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도 권리도 ‘무정차 통과’… 책임지지 않는 정부

오전 8시 50분께 열차 한 대 삼각지역 ‘무정차 통과’ 대통령실 문의로 서울시‧서울교통공사 예고한 지 이틀 만 전장연 출근길 선전전 지속… “장애인의 일상 무정차 말라”

2022-12-14     강혜민‧복건우 기자
서울교통공사 직원들이 지하철을 탑승하려는 전장연 활동가들을 막아서고 있다. 사진 아영 

14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가 서울 지하철 4호선 삼각지역에서 출근길 선전전을 벌이자, 해당 역사를 열차가 지나가지 않는 무정차 통과가 처음으로 시행됐다.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가 12일부터 출근길 시위로 운행이 지연될 경우 해당 역사를 지나가는 지하철을 무정차 통과시킨다고 예고한 지 이틀 만이다.

내년도 예산안이 처리되는 국회 본회의를 하루 앞둔 이날 오전 8시, 전장연은 숙대입구역 방향 승강장에서 내년도 장애인권리예산을 요구하는 ‘제248차 출근길 지하철 선전전’을 진행했다. 이들은 지난해 12월 3일부터 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하며 함께 살아갈 권리를 예산으로 보장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정부 예산안에는 전장연이 요구해 온 장애인권리예산이 한 푼도 보장되지 않았다. 국회 각 상임위원회가 장애인권리예산 일부를 의결해 예산결산특별위원회(아래 예결특위)로 넘겼으나, 예산안 법정 처리 기한인 12월 1일을 넘기면서 논의는 마무리되지 못했다. 이에 대해 이재민 전장연 활동가는 “양당 정책위의장과 국회 예결특위 간사가 참여하는 2+2 협의체 회동마저 어그러져 여야 합의가 불발된 상태”라며 “양당 협의가 되지 않으면 사실상 증액안은 통과되기 어렵다”고 내다봤다.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이 지하철에 탑승하려고 하자 서울교통공사 측이 휠체어 이용자 탑승을 위해 준비한 발판으로 막아서고 있다. 사진 전장연

이날 오전 8시 10분경, 전장연 활동가 20여 명은 1-1칸과 2-1칸에서 지하철 탑승 시위를 벌였다. 1-1칸에 선 활동가들은 평소와 같이 지하철 선전전에 사용하던 사다리를 든 채 지하철을 기다렸다. 그런데 서울교통공사와 경찰 측은 “지하철 역사 내 사다리 반입은 금지된다”며 지하철 탑승을 막아섰다. 결국 1-1칸에 선 활동가들은 지하철을 타지 못했고, 2-1칸에 있던 일부만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활동가들은 경찰‧서울교통공사 측과 한참의 실랑이 끝에 사다리를 삼각지역에 두겠다는 의사를 밝힌 뒤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 그러나 8시 50분께 들어오는 열차는 삼각지역 승강장에 정차하지 않고 그대로 역사를 빠져나갔다.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가 12일부터 검토 중이었던 ‘무정차 통과’ 조치가 이틀 만에 처음으로 시행된 것이다.

그사이 승강장에선 지하철 승차를 막아서는 서울교통공사 관계자와 장애인 활동가들 사이에 소요가 일어났다. 공사 측 남성 직원 두세 명은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의 전동휠체어 손잡이를 잡고서는 이 회장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뒤에서 끌어당겼다. 이 회장이 강하게 항의했지만 이들은 전동휠체어를 앞뒤로 잡고 흔들며, 휠체어 이용자들의 탑승을 돕기 위해 준비한 발판으로 장애인들의 이동을 가로막았다.

서울교통공사는 오전 8시 48분 트위터를 통해 “오늘 4호선 삼각지역에서 전장연이 운행방해 행위를 동반한 시위를 진행하여 지연이 발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시민 불편을 줄이고 안전을 확보하고자 삼각지역을 무정차 통과한다”고 알렸다. 그러면서 사전에 준비한 4호선 신용산~숙대입구역 구간 셔틀버스를 운행한다고 밝혔다. 공사는 9시 2분이 되자 트위터에 “8시 52분부터 다시 정상적으로 정차하고 있다”는 게시물을 올리며 열차 운행 재개를 알렸다.

서울교통공사 트위터 캡처 

무정차 통과와 사다리 반입 금지는 이날 처음 시행된 조치로, 그 배경에는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의 협의, 그리고 대통령실의 요청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전장연은 즉각 성명을 내고 “서울교통공사는 지하철 선전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다리를 반입했다는 이유로 일부 대오의 지하철 탑승을 막았고, 곧바로 무정차 통과를 강행했다”고 반발했다.

전장연은 “이러한 조치들은 장애인들이 1년 넘게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타고 시민들과 부딪치면서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과도한 기본권 침해”라고 비판했다.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는 기자와 통화하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갈라치고 혐오를 조장하는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 법과 원칙을 앞세우지만 정작 그 법과 원칙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윤석열 대통령은 무정차 통과를 자신들의 책임을 빠져나가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장연은 15일에도 내년도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을 요구하는 출근길 선전전을 진행할 예정이다. 전장연은 “장애인의 일상은 더는 무정차될 수 없다. 장애인의 기본적 권리가 보장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투쟁을 이어 나가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