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강장일기] 캄캄한 세상을 뚫고, 다시 만난 세계

2023년 1월 19일 266일 차 혜화역 지하철 선전전

2023-01-19     강혜민 기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활동가들은 2021년 12월 6일부터 혜화역 승강장 5-4(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방면)에서 장애인권리예산·입법 쟁취를 위한 선전전을 하고 있습니다. 전장연은 지난해 47차례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진행하고, 141일 동안(3월 30일~12월 1일) 177명의 장애인·비장애인 활동가들이 삭발 투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올해 장애인권리예산은 정부 예산안에 반영된 자연증가분을 제외하면, 국회에서는 고작 1.1%만 증액됐습니다. 기획재정부가 예산 증액에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전장연은 올해 1월 2일, 48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하려고 했으나 서울교통공사·서울시의 ‘무정차’ 대응으로 지하철에 탑승하지 못했습니다. 장애인 권리를 무정차하는 정부를 규탄하며 전장연은 매일 아침 8시, 혜화역 승강장에서 시민들에게 권리예산과 입법을 알리는 선전전을 합니다. 비마이너는 꾸준한 매일의 투쟁을 꾸준하게 기록하고자 합니다. 같으면서도 다른 어제와 오늘을 사진과 글로 전합니다.

혜화역 벽면. 여기저기 스티커가 뜯긴 흔적이 있다. 그 위에 누군가 A4 종이에 직접 쓴 글씨로 “감옥 같은 시설을 폐지하라!”고 적었다. 사진 강혜민

8시 6분, 혜화역 5-4 승강장 앞. 아직 선전전은 시작하지 않았다.

8시 7분, 박경석 전장연 대표가 하얀 긴 머리를 휘날리며 도착한다. 이번 주 첫 선전전 참석이다. 그간 몸이 아파서 그는 3일간 외출하지 못했다. 모처럼의 ‘장기휴식’에 그의 얼굴은 뽀야면서도 어쩐지 수척해 보인다. 그가 김필순 전장연 활동가에게 “앰프 안 왔어요?”라고 묻는다. 현장 정리를 하고 있던 김필순이 “지금 오고 있어요”라고 답한다. ‘의료연대본부’라고 적힌 파란 조끼를 입은 사람들을 보고선 박경석이 “안녕하세요. 의료본부에서 오셨네요?”라고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8시 8분, 박경석이 사람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말한다. “지금 앰프가 오고 있어서 늦어졌어요. 쌩소리로 해도 되죠?”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네!!”라고 답한다. 박경석 나름은 큰 목소리로 말하지만 실제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다.

박경석이 사람들에게 묻는다. “오늘이 이백육십… 며칠째죠?” ‘퀴즈’가 아니라 정말 몰라서 하는 질문인 게 티 난다. 앞에 있던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대표를 비롯한 전장연 활동가들이 “266일째!”라고 외친다.

“아, 고마워요. 저희는 2021년 12월 6일부터 매일 매일 주말과 공휴일 빼고, 266일째 외쳐왔습니다.”

박경석이 말을 하기 시작하니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분주해진다. 카메라에 ‘뉴스1’ 스티커가 붙은 사진기자와 스튜디오R에서 온 기자가 보인다.

“오늘 오세훈 시장은 오후 4시에 다른 장애인단체들과 함께 면담하자면서 약속을 잡았는데요, 저희는 ‘단독면담’해야 한다고, 오늘까지 서울시의 답변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오세훈 시장은 마치 자신이 이 문제를 다 풀 수 있는 것인 양 이야기하는데, 저희가 요구하고 있는 내용(장애인권리예산)은 서울시가 책임지고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윤석열 정부, 특히 기획재정부가 책임 있게 나서야 합니다.”

박경석 전장연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하얀 긴 머리가 풀어 헤쳐져 있다. 사진 강혜민

8시 12분, 앰프가 온다. 박경석이 슬몃 웃으며 농담을 건넨다. “저도 지각인데 이것(앰프)도 지각이네.” 박경석은 앰프가 든 수레에서 옅은 갈색 토끼 인형을 꺼내 품에 안고, 활동가들은 피켓을 꺼내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피켓에는 추경호 기재부 장관의 사진이 박혀 있다.

토끼 인형을 안은 박경석은 마이크 소리가 잘 나오는지 확인한다. “아아- 이제 목이 살 것 같네. 제가 오늘 늦잠 자고 일어나 머리를 감았는데, 젖은 상태에서 묶으면 이가 생긴다고 해서 풀었어요. (머리카락을 살짝 찰랑인다) 지금 말리는 상태에요. 양해해주세요.” 자기 바로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 더 장난스럽게 속삭인다. “양해해주세요.” 사람들이 웃는다.

김필순은 전장연 업무폰으로 바닥에 쭈그려 앉아 페이스북 라이브 생중계를 한다. 짧은 머리에 갈색 파마를 한 성가연 전장연 활동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다. 유금문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활동가는 T4 선전물을 참석한 시민들에게 나눠준다.

8시 18분, 박경석이 말한다. “언론 보니깐 오세훈 시장이 불법단체(전장연)와는 단독으로 못 만난다고 했더라고요. 그러면 지난번 SNS에는 ‘전장연과 못 만날 이유가 없다’고 왜 올렸습니까?”

8시 21분, 이향춘 민주노총 의료연대본부장이 “기재부의 몽니”를 규탄하며 함께 투쟁하겠다고 약속한다.

