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효정②] 피해와 고통을 마주하는 일의 어려움 / 김원영
[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 시설 밖을 상상하기
1990년대 말부터 장애인시설의 인권침해가 언론이나 장애인단체를 통해 폭로되고, 2005년부터 광범위한 실태조사도 이뤄지면서 장애인시설의 인권상황이 많이 알려졌죠. 하지만 화재 사고나 살인 등 심각한 실태가 드러난 시설들에 대해서도 이를 폐쇄하는 조치를 취하기는 어려웠어요. 기껏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정부에 별도로 신고되지 않은 시설들을 정부가 지원금을 주면서 일정한 조건을 갖춘 신고시설로 전환을 유도하고, 이 시설들을 정부가 관리·감독한다는 것이었죠. 정부는 2003년 미신고시설을 신고시설로 전환하는 지침을 마련했어요.
2010년 무렵이 되면서 주로 소규모시설들이 미신고 상태로 남았어요. 2005년과 2006년 무렵 시설조사를 하며 내가 본 학대와 유기, 폭력 같은 문제들이 작은 시설들에 그대로 있었어요. 단, 양상은 달랐어요. 사회복지법인이 운영하는 일정 규모 시설에서는 기본적인 생활조건은 제공하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선택권이 얼마나 제한되는지 이런 식의 문제가 보통 드러났어요. 반면 아직 신고시설로 전환하지 않은 이 작은 시설들은 거주하는 건물 자체가 전혀 안전하지 않았고, 기본적인 위생 상태조차 엉망이었어요. 수도시설이 설치되지 않아서 빗물을 받아서 사람들이 씻고, 장구벌레가 떠다니는 물을 그대로 마시고, 거주인들의 치아가 모두 빠져있는 곳들이 정말 많았어요. 화장실이 잘 돼 있다며 자랑스럽게 우리에게 보여주는데, 남녀 구별도 없고 칸막이도 없이 변기 몇 개만 나란히 놓여 있고 다른 한쪽에는 샤워기가 몇 개 붙어있었죠. 대형시설에서 집단생활을 하는 것이 반인권적이라면서 시설을 소규모로 운영하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이때 다시 한번 생각했죠. 사람이 몇 명 모여 사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같이 간 지방자치단체, 보건복지부 공무원도, 시설운영자도 한결같이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했어요. 이렇게 문제이니 이 시설을 더 지원해서 관리하고 개선해야 한다는 생각. 이마저 없어지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갈 곳이 없다는 생각뿐이었죠.
- 끔찍한 가족공동체
개인이 장애인 몇 명과 함께 살며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는 곳은 원래 실태조사를 하기가 어려웠어요. 그것들을 장애인시설로 볼 법적 근거가 불분명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던 중 2008년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장애인복지시설’의 개념이 확대됐어요. 별도로 행정기관에 시설로 신고하지 않은 곳이라도, 장애인 1인 이상이 일정 기간 생활하고 있는 곳이면 미신고‘시설’로 보게 된 거죠. 그런데 2012년에는 이런 소규모 공동체의 다른 유형이 나타나요. ‘원주 귀래 사랑의 집’(아래 사랑의 집) 사건이에요. 2012년 한 방송사가 제보를 받고 취재를 시작하면서 세상에 알려졌죠.
원주의료원에 10년이 넘게 장례도 치르지 않고 방치된 시신이 있었어요. 확인해보니 그 가족이 사랑의 집이라는 간판을 걸고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장아무개 목사라는 사람이었던 거죠. 충주의료원 영안실에도 12년째 방치된 그의 자녀가 있었어요. 방송사가 원주에 있는 사랑의 집을 찾아가자, 깊은 산 속 넓은 부지에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없도록 철망으로 담이 둘러있었어요. 그곳 주위를 오가는 장애인들은 모두 머리를 빡빡 깎은 모습에, 바짝 마른 상태였죠. 누가 봐도 학대가 의심되는 정황이었어요. 방송사가 2차 취재를 하며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아래 발바닥행동)과 원주지역 시민단체 등에 협조를 요청하면서, 활동가들이 이 사건에 결합하게 됐어요. 우리는 ‘원주귀래사랑의집 사건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아래 대책위)를 꾸렸죠. 발바닥행동에서는 내가 담당 간사를 맡아 이 사건에 대응했어요.
