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번째 세계장애인의날, 장애인 1200명 집결… “탈시설은 선택 아닌 권리”

장애인 1200명, T4철폐농성장에 집결 “한국 정부는 협약과 탈시설 가이드라인 이행하라” 장애인권리예산 보장 위한 지하철 투쟁 1년째 국민의힘만 외면… 주호영은 형식적 답변만 끝내 약속 안 한 국힘, 47차 지하철 투쟁 전개

2022-12-02     하민지 기자
30번째 세계장애인의 날을 앞둔 1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여의도에 있는 T4철폐 농성장에서 결의대회를 열었다. 대구에서 온 장애인 활동가들이 한파 속에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하고 지역사회 함께 살자!’고 적힌 분홍 몸피씨를 입고 있다. 사진 강혜민

오는 3일은 30번째 세계장애인의날이다. 세계장애인의날은 국제사회가 1992년에 공식 지정했다. 1982년 12월 3일, 제37회 유엔 총회에서 ‘장애인에 관한 세계 행동 계획’이 채택됐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정했다. 세계장애인의날은 전 세계가 장애인 인권 선언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국제사회가 인권 기념일로 지정한 날이지만, 유엔장애인권리협약(아래 협약)에 비준한 한국 정부는 협약 내용조차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 세계장애인의날부터 1년간 요구한 장애인권리예산도 보장될지 미지수다. 여당인 국민의힘에 가로막혀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활동가 1200여 명이 서울 도심에 집결했다. 전장연은 1일부터 1박 2일간 도심 곳곳에서 ‘세계장애인의날 전국집중결의대회’를 열고 △장애인권리예산 보장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아래 위원회) 탈시설 가이드라인 이행 촉구 △협약 이행 등을 요구하며 결의대회, 선전전, 지하철 투쟁을 전개했다.

1일 오후 4시에는 서울시 영등포구 ‘장애인권리예산·권리입법쟁취 한국판 T4 철폐 농성장’ 앞에서 장애인권리예산 보장과 협약 이행을 요구하는 결의대회를 열었다. 농성장 앞에 집결한 장애인 1200명은 “어떤 장애인거주시설도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모든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지원받으며 살도록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결의했다.

30번째 세계장애인의 날을 앞둔 1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여의도에 있는 T4철폐 농성장에서 결의대회를 열었다. 사진 강혜민

- 협약과 반대로 가는 한국 정부의 탈시설 정책… “규탄한다”

이날 결의대회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탈시설’이었다. 탈시설에는 필연적으로 다른 권리가 따라온다. 장애인이 탈시설 후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때,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할 수 있어야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에서의 다양한 권리가 촘촘하게 보장돼야, 탈시설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같은 평범한 삶을 비로소 시작할 수 있다.

윤종술 한국장애포럼 회장은 “장애인의 탈시설 권리를 보장하고 탈시설 장애인의 자립생활 권리를 보장하면 모든 장애인의 권리가 증진된다. 재가장애인, 부모가 돌봄을 떠안은 발달장애인 권리까지 모두 보장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윤종술 한국장애포럼 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유엔은 이 같은 탈시설 권리를 강력하게 권고한다. 한국 정부가 2008년 비준한 협약 19조에는 “모든 장애인은 다른 사람과 동등한 선택을 통하여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19조를 해석한 일반논평 5호는 협약 19조가 “협약의 완전한 이행에 가장 필수적인 항목”이라고 설명한다. 즉, 협약을 비준한 한국 정부는 탈시설 권리 보장을 제대로 이행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위원회로부터 낙제점을 받았다. 지난 9월, 위원회는 한국 정부의 협약 이행 상황을 심의해 발표했다. 심의 결과, 올해부터 시행 중인 탈시설로드맵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위원회는 △장애인단체와 협의하여 탈시설로드맵을 검토할 것 △협약에 준하도록 충분한 예산을 반영할 것 △삶의 계획에 대한 선택권, 자기결정권에 대한 이해, 지역사회 통합의 가치, 지역사회로부터의 분리에 반대하는 원칙을 포함할 것  등을 권고했다.

한국 정부는 위원회의 권고와 반대로 가고 있다. ‘탈시설’이란 용어 사용을 부정하며 ‘지역사회 자립지원’으로 표기한다. 또한 올해부터 시작된 탈시설로드맵 시범사업 인원수도 너무 적다. 보건복지부 ‘2022년 장애인 복지시설 일람표’에 따르면 지난해 12월을 기준으로 전국 1535개 시설에 장애인 2만 8565명이 갇혀 있다. 그러나 시범사업 인원수는 올해와 내년을 합쳐 400명뿐이다.

