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강장일기] 11,563,200번 유예된 장애인 권리

2023년 1월 12일 261일 차 혜화역 지하철 선전전

2023-01-12     하민지 기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활동가들은 2021년 12월 6일부터 혜화역 승강장 5-4(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방면)에서 장애인권리예산·입법 쟁취를 위한 선전전을 하고 있습니다. 전장연은 지난해 47차례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진행하고, 141일 동안(3월 30일~12월 1일) 177명의 장애인·비장애인 활동가들이 삭발 투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올해 장애인권리예산은 정부 예산안에 반영된 자연증가분을 제외하면, 국회에서는 고작 1.1%만 증액됐습니다. 기획재정부가 예산 증액에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전장연은 올해 1월 2일, 48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하려고 했으나 서울교통공사·서울시의 ‘무정차’ 대응으로 지하철에 탑승하지 못했습니다. 장애인 권리를 무정차하는 정부를 규탄하며 전장연은 매일 아침 8시, 혜화역 승강장에서 시민들에게 권리예산과 입법을 알리는 선전전을 합니다. 비마이너는 꾸준한 매일의 투쟁을 꾸준하게 기록하고자 합니다. 같으면서도 다른 어제와 오늘을 사진과 글로 전합니다. 

1월 12일 261일 차 혜화역 지하철 선전전 모습.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선전전에 참석한 시민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승강장 벽에는 “T4”라고 적힌 스티커가 빼곡히 붙어 있다. 사진 하민지

아침 8시 12분,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가 서울중앙지방법원의 2차 결정문을 비판한다. 앞서 서울교통공사(아래 공사)는 전장연에 지하철 시위로 인한 손해배상금 3천만 1백 원을 청구한 바 있다. 서울지법은 1차 결정문에서 “열차운행을 5분을 초과하여 지연시키는 방법의 시위를 하지 아니한다”고 명시했지만, 2차 결정문에선 “5분”을 삭제하고 “출입문 개폐를 방해하는 방식으로 열차운행을 지연시키는 방법의 시위를 하지 아니한다”고 변경했다.

박경석이 말한다. “굉장히 유감입니다. 1차 결정문도 매우 불평등했지만 수용하기로 했거든요. 2차 결정문에선 우리 사회가 장애인에게 5분조차도 내어주지 않고 있단 게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법원은 장애인 권리를 무시했고, 우리는 절망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심각하게 고민하겠습니다. 전장연 회원 모두에게 2차 결정문 수용 여부를 묻고 결정할 것입니다.”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가 휴대전화를 보고 있다. 뒤에 승객으로 꽉 찬 열차가 서 있다. 문은 열려 있다.

8시 13분, 이날 선전전에는 25명 정도가 참석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서울지역지부(아래 의료연대) 조합원들이 속닥속닥 대화를 나눈다. 아침 일찍 나와 선전전을 준비한 전장연 활동가들은 하품도 하고 기지개도 켠다. 머리를 못 말리고 나왔는지 촉촉이 젖어 있다. 공사 직원과 경찰은 50명 정도 배치됐다. 이들도 담소를 나눈다. 한 공사 직원은 안전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머리를 만진다. 명찰을 착용한 직원이 보이지 않는다.

조아라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8시 21분, 조아라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가 쑥스러워하며 마이크를 잡는다. 조아라가 말한다. “어제(11일) 아침엔 알람을 못 맞춰서 (선전전에) 못 왔어요. 경기도 파주시와 남양주시에서도 오신 분이 계신단 말을 듣고 오늘은 일찍 일어나서 왔습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하철이 1분만 늦어도 큰일 난다고 합니다. 장애인운동 22년간 1분은 11,563,200번 있었습니다. 오 시장의 계산법에 따르면 장애인 권리는 천만 번 넘게 유예된 것입니다.”

최상덕 의료연대 지부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8시 25분, 최상덕 의료연대 지부장이 말한다. “이제야 선전전에 참석하게 돼 죄송합니다. 이동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최소한의 기본권입니다. 이동권을 보장해야 가장 기본적인 삶의 수준이 보장됩니다. 노동자도 연대하고 지지하겠습니다. 적지만 후원금을 준비했습니다.” 최상덕이 박경석에게 후원금을 전달한다.

