이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에 장애인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이 한 겹 한 겹 쌓여가는 거예요. 지금이 정말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하거든요.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천천히 올라가듯 에너지가 결집하고 있어요. 우리의 숙원인 탈시설, 장애인권리예산 등을 더 힘차게 끌어올려야 할 때이죠.
2001년부터 우리는 투쟁을 통해 이동권, 장애인차별금지법, 활동지원서비스, 탈시설, 장애등급제 폐지, 노동권, 교육권 등의 권리를 요구하고 법과 제도를 만들고 예산을 확보해왔어요. 이 모든 투쟁이 권리가 없었던 장애인들이 “우리가 여기 있소!” 하고 외치는 존재의 투쟁이었다고 생각해요. 그 핵심적인 투쟁이 바로 보이지 않는 곳에 격리되고 감금됐던 존재들이 시설 밖으로 뛰쳐나왔던 탈시설운동이죠. 하지만 그래봤자 극소수의 대중들만 관심을 가졌을 뿐이에요. 그런데 최근의 지하철 시위가 그보다 더욱 강렬하게 이 존재들을 각인시키고 있어요.
전략적으로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이라는 공간을 잘 선택했죠. 비장애 대중들의 하루가 시작되고 끝나는 이동의 공간. 거기에 매일 나타나 천천히 지하철을 타고 내리길 반복하면서 지하철의 운행을 지연시켰죠. 시민과의 접촉면을 과감하게 늘리는 투쟁은 당연히 사건 사고가 계속 벌어질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까지 폭발적일 줄은 몰랐지만 지지와 응원, 비판과 욕지거리가 엄청났어요. 대중의 불편함이 폭발했다는 건 다르게 말하면 장애인의 존재가 폭발적으로 드러났다고도 말할 수도 있어요. 우린 더 자신감을 갖게 됐어요. 아! 여기가 아킬레스건이구나! 비장애중심사회의 핵심 공간, 핵심 시간을 파고든 거죠. 비장애중심사회를 바늘로 콕콕콕콕 찌르는 거예요. 이제 사람들은 알게 됐어요. 아, 장애인이 있구나! 나는 이것이야말로 21세기 가장 극렬한 존재 투쟁이라고 생각해요.
지방의 장애 당사자들을 만나 교육을 할 때면 그들이 전장연 박경석 대표를 아주 간절하게 만나고 싶다고 해요. 이건 단순히 박경석 개인을 영웅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세상과 동떨어져 나 혼자 고립된 줄 알았는데 내 편이 있다는 안도감, 장애인 권리를 위해 싸우는 집단에 대한 강한 소속감을 느끼는 거예요. 누군가 내 삶을 아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외쳐주고 있다는 카타르시스, 이준석 같은 권력자들의 핍박에도 굴하지 않는 집단과 그 리더들에 대한 신뢰감 같은 것이 뒤섞인 감정이에요. 이것은 나의 싸움이라고 느끼는 장애당사자들의 공감대가 빠르게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요. 또한 장애문제가 ‘불쌍한 장애인’을 돕는 게 아니라 비장애중심사회가 만들어낸 차별의 문제라고 느끼는 비장애인도 늘어나고 있어요. 장애인 권리 투쟁이지만 사회 전반적인 인권 의식이 확대되고 있는 거죠. 롤러코스터가 착, 착, 착, 착 올라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중요한 시점이죠. 그러니까 장애 당사자도 잘 조직해야 하고 장애인자립생활센터도 탄탄하게 만들어놓아야 해요.