8시 25분, 박경석이 말한다. “민주노총 난리 났던데(전날 국가정보원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민주노총 등을 압수 수색한 사건) 암울한 상황에서도 연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자기 세상이 캄캄해진 것 같지 않나요? 이 어둠을 뚫고 온 밴드가 있습니다. (캄캄밴드를 바라보며) 캄캄밴드!”

연주하는 캄캄밴드. 사진 강혜민

아주 잠시 묵직한 분위기에 젖어 들 뻔한 사람들이 박경석의 센스있는 소개에 일제히 폭소한다. 캄캄밴드가 트럼펫으로 뿌뿌 소리를 내며 응답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캄캄밴드로 모인다. 이들은 트럼본, 트럼펫, 유포늄, 플룻, 클라리넷, 색소폰으로 연주를 하는 밴드다.

8시 26분, 캄캄밴드가 첫 곡으로 ‘동지가’를 연주한다. 노래를 아는 몇몇이 따라 부른다. 노랫소리 위로 지하철 안내방송이 겹친다. 두 번째 노래는 ‘다시 만난 세계’다. 사람들이 손에 든 T4 선전물을 흔들며 열심히 따라 부른다. 지하철 문이 열린다. 지하철에 탄 시민들이 익숙한 노랫소리에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어 고개를 들고 승강장을 바라본다. 클라이막스로 갈수록 사람들의 합창은 선명해진다.

변치 않을 사랑으로 지켜줘 상처 입은 내 맘까지

시선 속에서 말은 필요 없어 멈춰져 버린 이 시간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노래에 시선을 빼앗긴 것은 서울교통공사 직원들 또한 마찬가지다. 여성 보안관은 곁눈질로 힐끗힐끗 캄캄밴드를 본다. 노래는 잠시 노란선(전장연 선전전 구역을 정해놓은 선)을 넘어 사람들의 시선을 가져온다.

8시 33분, 노래가 끝나자 사람들이 크게 환호를 보내며 “앵콜, 앵콜”을 연신 외친다. 캄캄밴드는 앵콜곡으로 ‘흔들리지 않게’를 연주한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떠한 정동이 승강장 안에 들어찬다. 몇몇 눈에 눈물이 어린다. 노래가 끝나고 외치는 “투쟁”이 어느 때보다 힘차다.

노란 선 안에 있는 사람들과 연주하는 캄캄밴드. 사진 강혜민
시민 석류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8시 41분, 시민 석류가 말한다.

“저희 할머니는 15년 전에 척추관협착증과 치매를 진단받았고, 그로부터 2년 뒤인 2012년부터 저희 부모님과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제 어머니는 그날부터 지금까지 할머니 곁을 지키며 단 하루도 제대로 쉬어보질 못했습니다. 왜 누군가가 지역에서 살아가기 위해, 가족 중 한 사람이 자기 삶을 포기해야만 하는 걸까요?

할머니는 이제 곧 요양시설에 들어갑니다. 부모님을 제외한 모든 가족이 오래전부터 할머니를 시설로 보내자고 했지만, 어머니는 13년간 할머니 곁을 지키는 길을 택했습니다.

사랑하는 할머니, 저는 오늘 제 방식대로 (침묵) 하… (숨을 고른다) 할머니와의 이별을 준비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할머니가 시설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지만,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런데 할머니가 행복하지 않은 세상에서 저희 어머니가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사랑하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행복하지 않은 세상에서 제가 행복할 수 있을까요? 물론 행복할 때도 있겠지만, 제 가슴엔 항상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을 거예요.

그것이 제 할머니가 아니라고 해도, 저는 저 아닌 누군가가 시설에 갇혀 살아가는 세상에서 도저히 행복하게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저의 삶과 장애인의 삶이 연결되어있다고 믿게 되었어요. 제 가슴에 뚫린 구멍을 메울 수 있는 건 우리 사회뿐입니다.”

발언하는 석류와 선전전에 참석한 사람들 사이로 사람들이 지나간다. 사진 강혜민

그의 발언은 8분간 이어진다. 말하는 중간 목이 메고 손이 작게 떨린다. 현장의 공기가 그에게 집중된다. 숨을 고르고 울음을 삼키며 말과 말 사이에 깊게 패인 침묵 안에서 사람들은 더욱 그에게 집중한다. “저는 저의 삶과 장애인의 삶이 연결되어있다고 믿게 되었어요”라는 문장에 이를 때면, 그의 이야기를 잘 듣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이느라 움직이는 것조차 잊은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이 마침내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8시 49분, 마이크를 다시 받아 든 박경석도 마찬가지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석류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짧은 침묵 끝에 박경석은 인사한다. “고마워요.”

8시 53분, 붉은 머리의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활동가가 나타나 사람들과 인사한다. 그는 이날 선전전이 끝나고 진행되는 기자회견 사회를 맡았다. 시민사회 각계각층이 전장연의 지하철행동을 지지하는 기자회견이다.

8시 55분, 노동당에서 활동하는 사루 활동가가 말한다. 그는 성소수자로서 차별받아온 삶에 관해 이야기하며 연대를 전한다.

8시 57분, 전장연 페이스북 라이브 중계에 5명이 접속해있다. 욕설 댓글이 계속해서 올라온다.

9시 5분, 선전전이 마무리되고 자연스럽게 활동가들이 다음 순서인 기자회견 현수막을 펼친다. 다시 기자회견이 시작된다.

현장을 생중계하고 있는 전장연 페이스북 화면. 노동당에서 활동하는 사루 활동가와 박경석 대표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 강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