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②] 덕성원에서 자란 종환이의 꿈, 누가 돌려줍니까
증언, 역사가 되어버린 사람들 ② 형제원서 덕성원으로 팔려 12년 수용된 안종환 씨 덕성원 원장에게 3억 원 뺏기고 국가 신뢰 무너졌다 그의 바람은 시설 폐쇄와 피해생존자 보금자리 마련
삶 자체가 시설 수용의 역사인 사람들이 있다. 언론에 잘 알려진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 외에도 시설에 끌려간 이들의 삶에는 지금도 국가폭력의 그림자가 깊숙이 배어 있다.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1945년부터 권위주의 통치 시기까지 불법적으로 이뤄진 집단 수용시설 인권침해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 비마이너는 시설이라는 굴레에 지독하게 내몰렸던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을 연재한다. 두 번째 순서는 덕성원에서 12년을 살다 나와 부산에 피해생존자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꿈인 안종환(47) 씨 이야기다.
“우리가 국가를 못 믿는 건 당연합니다. 한평생 당하기만 했어요. 형제원은 사람 팔아먹고, 덕성원은 노예처럼 부려 먹고 돈 떼먹고. 어느 시설이든 구속하고 억압하는 건 똑같아요.
갓난아기 때 엄마 품에 안겨 형제원에 입소했습니다. 얼마 안 돼 덕성원이라는 아동 수용시설로 옮겨졌는데, 형제원에서 덕성원으로 끌려간 사람들 억수로 많습니다. 일고여덟 살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거기서 12년을 살았습니다. 하루 일과표도 다 기억해요. 학교 다녀오면 일하고, 방학에는 낮에 밭일하고 밤에 건물 짓고. 매일같이 일하는 삶이 당연한 줄 알았어요.
그러다 보니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왜 공부하고 싶어도 맨날 일해야 할까. 점심시간이면 다들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는데 나는 왜 굶어야 할까. 나는 왜 쟤네하고 다르게 고아원에서 살고 있을까. 그러다 종선이가 세상에 알려지고 나서 완벽하게 깨달았지. 아, 우리가 국가폭력의 희생양이었구나.”
형제복지원 사건은 2012년 피해생존자 한종선 씨의 국회 앞 1인 시위로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다. 그곳을 거쳐 간 입소자는 최대 3만 8,000명에 달하며, 대부분 강제 노동, 가혹 행위, 성폭력 등으로 심한 고통을 겪었다. 안종환 씨의 삶 밑바닥에는 47년간 누적된 불신이 있다. 시설에서 나와 열심히 살아보려 해도 그는 인생사 한 켠에 시퍼렇게 새겨져 있는 시설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1년간 모은 돈으로 전라도에서 생선 도소매업을 했습니다. 한 달에 500만 원씩 적금을 넣었어요. 나만의 공장을 짓고 싶었거든요. 그때 마침 엄마(덕성원 원장)가 찾아왔습니다. 덕성원이 곧 없어지는데 관련 소송 비용을 좀 대 달래요. 장가갈 때 다시 돌려준다면서. 나는 거기서 자라기도 했고, 지금도 감금돼 있는 원생들이 생각나서 3억 원을 빌려줬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요. 한 푼도 못 받고 얻어맞았습니다. 2000년이었나, 윗사람들한테 하도 맞아서 왼팔이 완전히 부러졌어요. (두 팔을 걷어 보이며) 몸에 덕지덕지 붙은 흉터도 이렇게 많아요. 사회에서는 아무도 내 편을 안 들어준다는 점을 노린 거지. 12년 동안 갇혀 산 것도 억울한데 그때 종환이의 꿈이 모조리 박살 났어요.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계속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약을 먹어야 하는 건가 싶다가도 일 끝나면 그냥 술 마시고 자는 게 중독이 됐는지. 어린 시절 당한 억압 때문인지. 지금 내 상태가 정상인지 아닌지도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덕성원과 질긴 악연을 뒤로 하고 소주 한 잔을 들이켜는 안 씨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그는 공권력에 당한 게 너무 많다고, 법무부든 경찰청이든 관련 기록을 모두 뒤져서 진실화해위에 제출할 거라고 답했다. 그의 결연한 다짐과 함께 국가를 향한 분노와 억울함, 그리고 살기 위한 간절함이 다시 한번 실려 왔다.
“먼저 끌려간 형님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만, 나도 벌써 47살이거든요. 인생의 3분의 2를 시설에서 보냈어요. 배보상도 해주고, 사과도 하고, 트라우마도 치유해주고, 잃어버린 가족도 되찾아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국가가 앞장서서 시설을 폐쇄해야 합니다. 다른 곳으로 위임하거나 이관하면 또 사각지대가 생겨요. 애들 붙잡아간 것도 모자라 인생을 송두리째 망치는 시설 자체가 문제입니다.
대신 우리만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목소리 내기 어려운 동지들의 아픔을 보듬는 공동체가 있으면 좋겠어요. 나라에서 지원해주는 건 싫어요. 우리끼리 돈 모아 부산에 힐링센터를 세울 겁니다. 다들 어렸을 때 겪은 아픔 때문에 사회에 나와도 눈치 보고 열등감에 휩싸이고. 우리는 피해생존자 동지들의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 마음을 모아 끝까지 함께 싸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