비장애인 중심 세상에선 지금이 4차 산업혁명 시기라고 하잖아요. 장애인운동의 역사에선 지금이 5차 혁명 시기라고 생각해요. 1차 혁명은 이동권 투쟁, 2차 혁명은 활동지원서비스 투쟁, 3차 혁명은 탈시설 투쟁, 4차 혁명은 장애인정책의 근간을 갈아엎은 장애등급제 폐지 투쟁이었어요. 이 어마어마한 혁명들을 지난 20여 년간 만들어냈어요.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거점으로 우리가 투쟁한 거죠. 5차 혁명은 장애인 노동권 투쟁이에요. 우리는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확대를 요구하며 싸우고 있어요. 효율과 실적을 따지는 비장애인 중심적인 노동이 아니라 최중증장애인도 참여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라는 거죠. 그러려면 장애인에게 맞는 새로운 기준이 만들어져야 하고 중증장애인이 일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지 노동에 대해 새롭게 사유하면서 장애인이 하는 일의 의미가 가치를 나누어야 해요. 중증장애인이 일을 할 수 있으려면 아주 많은 것들이 재편되어야 해요, 아주 중요한 시기예요. 한 명이라도 더 조직하고 우리 잘하고 있다고 서로 어루만져주고 북돋워 줘야 해요. 이런 때에 나는 뭘 할까? 이젠 내가 잘하는 거, 좋아하는 거, 그런 건 특별히 의미가 없어요. 다른 활동가들이 잘할 수 있도록 내가 가진 경험과 노하우를 잘 나누는 게 나의 마지막 역할이 아닐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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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독한 소연 씨
인터뷰가 끝난 뒤 소연은 저녁 식사를 차려주었다. 야채 샤부샤부와 샐러드가 메인 요리이고 소연 엄마표 파김치와 깻잎 등이 다채롭게 식탁을 채운 소박한 밥상이었다. 소연이 나와 사진작가를 위해 차려준 아름다운 밥상을 보며 2009년 뜨거웠던 여름 마로니에공원에서 먹었던 점심을 생각했다.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을 뛰쳐나온 장애인 여덟 명이 마로니에공원에서 탈시설권리를 요구하는 싸움을 시작했을 때였다. 농성 장소가 마로니에공원이었던 이유는 그 옆에 노들장애인야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들야학은 이 농성에 물적·인적 자원을 지원하는 후방부대이자 상황실 역할을 해야 했다. 그리하여 야학 상근자였던 나는 이 농성에 실무팀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사실 나는 염불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있었다. 농성 책임자인 소연과 정하를 흠모했기 때문이다. 훌륭한 인품과 성실함으로 정평이 나 있던 언니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있는 드림팀이라니, 고생스러워도 언니들과 친해질 기회라고 여겼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다. 그 여름은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가장 빡세게 오로지 일만 했던 60일이었다.
농성단은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 매일같이 집회와 기습시위 같은 것을 기획했다. 소연은 거짓말을 전혀 보태지 않고 하루 종일 전화를 붙들고 살았다. 집회 있으니 사람들을 조직해달라고 수십 개의 단체에 연락을 돌리고 기자들에게 탈시설이 왜 중요한지 끝없이 설명했다. 말하는 게 지치면 대충 줄이거나 뭉갤 법도 한데 그는 무한히 재생되는 녹음기처럼 정확하게 그 일을 반복했다. 물론 그는 기계가 아니었으므로 시간이 갈수록 얼굴이 허옇게 뜨고 눈은 벌겋게 충혈되고 목소리는 쉬어갔다. 그럼에도 놀라울 만큼 상냥했다. 사람들이 그런 소연의 모습에 감동을 받으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소연은 잽싸게 하나도 둘도 아닌 세 가지 이상의 일을 떠안기는 신묘한 재주가 있었다. 훌륭한 언니들에게 예쁨 받고 싶었던 나는 최선을 다해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고 그러다 보면 어느덧 자정이었다. 농성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됐을 어느 날 밤,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소연에게 다가가, 언니가 시킨 일을 다 마쳤음을 알렸다. 소연이 호들갑스럽게 나를 칭찬하며 이렇게 말할 거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은전아~~~ 너~~무 수고했어! 이제 뒤풀이하러 가자!”