사랑의 집이 새로운 유형의 문제였던 건 바로 장목사라는 사람이 그곳에 거주하는 장애인들을 모두 친자로 입양했기 때문이에요. 법적으로는 시설이 아닌 가정집이었으니 안으로 쉽게 들어갈 수 없었죠. 2012년 6월, 사랑의 집 정문 앞에 활동가들, 원주시 공무원과 경찰, 장목사에게 수십 년 전 자식을 맡겼다는 가족들이 모였어요. 장목사는 문을 열지 않았고 원주시 공무원들과 경찰은 서로에게 책임만 떠넘길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결국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활동가들이 절단기로 철문을 따고 들어갔어요. 장목사가 우리를 주거침입죄로 신고했죠.
안으로 들어가니 원색의 옷을 입고 머리를 모두 깎은, 남녀를 구분할 수 없는 장애인 네 분이 앉아 계셨어요. 한 분 팔에는 장목사의 전화번호가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죠. 이 중 한 분은 실제 생물학적 성별은 여성인데 주민등록상 성별은 남성으로 되어있었고, 또 다른 분은 주민등록상 세 개의 이름으로 등록되어서 장목사가 3중 부정수급을 하고 있었어요. 장목사는 실제로 안수받은 정식 목사가 아니에요. 그는 ‘장애인을 목숨 바쳐 사랑해서’ 자신을 장목사라고 칭했어요. 그가 친자로 등록한 장애인은 21명이었어요. 현장에는 4명만 있었고 2명은 원주와 충주에 있는 병원 영안실에 사망신고도 없이 각각 10년, 12년간 방치되어 있었어요. 나머지 13명은 주민등록이 말소된 상태였고 어디서 뭘 하는지 확인할 수조차 없었죠. 나중에는 방송을 보고서 어린 시절 그곳에서 살다 탈출했다던 사람들도 나타났어요.
원주시도 이런 상황에 당황한 것 같았어요. 그들이 장애수당 등 수급비를 지급했는데 아무 확인도 하지 않았으니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겠죠. 하지만 여전히 이를 대단한 문제로 보거나 해결하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았어요. 피해자들을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할지가 다음 문제였는데 원주에는 이들을 지원할만한 기관이 없었거든요. 결국 다른 지역 장애인단체의 지원을 받아, 원주가 아닌 다른 지역에 피해자 쉼터를 어렵게 마련할 수 있었어요.
이미 돌아가신 분들의 장례도 문제였어요. 다행히 사랑의 집 앞에 찾아왔던 가족 중에 충주의료원에 안치되어있던 피해자의 가족이 계셔서 그분은 2012년 9월 장례를 치렀어요. 사망한 지 12년 만이었죠. 하지만 원주의료원에 계시던 다른 피해자분은 2년이 더 지나고서야 장례를 치를 수 있었어요. 법률상 가족이었던 장목사가 끝까지 시신 인도를 거부했거든요. 그러다가 장목사의 시신유기 행위가 법원에서 인정되면서 2014년 1월 장례를 치뤘죠.
장목사는 자신을 천사 같은 아버지로 홍보해서 많은 후원금을 받았어요. 이 사건처럼 장애인을 자녀로 입양해서 돌보는 사연은 이전에도 없지 않았고, 대표적인 사회 미담이었죠. 사회는 그곳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장애인에게 관심을 두기보다는 겉으로 나타난 ‘선행’에만 집중했고요. 특히 가족이라는 말 앞에서는 무턱대고 가치를 부여하는 풍토가 있었어요. 이 사건은 가족공동체라는 겉모습 뒤에 존재하던 시설문제를 폭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해요. 이런 사회적 분위기와 법적 가족이라는 조건에서도 우리가 이 사건에 대응할 수 있었던 건 그때까지 탈시설운동이 시설 문제를 이해하고 시설 개념을 점점 확대하면서 쌓아온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시설은 단지 운영 주체나 환경이 어떤지에 따라 정의되는 곳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고립된 채 통제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뜻하는 것이었죠.
