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강장일기] 다만 내 옆에서 걸어라

2023년 2월 7일 277일 차 혜화역 선전전

2023-02-07     강혜민 기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활동가들은 2021년 12월 6일부터 혜화역 승강장 5-4(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방면)에서 장애인권리예산·입법 쟁취를 위한 선전전을 하고 있습니다. 전장연은 지난해 47차례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진행하고, 141일 동안(3월 30일~12월 1일) 177명의 장애인·비장애인 활동가들이 삭발 투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올해 장애인권리예산은 정부 예산안에 반영된 자연증가분을 제외하면, 국회에서는 고작 1.1%만 증액됐습니다. 기획재정부가 예산 증액에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전장연은 올해 1월 2일, 48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하려고 했으나 서울교통공사·서울시의 ‘무정차’ 대응으로 지하철에 탑승하지 못했습니다. 장애인 권리를 무정차하는 정부를 규탄하며 전장연은 매일 아침 8시, 혜화역 승강장에서 시민들에게 권리예산과 입법을 알리는 선전전을 합니다. 비마이너는 꾸준한 매일의 투쟁을 꾸준하게 기록하고자 합니다. 같으면서도 다른 어제와 오늘을 사진과 글로 전합니다.

7시 59분, 파주시민 정윤상이 스트레칭하며 몸을 풀고 있다. 얼마 전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 새로 들어온 김민재 활동가는 목에 피켓을 걸고 서 있고, 빨간 마스크를 한 임성재 활동가는 그냥 서 있다. 평소 늘 먼저 와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형숙, 이규식은 보이지 않는다.

8시 1분, 전동휠체어를 탄 배재현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개인대의원이 온다.

조은소리 전국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협회 활동가가 양손에 휴대전화 두 개를 들고 있다. 박명훈 다큐인 영상활동가는 카메라를 들고 촬영 중이다. 사진 강혜민

조은소리 전국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협회 활동가가 한 손으로는 전장연 페이스북 생중계를 하며 다른 한 손으로는 사진을 찍는다. 평소 전장연 생중계는 삼각대를 사용하는데 삼각대를 가지고 오지 않은 듯하다. 박명훈 다큐인 영상활동가는 정가운데에 서서 선전전을 준비하는 박경석을 촬영하고 있다.

8시 3분, 박경석이 ‘출석’을 부른 후, 사람들에게 “오세훈 파이팅”을 외쳐 보자고 제안한다. 그 전말은 이렇다.

서울시와 기획재정부가 ‘지하철 노인 무임승차’로 인한 손실 보전을 놓고 기싸움 중이다. 서울시는 무임승차에 대한 손실 보전은 중앙정부 몫이라고 주장하고, 기재부는 지방공기업이 관리하는 도시철도는 지자체가 부담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해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서도 지자체 도시철도 무임수송 손실 보전을 위한 예산지원을 합의했지만 기재부의 반대로 결국 좌초됐다고 한다.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가 발언 중이다. 그의 뒤로 열차가 지나가고 있다. 사진 강혜민

박경석이 말한다. “국가가 이동의 문제를 책임져야 하는데 지자체에 떠넘겨 불평등이 발생하고 있어요. 서울시가 기재부에 예산을 요구한 것에 대해 환영하며 다 같이 ‘오세훈 파이팅’을 외쳐보고 싶은데 어떠세요? 오세훈 시장이 우리가 이야기하는 장애인권리예산에 대해서도 기재부에 이렇게 꼭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서울교통공사의 적자분에 관해선 이야기하면서 권리예산에 대해선 왜 찍소리도 못합니까?”

이어 박경석은 지난 2일, 오세훈 서울시장과의 면담에서 김상한 서울시 복지정책실장이 유엔장애인권리협약(아래 협약)을 왜곡한 것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그날 김상한 복지정책실장은 “협약 일반논평 5호의 전체 맥락을 보면, 시설에 거주하든 지역사회에 거주하든 자립생활 여건이 보장되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자립생활은 거주시설 밖에서 사는 것을 가리킨다’고 명시한 일반논평 5호를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탈시설 총괄하는 자가 협약을 왜곡하고 의도적으로 잘못 이야기하는 것은 혹세무민(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미혹하게 하여 속임)입니다. 복지실장 경질시켜야 해요. 이를 요구하기 위해 10일 금요일에 서울시청 찾아갑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혹세무민하는 복지실장한테 속지 마세요. 탈시설 두고 장애인단체들끼리 이간질하지 말고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 위원 불러서 유엔에서 권고한 탈시설 가이드라인을 제대로 이행하세요. 공부할 시간 드릴게요.”

8시 13분,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대병원분회 조직부장 유지원, 박나래가 지지 발언을 한다. 조은소리는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페이스북 중계를 한다. 성가연 전장연 활동가는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게 현장을 오간다. 8시 19분, 서울대병원분회 조합원 두 사람이 더 온다.

배재현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개인대의원이 아이패드에 띄워져 있는 탈시설 가이드라인을 읽고 있다. 사진 강혜민
아이패드에 탈시설 가이드라인이 띄워져 있다. 사진 강혜민

8시 25분, 배재현이 나와서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가 발표한 탈시설 가이드라인을 낭독한다. 위원회는 지난해 9월, 탈시설 라이드라인을 공개했다. 이 가이드라인은 일반논평 5호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당사국은 장애인의 자립생활 권리를 실현하고 탈시설 과정을 계획하고 시설 수용을 방지하기 위해 이 지침을 참고할 수 있다.