사람이 밤 12시까지 일을 했다면 응당 가야 할 곳은 술집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살아온 것이다. 야학에서 생활하면서 특별히 도전받은 적 없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소연은 이렇게 말했다.
“그럼 탈시설 100인 선언 자료집 편집 좀 해줄 수 있어? 내일이 기자회견인데…”
밤 12시에 듣기엔 정말 충격적이고 해괴망측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소연의 시간 감각에 심각한 오류가 생긴 게 분명했다. 나는 무서운 일진 언니에게 붙잡힌 소녀처럼 대답했다.
“언니… 저 집에 가야 돼요… 지금 12시라… 곧 막차거든요…”
나는 막차 따위에 미련을 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지만 술집에 갈 수 없다면 집에라도 가야 했다. 소연이 그제야 현실을 깨닫고 해맑게 미안해했다.
“12시구나! 그래그래! 얼른 집에 가~”
나는 좀 초라해진 기분으로 막차를 탔다. 멋있는 언니들이랑 뒤풀이를 할 거라는 헛된 기대를 품고 충성심을 불태웠던 밤 10시의 홍은전이 불쌍했다.
‘큰일 하는 언니들은 역시 지독하고 너무해…’
맑은 정신으로 얌전히 귀가하기엔 너무 일을 열심히 해버렸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주소록에서 그들의 이름을 찾아 ‘지독한 소연씨’와 ‘너무한 정하씨’로 수정했다. 저 언니들은 왜 남의 사무실에 진을 치고 앉아 퇴근을 안 하는가. 이 농성이 대체 뭐기에 저렇게까지 열심히 하는가.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건실하게 살아야 하는가 같은 걸 생각하며 쓸쓸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야학으로 출근하니, 두 언니는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야학에 살고 있었던 유령들처럼 어제의 그 자리에 앉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허옇게 뜬 얼굴, 붉게 충혈된 눈, 애처롭게 쉬어버린 목소리로도 상냥함을 잃지 않는 유령들이었다. 그 후로도 나는 농성 기간 동안 두 사람이 퇴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 사소하고 절대적인 사랑과 자유
어느 날 농성장에서 먹을 식단을 정할 때였다. 밥을 해주실 ‘이모님’을 따로 섭외해둔 참이었다. 나는 조리하기도 수월하고 중증장애인이 먹기에도 간편한 비빔밥을 제안했다. 그런데 소연이 시설에 사는 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밥과 국, 반찬을 한 그릇에 부어서 비비는 것이라며 비빔밥은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좀 납득하기 어려웠다.
‘비빔밥은 식당에서 파는 어엿한 정식 메뉴이고 여긴 시설도 아닌데다 우리는 시설 직원도 아니고 무엇보다 지금은 농성 중이지 않나. 아니, 그럼 농성 중에 매일 오첩반상이라도 차리잔 말인가?!!!!!’
소연은 밥과 국, 반찬을 따로 차리는 것이 이 싸움이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라도 되는 듯 몹시 진지하고 단호했다.
‘큰일 하는 분들이 뭐 이렇게 작은 일에까지 꼼꼼한가…’
나는 소연이 너무 원칙적이고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존중하는 태도에 적이 감동하였다. 시설에서 나온 8명의 중증장애인은 소연을 전폭적으로 신뢰했다. 소연이 만약 양해를 구했다면 그분들은 충분히 받아들일 것 같았다. 하지만 소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결국 마로니에 공원에선 점심시간마다 하얀 테이블이 펼쳐지고 그날 오전 솜씨 좋은 ‘이모님’이 만든 따뜻한 밥과 국, 반찬이 모두 따로따로인 삼첩반상이 차려졌다. 소연은 바쁜 와중에도 더 자주 식사 지원을 하거나 더 많은 비장애인을 활동지원인으로 조직해야 했고 나처럼 이 비효율에 의문을 품는 이들에게 시설의 삶이 무엇인지 더 길게 설명해야 했다.
