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일한 13년 투쟁, 흑백 영화 ‘재춘언니’

다큐 ‘재춘언니’, 감독 이수정, 2022 연대의 무채색으로 기록된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

2023-01-30     하민지 기자
농성장에서 기타를 치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 제일 왼쪽에서 카혼을 치는 사람이 임재춘. 사진 시네마달

- 지루한 농성장

농성장에 있으면 지루하다. 밖에서 보면 농성장의 매일이 뜨겁게 흘러가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특별히 할 일이 없다. 농성장을 지키는 것 외에는. 지나가는 시민에게 서명해 주시라 요청하기도 하고 연대단체에서 찾아와 문화제나 공연을 열기도 하지만 끝나고 나면 조용하고 외롭다. 별로 안 친한 사람과 긴 시간을 보낼 때도 있다. 그래서 농성하다 보면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한다. 독서를 하거나 기타를 튕겨 본다. 일기를 쓸 때도 있다.

시간 죽이는 것도 일이지만 불편한 것도 문제다. 길거리에 천막을 세우고 그 안을 지키는 일이 농성이니 편할 리 없다. 여름엔 더위와 싸우고 겨울엔 추위와 싸운다. 모기장을 파고드는 모기 때문에 잠을 설치고, 한파에 발전기 기름 떨어진 줄 모르고 자다가 속눈썹까지 얼어 눈이 안 떠질 때도 있다.

지루한 농성장을 무려 13년이나 지킨 사람이 있다. 국내 최장기 복직 투쟁을 한 사람들, 콜트·콜텍의 해고노동자들이다. 영화 ‘재춘언니’(2022, 감독 이수정)는 해고노동자 중 ‘언니’라 불리던 임재춘의 13년을 흑백 화면에 담았다.

임재춘이 법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시네마달

- 흑백으로 표현한 단일한 13년

컴퓨터그래픽으로 세상 온갖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지금, 감독이 일부러 흑백을 택했다면 그것에는 필히 이유가 있다.

흑백은 ‘무채색’이라 불린다. 무채색은 ‘색상과 채도가 없다’는 뜻이다. 색상과 채도가 있으면 유채색이라 부른다. 무채색의 세상에선 밝고 어두움의 정도인 명도만 있다. 이 같은 흑백은 보통 인간의 부정적 심리 상태를 상징한다. 많은 감독이 공포, 슬픔, 상실감, 박탈감, 공허함 등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흑백을 택한다.

제주 4·3 항쟁을 다룬 영화 ‘지슬’(2013, 감독 오멸)이 대표적이다. 색을 거둬간 덕분에 아름답기로 유명한 제주의 경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군인을 피해 숨어들어간 동굴의 어두움과 총칼이 기다리고 있는 눈밭의 밝음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관객은 어두움이 주는 갑갑함과 밝음이 주는 공포를 번갈아 느끼며 4·3 항쟁의 시공간으로 접속한다.

흑백의 또 다른 특징은 단일하다는 것이다. 다른 시공간이어도 명암의 차이가 아주 크지 않으면 비슷한 시공간인 것처럼 느껴진다. 감독이 대사나 자막을 통해 여기가 어디고 지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정보를 자세히 주지 않으면 다른 시공간 사이에는 연속성이 생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든, 공간이 몇 km가 떨어져 있든 연결된 것처럼 인식된다.

‘재춘언니’에 나오는 임재춘의 13년이 그렇다. 임재춘은 콜트·콜텍에서 가장 오래 기타를 만들어온 노동자다. 임재춘이 30년간 만든 기타는 세계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그렇게 유명한 브랜드인데 사측은 2007년, 갑자기 ‘미래의 긴박한 경영상 문제’를 이유로 들며 국내 공장을 폐쇄하고 직원에게 정리해고를 통보했다. 통보받은 노동자는 복직투쟁을 시작했다.

영화는 감독이 카메라를 들기 시작한 2013년부터 2014년 대법원 앞 노숙농성, 2018년 오체투지, 2019년 단식투쟁과 사측과의 합의를 끌어낸 승리의 순간까지, 13년 중 7년의 시간을 순서대로 보여준다.

오필리어 역을 연기하기 위해 화관을 쓴 임재춘. 사진 시네마달

임재춘은 13년간 농성장을 지키며 안 해 본 게 없다. 농성일기에 “평소 낯을 가리고, 나서는 성격이 아니다”라고 썼지만 연극 ‘구일만 햄릿’(2013)에서는 여주인공 오필리어 역을 맡았다. 화관을 쓰고 원피스를 입은 임재춘이 등장하자마자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콜밴(콜트·콜텍 해고노동자가 만든 밴드)에서도 기타가 아닌 카혼을 치고, 한여름 농성장 옆 길거리에서 다들 등목을 해도 세수만 찔끔하고 들어가는 임재춘이었다. 집회에서 발언해도 우렁찬 “투쟁!”이 아니라 노트에 적어 온 “저는 공주 시골에서 태어나…”를 조근조근 읽어 내려가던 임재춘이었다. 농성장 옆 작은 흙더미에 토마토를 심어 농성장 밥상에 올리고, 고추장 담가 팔아서 투쟁기금을 마련하던 임재춘이었다. 사장실을 점거하고도 “이러시면 안 되쥬. 책임지셔야쥬”라고 하던 임재춘이었다. 평소 조용하고 눈에 안 띄는 일을 주로 하던 임재춘이 안 하던 차림을 하고 연극의 주인공을 맡다니. 그래서 다들 웃었을 것이다.

이처럼 7년을 시간순서대로 보여주지만 그 시간의 압도적 무게가 잘 체감되지 않는다. 매일이 조금씩 달랐겠지만 같아 보인다. 임재춘을 포함한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13년을 하루같이, 지루함과 절망을 견뎌가며 싸웠기 때문이다. 또한 감독이 흑백을 택해, 같고도 다른 매일을 연결해 단일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감독은 농성장 지키듯 7년간 부지런히 카메라를 들었다. 국내 최장기 복직 투쟁 농성장의 매일을 알고 그 안에 깊숙이 자리해 함께 싸웠다. 그렇기 때문에 흑백을 택할 수 있었으리라고 감히 짐작한다. 임재춘의 단일한 13년은 그렇게 연대의 무채색으로 세상에 기록됐다.

2019년 4월 22일, 사측과 합의하던 날. 이날은 임재춘이 단식투쟁을 한 지 42일째 되던 날이었다. 비쩍 마른 모습을 하고 있는 임재춘. 사진 시네마달

- 임재춘 없는 컬러의 세상

영화는 시종일관 흑백을 유지하다 마지막 5분만 컬러로 바뀐다. 임재춘은 사측과 합의가 끝나고 보식도 제대로 못한 채 고향인 충청도로 갔다. 일용직, 아파트 경비 등의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농성장 밖 노동자가 된 것이다. 감독은 공사장에서 일하는 임재춘을 유독 길게 보여주는데, 영화 전체에서 이 부분만 컬러다. 13년의 단일한 투쟁은 종료됐고, 해고노동자가 아니라 ‘일하는’ 노동자의 삶이 다시 시작됐다는 걸 유채색으로 은유했다.

임재춘은 지난해 12월 30일, 5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일하는’ 노동자의 삶을 시작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았다. 인생 60부터라는데 너무 일찍 떠나 애달프다. ‘재춘언니’를 보다가 임재춘 없는 컬러의 세상을 보니 괜히 눈이 시리다.

이 글은 ‘계간 고난함께 198호’에 게재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