영하 10도의 추운 날씨에 담요를 온몸에 두른 장애인 활동가들이 결의대회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탈시설로드맵 전체 대상자 수도 매우 적다. 정부는 시범사업이 끝난 2025년부터 2041년까지 5400여 명을 개인별 주거로 탈시설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2만 8565명의 5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더불어 탈시설로드맵이 시설 폐지가 아니라 소규모화에 방향성을 두고 단기·공동생활가정(그룹홈)을 탈시설 대상에서 제외한 것도 큰 문제로 꼽힌다.

예산도 턱없이 부족하다. 윤석열 정부는 내년 탈시설로드맵 예산에 41억 원을 편성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가 장애인권리예산을 반영하며 220억 원으로 의결했지만 추경호 기획재정부 장관의 동의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통과라는 문턱을 넘을지는 알 수 없다. 반면 장애인거주시설에는 6000억 원이 넘는 막대한 예산안이 국회로 넘어갔다.

윤종술 회장은 “결국 20년 후에도 시설에 장애인이 존재한다. 최중증장애인은 시설에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설 자체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반드시 시설을 폐지하고 지역사회의 자립생활 정책을 완벽히 만들어야 한다. 정부는 위원회 권고를 수용해 탈시설로드맵을 검토하라”고 요구했다.

서미화 전남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국가인권위원회 비상임위원인 서미화 전남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는 “위원회는 탈시설 가이드라인을 통해, 탈시설은 선택이 아닌 권리이며 시설 자체가 국가폭력이라 선언했다. ‘좋은 시설’이라 하더라도 인간에게 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정해진 규칙과 틀에 갇혀 살게 하는 것 자체를 국가가 자행하는 폭력이라 정의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시설 소규모화가 목표인 탈시설로드맵에는 탈시설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비판했다.

서 대표는 “인권위에서 접하는 장애인 차별 사례 중 절반이 장애인거주시설, 정신병원 등 구금시설에서 일어나는 인권침해다. 시설은 사라져야 한다. 어떤 시설도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모든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지원받으며 살 수 있도록 끝까지 투쟁하자”고 강조했다.

진은선 장애여성공감 독립생활센터 숨 소장 또한 탈시설 가이드라인을 언급했다. 진 소장은 “가이드라인 내용은 명확하다. 시설수용을 폐지하고, 신규입소를 금지하고, 시설에 예산 투입하는 것을 막으라고 돼 있다. 시설수용이 장애인 보호조치로 고려돼선 절대 안 된다고 명시돼 있다”며 “장애인이 원한다면 언제라도 시설에서 나올 수 있나? 자유롭게 나와서 원하는 사람과 살아갈 수 있나? 한국에선 불가능하다. 한국 정부는 협약을 위반하고 있다”며 탈시설 가이드라인 이행을 촉구했다.

- 국민의힘만 외면하는 장애인권리예산

전장연은 지난해 세계장애인의날부터 출근길 지하철 투쟁을 46차례(1일 기준) 전개하며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을 요구했다. 윤석열 정부가 폐기한 장애인권리예산은 국회 각 상임위에서 소폭 증액된 상태다. 이 예산안이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의결되기 위해서는 추경호 장관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여당인 국민의힘과의 합의가 중요한 이유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연일 지하철 시위를 비난하며 장애인과의 면담을 외면해 왔다.

결국 전장연은 주호영 원내대표와의 면담을 성사하기 위한 직접행동에 돌입했다. 지난달 29일에는 조계사 대웅전을 점거해 면담을 요구했다. 이튿날인 30일, 드디어 면담이 이뤄졌지만 주 원내대표는 ‘노력하겠다’는 원론적 답변만 되풀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최용기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최용기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은 “1년간 지하철 투쟁을 하며 갖은 욕을 먹고 드디어 주 원내대표를 만났다. 하지만 주 원내대표는 약속하지 않고 ‘노력하겠다’는 형식적 답변만 했다. 장애인권리예산이 결국 추 장관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꽝’이 될까 봐 두렵다”며 “주 원내대표가 장애인권리예산을 통과시키겠다고 약속하면 내일(2일) 지하철 투쟁을 보류할 것이다. 국민의힘은 더는 ‘나 몰라라’하지 말고 장애인권리예산을 보장하라”고 촉구했다.

권달주 전장연 상임공동대표도 “장애인권리예산이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오늘(1일) 저녁까지 국민의힘 답변을 기다리겠다. 장애인권리예산이 12월 본회의에서 통과될 수 있도록 약속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국민의힘의 답변은 오지 않았고 전장연은 2일 오전 7시 30분, 47차 출근길 지하철 투쟁을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