- 탈시설 운동의 어려움
사랑의 집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의 쉼터로 내려간 언니의 나이는 40대로 확인됐지만 의사소견상 신체나이는 60대였어요. 언니의 현실과 국가에 등록된 공식자료는 일치하지 않았어요. 착잡한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언니가 새로운 거처에서 평안을 찾도록 안정된 환경을 만들자며 대책위가 함께 준비하던 도중, 언니의 건강검진 결과에서 직장암 4기가 확인됐어요. 새로운 삶이 아니라 장례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예요. 연명치료를 할지 말지 판단해야 하는 순간까지 오자, 무척 견디기 어려웠어요.
시설 조사나 인권침해 사건에 대응할 때 만난 사람들의 고통이 내게 너무 크게 다가온 거 같아요.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새로운 삶을 찾도록 이들을 지원하려 해도 제도적인 한계가 너무 많았어요. 삶이 더 나아지기보다는 그대로 멈춰 있는 경우가 많으니 내가 그냥 거기 가서 그들 삶을 구경하고 온 것 같았어요. 어떠한 변화를 바라지만 결국에는 다른 시설로 전원되는 경우도 많았고요.
광주 인화원 사건도 마찬가지였어요. 2011년 영화 ‘도가니’가 대중의 관심을 받으면서 광주 인화원 사건에 대한 대응이 본격화되었을 때,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 광주광역시가 피해자들을 임시로 다른 장애인거주시설로 옮겼어요. 그곳에 잠시 머물며 이분들이 앞으로 살고 싶은 새로운 거주환경을 찾으려 했죠. 갑작스럽게 환경이 변하는 것이니 전원을 앞둔 피해자들과 1박 2일간 함께 숙식하며 프로그램을 했어요. 정말 많은 활동가가 결합한 큰 프로젝트였어요.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고, 피해 상황을 천천히 묻고, 같이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시간을 보냈어요. 광주시에 있는 그룹홈 등 다른 거주지를 보여드리기도 했죠. 그러자 어떤 분께서는 앞으로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의 방식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시기도 했어요.
하지만 결국에는, 임시로 머물기 위해 잠시 전원했던 그 장애인거주시설에 그대로 남은 사례가 대부분이었어요. 그곳에서 또 인권침해가 발생해서 그 시설을 조사하러 다시 광주에 내려가는 일도 있었어요. 영화를 계기로 관심이 모였을 때 인권위와 지자체까지 같이 힘을 모았지만 사람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했던 거죠. 탈시설운동은 어렵고 그래서 자주 실패해요. 긴 시간 버티면서 이 길을 갈 수 있어야 해요. 하지만 나는 버티지 못했어요. 사건을 대응하면서 무력감을 많이 느낀 거 같아요.
2011~2012년 무렵에는 발바닥행동 내에서 갈등도 있었어요. 연차가 많은 선배 활동가들과 상대적으로 경험이 적은 활동가들 사이에 정보 비대칭이 있다고 느꼈어요. 발바닥행동은 분명 민주적이고 평등한 문화를 지향하는 조직이었어요. 그걸 위해 모두가 노력했죠. 그럼에도 중요한 사건에 급하게 개입하고 정세를 판단해야 할 때는 속도가 중요했고, 그때마다 상대적으로 젊은 활동가들이 소외된다고 느꼈어요. 이에 대해 조직 내에 문제제기를 하고, 어떤 사업은 소극적으로 보이콧하기도 했어요. 돌이켜 보면 조직의 문제라기보다는 활동가 조직의 빠른 속도가 나와 맞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내외적인 갈등 안에서 더 이상 활동을 이어갈 힘이 없었어요. 갈등과 긴장을 멈추고 무언가를 새로 채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름답지 않게 첫 활동을 정리했어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