13년이 흘러 나는 이제 안다. 어떤 인간들이 한때의 수고를 번거로워하며 효율을 따질 때 어떤 인간들은 평생 한 그릇에 정체불명으로 비벼진 밥만 먹게 된다는 사실, 비빔밥이 어엿한 메뉴가 되려면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권한이 있어야 한다는 것, 시설 직원이 하면 틀렸고 인권 활동가가 하면 괜찮은 그런 일은 없다는 것, 우리가 원하는 세계란 그저 장애인도 ‘밥 따로 국 따로 반찬 따로’인 소박한 삼첩반상을 매일 부지런히 차리는 일이라는 것.
그 농성은 한국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1cm쯤 들어 올린 대단한 싸움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그 투쟁에서 단 하나의 장면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매일 공원 한복판에서 차려지고 치워졌던 평범했던 점심식사라고 답할 것 같다. 그것은 시설에서 뛰쳐나온 장애인들에게 이 사회가 건네는 가장 첫 번째 말이자 가장 강력한 환대의 인사였던 것이다.
“당신들이 용기를 내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이 고생을 무릅쓰다니 정말로 존경스럽습니다.”
“우리도 최선을 다할 테니 함께 살아봅시다. 함께 싸워봅시다.”
마로니에 농성이 언니에게 무엇이었냐고 묻자 소연이 아련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자바. 나의 고양이 자바.”
농성이 끝나고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 영혼이 다 사라져버린 것 같았던 그날 소연은 축복처럼 자바를 만났다. 서울시가 탈시설 장애인을 위한 집을 제공하겠다고 발표한 날, 소연은 집이 필요한 새끼 고양이 자바를 집으로 데려왔다. 둘은 10년 동안 함께 살았다. 소연은 자바가 언제든지 외출할 수 있도록 한겨울에도 문을 열어두었다. 덕분에 자바는 생애 내내 자유롭게 살았다. 누구도 가두어선 안 된다는 신념에서 그는 동물을 배제하지 않았다.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는 나는 소연의 실천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안다. 함께 사는 존재의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선 기득권을 가진 존재가 포기해야 하는 것과 감당해야 하는 몫이 있다. 보안에 취약해진 집으로 누군가 침입할 수도 있고 바깥에서 고양이가 해코지나 사고를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소연에게 들은 이야기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면으로 이 길고 긴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싶다. 늦은 밤 소연의 집 근처 골목 어귀 담벼락 위에 고양이 자바가 앉아 있었다. 아침에 집을 나간 소연이 열렬하게 사랑하고 싸우며 사람의 일을 하는 동안 자바도 집 밖으로 나가 열심히 세상의 냄새를 맡고 자동차와 인간을 피하고 새와 쥐를 쫓고 자기만의 아지트에서 쉬며 고양이의 하루를 살았다. 그러다 늦은 밤이 되면 아직 돌아오지 않은 인간이 슬슬 걱정되는 것이다. 자바는 어슬렁어슬렁 사람이 다니지 않는 어두운 골목길로 소연을 마중하러 간다. 두 시간째 몸을 웅크린 채 소연을 기다리던 그는 저 멀리서 터덜터덜 걸어오는 소연을 보자 천천히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켠다. 자바를 보자 하루의 피로가 다 사라져버린 소연이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동네가 떠나갈 듯 인사한다.
“자바야, 나 보러 나온 거야? 너무 고마워~ 잘 있었어? 뭐하면서 보냈어? 언니는 오늘 아주 멋진 사람들을 많이 만났단다!”
소연이 쉰 목소리로 종알대며 집 쪽으로 걸으면 자바도 소연과 보조를 맞춰 담장 위를 사뿐사뿐 걸었다. 둘은 집으로 함께 돌아갔다. 이것은 보호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자유를 억압한 관계에선 절대 누릴 수 없는 사소하고도 절대적인 사랑과 기쁨에 관한 이야기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