“당사국은 모든 형태의 시설수용을 폐지하고, 시설 신규 입소를 금지해야 하며, 시설에 대한 투자를 막아야 한다. 시설수용이 장애인의 보호 조치 혹은 ‘선택’으로 고려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협약 제19조 이행은 공공 보건 긴급상황을 포함한 위기 상황에서도 중단될 수 없다. 시설수용을 지속하는 데 어떠한 정당한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8시 33분, 지하철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오르내린다. 낭독하는 배재현과 이를 듣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출근하는 시민들이 지나간다. 그 사이로 달콤하고 신선한 향기도 같이 흘러간다. 낭독이 끝나자 사람들이 손뼉을 친다.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거나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지하철 속 사람들이 박수 소리에 고개를 들며 승강장 쪽으로 시선을 빼꼼 빼낸다.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가 활짝 웃고 있다. 사진 강혜민

8시 35분, 박경석이 갑자기 사람들에게 MBTI를 묻자 한 여성이 “ISFP요”라고 답한다.

“저는 사람들이 MBTI 물으면 ‘CRPD(장애인권리협약)다’ 그래요. (사람들 조용하다) 썰렁하죠?”

박경석이 민망한 듯 혼자 웃자 그제야 몇몇 사람이 따라 웃는다. 박경석이 이야기하는 동안 분홍 코트를 입은 서울대병원분회 조합원이 등을 돌려 혜화역 벽면을 찬찬히 살핀다. 그 벽면에는 지난 1년 동안 뜯겨 나가고 철거당한 목소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스티커가 뜯겨 나가면서 남겨둔 하얀 살점 위에 누군가는 직접 글씨를 쓰고, 반짝이는 새 스티커를 반창고처럼 붙였다. 그 벽면은 누군가에겐 지저분해 보이고, 누군가에겐 애틋하며, 누군가에겐 흉물이고, 누군가에겐 안쓰럽다.

8시 37분, 박경석이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이렇게 물어요. 왜 지하철에서 탈시설 이야기하냐고. 2001년부터 이동권을 외쳤습니다. 그때 장애인의 70.5%가 한 달에 서너 번 외출했어요. 일주일에 한 번 외출한 거죠. 이것이 교육의 제한으로 이어졌고, 교육을 못 받으니 장애인은 노동시장에서도 철저히 배제됐습니다. 결국 지역에서는 가족의 부담으로 남겨져 시설에 수용됐고, 이제 시설에서 나오고 싶어 해도 이 사회는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그것(시설에 수용된 것)이 선택이라고 이야기하는 수용시설 정책을 폐지해야 장애인도 자유롭게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하는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임성재가 손뼉 친다.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가 그림 세 점을 들고 있다. 왼쪽부터 이형숙, 박경석, 이규식의 초상화다. 정윤상 씨가 선물한 그림이다. 사진 강혜민
정윤상 씨가 그린 그림을 들고 환하게 웃는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 사진 강혜민

8시 40분, 파주시민 정윤상이 나온다. 그가 직접 그린 박경석, 이형숙, 이규식의 초상화를 선물한다. 알고 보니 그는 그림을 전공한 ‘미대 남자’다.

“어떤 유형의 그림이에요?”라고 묻는 박경석의 질문에 정윤상이 “표현주의”라고 답하며 “색깔, 터치, 붓의 움직임을 잘 보아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설명한다. 그가 오늘 특별히 그림을 그려온 이유를 말한다. 구직으로 인해 오늘 이후로는 전처럼 잘 나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안경에는 김이 서린다.

“마침표를 찍고 싶어서 그림을 그리게 됐어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아프지 않은 척, 멀쩡한 척 살아야 하는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하는구나’ 하면서 살아왔는데, 여기 와서 ‘나는 장애인이다’라는 것을 당당히 밝히고 권리를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지하게 됐습니다.”

정윤상 씨가 ‘투쟁’을 외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정윤상의 이야기를 듣는 박경석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잔잔히 퍼진다. 정윤상이 인디언의 말을 전하며 아침 선전전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내 뒤에서 걷지 마라. 나는 그대를 이끌고 싶지 않다. 내 앞에서 걷지 마라. 나는 그대를 따르고 싶지 않다. 다만 내 옆에서 걸어라.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그의 옆에 선 박경석이 정윤상에게 화답한다. “오늘 가기 전에 같이 커피 한 잔 마시고 가요.”

김민재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오늘 첫 선전전에 참석한 노들센터 신입활동가 김민재가 사람들에게 인사한다. 그의 인사를 끝으로 오늘 선전전은 조금 이르게 문을 닫을 채비를 한다.

8시 53분, 박경석이 말한다. “오늘은 조금 일찍 마쳐도 될까요? 장애인에게 권리를! 차별은 이제 그만! 동정은 집어치워! 혐오는 쓰레기통에! 이윤보다 생명을!“

구호를 외치는 정윤상의 목소리가 유난히 우렁차다. 마무리 구호와 함께 사람들은 유유히 승강장을 떠난다.

박명훈 다큐인 영상활동가가 촬영장비를 정리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8시 57분, 선전전 참석자들이 빠진 5-4 승강장은 휑하다. 그곳에서 박명훈이 혼자 남아 카메라를 분리해서 가방에 넣고 있다. 박경석은 파주시민 정윤상과 함께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승강장을 떠난 후였다.