박경석이 말한다. “우리(전장연)도 힘든데, 민주노총도 요새 만만치 않던데요. 사람들이 ‘민폐노총’이라 부르더라고요. 우리는 ‘민폐시위 장애인’이라 부릅니다.” 의료연대 조합원들이 깔깔깔 웃는다. 박경석이 이어서 말한다. “우리 같이 ‘민폐동문’을 만듭시다. 동문끼리 민주주의를 다시 세워 봅시다.” 박경석의 말에 모두가 웃는다.

박미주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가 선전전을 생중계하고 있다. 민아영 영상활동가는 박 활동가 옆에 앉아 발언자를 촬영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8시 28분, 열차가 쉴 새 없이 다녀간다. 비장애인 승객들은 선전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바쁘게 뛰어간다. 전장연 활동가 성가연과 박철균은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하기 위해 열차만큼 바쁘게 움직인다. 민아영 영상활동가는 정승처럼 서거나 바위처럼 앉아서 발언자를 촬영한다. 선전전 생중계를 하던 박미주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는 추운지 외투를 껴입는다.

8시 31분, 최정희 장애인자립생활센터판 활동가가 말한다. “작년에도 똑같이 여기서 선전전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최정희의 휴대전화에서 알람이 울린다. 최정희가 알람을 끄고 발언을 이어간다. “경찰과 공사는 우리의 투쟁을 폭력적으로 진압했습니다. 화가 나서 위경련이 왔습니다. 지하철 투쟁이 즐겁지만은 않지만 질긴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박경석이 최정희의 발언에 동의를 표하며, 경찰과 공사의 폭력진압 때문에 자신의 휠체어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설명한다. 박경석이 말한다. “폭력진압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넣을 것입니다. 여기 계신 공사 직원 여러분, 듣고 계시지요?” 공사 직원 중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강혜민 비마이너 편집장이 『유언을 만난 세계』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8시 35분, 강혜민 비마이너 편집장이 『유언을 만난 세계』의 서문을 낭독한다. “세계는, 역사는 더 이상 이대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 산 자들은 열사 앞에서 멈춤과 동시에, 이 야만의 시대 자체를 멈출 것을 재촉받는다.” 강혜민의 목소리가 커진다. “날 죽인 것은 저들이다! 날 닮은 당신들을 죽이는 것은 저들이다! (중략) 애도가 나와 함께 이 시대를 멈출 것을 결의하는 것이라면, 날 애도하라!” 공사 직원은 녹색봉을 흔들며 열차 출발 신호를 보낸다.

낭독을 마친 강혜민이 말한다. “장애인을 억압하는 폭력의 구조는 아무도 멈추라고 하지 않으면서 지하철 투쟁만 멈추라고 합니다. 장애인은 계속 차별받고 살라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싸움을 멈출 수 없습니다. 같은 이유로 싸우다 죽은 열사들과 현장을 채워가고 싶었는데, 『유언을 만난 세계』가 현장에서 읽혀서 영광스럽습니다.”

지하철 안전문에 비친 활동가들의 모습. 사진 하민지

8시 48분, 박경석이 지하철 투쟁 계획을 설명한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사과가 없으면 우리는 1월 20일 오전 8시에 오이도역에서 지하철을 탈 것입니다. 오실 분 계신가요?” 모두가 손을 든다. 공사 직원들이 휴대전화를 꺼내 어디론가 다급하게 메시지를 보낸다.

박경석이 방긋 웃으며 말한다. “함께해 줘서 감사해요. 8시에 오이도역에서 지하철을 타고요, 9시까지 서울역으로 가서 최종적으로는 삼각지역까지 갈 것입니다. 장애인이 지하철 타는 게 뭐 나쁜 겁니까? 우리가 비장애인만큼 빨리 탈 수 없어서 그렇지, 나쁘지 않아요.”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이 “투쟁”을 외치고 있다. 이 회장 뒤로 열차가 서 있다. 사진 하민지

8시 54분,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이 마지막으로 발언한다. “윤석열 정부가 우리의 권리를 예산으로 보장할 수 있도록 끝까지 함께 투쟁합시다.” 선전전이 끝나자 활동가들은 서로 인사를 나눈다. “건강하시죠?”, “이른 아침에 파주시에서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천천히 쉬시다가 회의하러 오세요.”,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